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을 기록하다
쉼.
어딘지 알면
바늘을 콕 박아 뭉친 혈을 뚫고 싶지만
도무지 모를 불안함의 지점을,
애써 외면한 쉼.
불안함의 지점을 찾는 일,
결국 꾸준한 연습.
매일 매일,
오늘도 연습하며
지금껏 적은 문장들을
차근히 훑어내린다.
이어지는 기록은 모 스타트업 기업에서
120일간 적었던 120만 문장에 대한 소회.
어떤 가이드라인도, 방침도 없이
예시링크와 제품 정보만 툭, 서브.
배워본 적 없고, 규칙도 모르고
드리블 한번 안해본 나는
눈만 말똥거리다
계속 그렇게 있을 수만은 없어
공을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거짓 하나 안 보태고
제품 포장지만 100번을 읽었을까.
포장을 뜯진 않았지만,
실제로 뜯어 제품을 손에 쥐고
가늠해본 다음 입에 털어넣기라도 한 듯.
세세하고 구체적이고, 현실감있게
머릿속에 지속적으로 그리고 상상했다.
상상만으로 바로 익숙해지지 않는다.
상상만으로 다 알 수도 없다.
그러나,
최대한 디테일하게 상상하는 것이
그때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상상에 몰입하자,
실존처럼 다가왔다.
제품을 보지도, 만지지도, 먹어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소비자의 첫 반응과 행동을 세밀하게 살피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손 안의 첫 감각으로 제품을 대면했을 때,
나의 사고와 감각과 행동과
총체적인 모든 것이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음을 확인했다.
상상은
실제보다 더 실제 같았고,
실제를 마주했을 때
상상은 현실 그 이상으로 다가왔다.
'오버스럽다'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회사가 판매하는 제품은
진열대 과자 집어들듯
쉽게 살 수 있는 제