내가 오고 갔던 길
끝까지 갈 수는 있을까?
끝은 어디일까?
돌아가는 곳만 있는 것은 아닐까?
정확히는 돌아간다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닐까.
어딘가 끝을 가본다고 해서, 끝은 아니다.
끝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정말 끝도 없는 거라면,
굳이 멀리까지 가보겠다면 좀 쉬어가는 것도 필요하다.
2시간 동안 격하게 농구를 했다. 얼마 전 아프고 난 뒤 처음으로 농구 시합을 했을 때도 이랬다. 다시 예전처럼 뛸 수 있음에 신나 교체도 거절하고 무리해서 뛰었다. 머리 우측 상단이 찌릿한 느낌이 한참이나 이어졌고, 분명 흔적도 없다 했던 목과 가슴 곳곳은 통증으로 아팠던 곳임을 알려줬다.
그렇게 반성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20년 전에 공을 잡아 쥐어줬던 그때처럼 또 앞뒤 모르고 달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른 곳에서 몸이 적당히 좀 하라고 알려줬다.
서울을 가로질러 농구하러 가는 길은 정확히 퇴근시간에 걸려있다. 올 때는 30분도 안 걸리는 거리를 1시간 반이나 걸려 갔다. 샌드위치 하나를 먹는 둥 마는 둥 차에서 먹었다. 안 흘리려 노력했고, 조심히 운전한다고 노력했고, 그래서 어떻게 먹었는지는 기억도 안 난다.
미리 도착해서 준비 운동을 하면 당연히 좋을 걸 알지만, 일을 하다 자리에서 막 뛰어 나가기에 유일한 준비운동은 엑셀과 브레이크를 번갈아 밟는 일이다. 그때만 해도 나중에 무슨 일이 벌어질 줄 모르고 이게 준비운동이라 장난 삼아 생각했었다.
그렇게 정각에 간신히 도착해 허겁지겁 옷을 갈아입었고, 공이 쥐어진 나는 돌아가서는 안될 20살로 또 돌아갔다. 농구든 나름 공평한 점도 있는데, 나처럼 운동신경이 뛰어나지 않아도 한걸음 한걸음만 더 가면 노력의 댓사가 돌아온다. 특히나 남들이 힘들 때 더 말이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더 뛰었다. 그 결과 온몸은 녹초가 되었고, 양쪽 발은 사이좋게 두 개씩 녹색 발톱을 나눠가졌다. 잘 걸어지지도 않아, 뒤뚱뒤뚱 발을 끌고 가 시동을 켰다. 평소 편안한 의자는 이때만 되면 페달과 멀면 먼 대로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불편하다.
상암동에서 출발한 차는 올림픽대로를 한참 달리고 있었다. 앞 차가 속도를 줄이자 나도 브레이크에 힘을 주었다. 순간 정강이뼈 옆 근육이 확 조여왔다. 종아리 뒷 근육이 뭉치면 엄지발가락을 들면 풀린다. 그 생각이 들어 발가락을 앞으로 당겼다.
순간 끔찍한 고통이 발에 느껴졌다. 앞을 풀려면 반대로 발가락을 움직였어야 했다. 위급함으로 멍청해졌고 그래서 더 위험해졌다. 신발이라도 벗어볼까 했다. 차가 휘청했다. 한 손으로는 핸들을 잡고 한 손으로는 다리를 주물러봤다. 하지만 앉은 상태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었다.
크루즈모드를 켰다. 신발을 벗었더니 맨발로 페달을 밟을 때 힘이 더 필요해 근육이 더 뭉쳤다. 다시 신으려 신발에 발을 구겨 넣으려 하니 쥐는 더 심해졌고, 앞을 보는데 집중하기가 어려워졌다. 믿음직스럽지 않은 크루즈모드도 용케 앞차와의 간격을 맞춰 속도를 줄여줬다. 다행이다 싶어 다리를 한번 쳐다보려는 순간 옆차선에서 차가 끼어들어오는데, 거기까지는 잘 못 보는 차가 속도를 줄이지 못한다. 통증을 참으며 간신히 브레이크를 밟는다. 집까지는 5분도 안 남았다. 나는 더 버틸 수 있을까?
그날 미국에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해가 뉘어져 돌아가는 길의 바람은 더 차가웠다. 햇살은 약해져 수분을 머금은 바닷바람을 데우기 부족했다. 아는 괴로움은 더 힘들다. 지금까지 오며 봤던 풍경들은 아직 갈길이 한참 남았다는 이정표로만 보였다.
분명 조금 전까지 천천히 포기하고 걸었다. 하지만 끝을 찍고 나니 다시금 무서워졌다. 한번 더 보고 싶은 절경도 있었지만, 핸드폰 배터리는 이제 10%도 남지 않았다. 이게 떨어지면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할 것 같았다. 저 먼바다 건너편 와이프에게 혹시 몰라 문자로도 남겨놓을까 했지만, 걱정만 더 하게 할 것 같아 조금만 더 버텨보기로 했다.
차에 둔 물 한병이라도 그리워졌다. 어제 먹다 남긴 피자가 떠올랐다. 이 무리한 하이킹을 끝내면 당장 뭘 먹어야겠다 생각했다. 그렇게 돌아오는 길에 아까 보았던 비박과 캠핑 사이 그 무언가를 하는 사람을 다시 보았다. 나는 다시 돌아가야 했기에, 잠시나마 내려두었던 내 걱정 보따리를 다시 챙겨 들었다.
해가 아직 남아있을 때, 다행히 차에 앉았다. 하얀색 벽들이 뻥뻥 뚫린 오래된 집들은 노을을 받아 한층 더 무서워졌다. 차에서 한숨 돌리고 가고 싶었지만, 혼자 남아있는 게 더 무서웠다. 이런 게 머리가 나빠서 생기는 고생이다. 4시간이 훨씬 넘게 걸리는 코스를 3시간 반 만에 완주하고 무서움에 바로 샌프란시스코를 향했다.
해가 지기 전에 최대한 큰길로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굶주린 배는 지나가는 길에 사람이 많아 보이는 굴 레스토랑에 제발 좀 들어가자고 했다. 이 동네는 굴 양식장이 국가에서 보호 중이라고 했다. 언제 다시 와보겠냐는 좋은 명분이 생겼다. 제일 싼 굴도 3개에 십 달러가 넘었다. 다들 맥주를 한잔씩 마시고 있어, 눈치껏 맥주를 시켜 한 모금만 마셨다. 취기가 올라와 더 마시지 못했다. 배고픔은 공깃밥 같은 감자튀김으로 대신했다.
해가 계곡 사이로 넘어가고 있었다. 시간은 다섯 시가 넘었고, 나는 혼자였다. 중간에 어디에서 쉴 수 있을지 몰랐으며 숙소는 다시 2시간이 남았다. 더 늦어지는 초행길 밤운전이 무서워 다시 운전을 시작했다.
그 후 얼마나 더 힘들었는지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피로함에 주의를 혹시라도 놓칠까 봐 등받이에 등을 기대지 않았다. 제일 아름답다는 1번 국도는 꼬불꼬불 산길이 이어져 무서웠으며 금문교는 소문대로 빨간색이었고 샌프란시스코는 언덕이었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 당연히 무사히 도착은 했다. 돌아오는 길이 너무 힘들고 고되어 울고 싶었다. 그래서 평소에 안 하던 행동을 하기로 했다. 언덕길 공터에 차를 잠시 대고 쉬었다. 그리고 다시 운전하다가 휴게소가 무서웠지만 또 멈춰 쉬었다. 쉬고 또 쉬었다. 결국 끝까지 가려면 적절히 쉬어야 했다.
5분만 참으면 되니 버틸까 고민하던 찰나, 멍청한 머리가 용케도 예전 기억을 꺼내 들었다. 쉬지 않으면 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길을 갑자기 끝낼 수도 있으니 정신 차리라는 기억말이다.
통증을 참으며 간신히 올림픽대로를 빠져나갔다. 근처에 마침 차를 잠시 정차할 곳이 있었다. 차를 멈추었다. 문을 열고 발을 딛는 순간에도 계속 ‘악’ 소리가 저절로 났다. 차문을 열어두고 아픈 다리를 올렸다. 그리고 열심히 주물렀다. 그러자 반대편 다리도 서운한 듯 쥐가 났다. ‘악’ 소리와 헛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났다. 빨리 집에 가는 것은 포기하고 윗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양쪽 다리를 천천히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늦은 밤 한참이나 앉아서 다리를 주무르며 멀리 달빛을 보았다.
아내가 종종 나보고 말한다. 무모하고 무식하고 운이 좋았다고. 혼날까 봐 말은 못 하지만 반만 맞았다고 속으로만 생각한다.
건강했던 시기에 무모함과 무식함을 내 체력과 건강이 지탱해 주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가 엊그제 같다. 크기도 부피도 생김새도 그때와 다르지 않다. 목욕 좀 하고 헤어스타일도 좀 다듬으면 막 손세차를 끝낸 듯 긁힌 생채기들을 빼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 당연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도 물론이고. 다만 이 차 안에 엔진과 부품들이 오래되었음을, 차와 달리 건강검진만으로는 크게 느끼지 못한다.
그래도 이제는 조심히 운전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안다. 끝이 없는 길이자 언제든 끝날 수 있는 이 길, 다시금 고생 끝에 간신히 이어 붙인 이 길을 멀리까지 가보고 싶다. 그러려면 포기할 때는 포기도 좀 하고, 현재를 즐기려 주변을 둘러도 보고, 20살의 내가 아니라는 분수도 좀 알고, 중간중간 적당히 쉬며 종아리 주무르듯 기름칠도 좀 하면서 가야 하는 때 말이다.
아쉽지만 이전의 내가 아님을 받아들이고, 천천히 오래 사랑하는 사람들과 길을 걸어야겠다 다짐해 본다.
힘든 일과 슬픈 일들도 많은 새해지만, 중요한 것들은 고이 기억한 채 우리는 또 각자의 길을 걸어야겠죠.
이 글을 보시게 되는 분들 모두 사랑하는 사람들과 건강히 오래오래 길을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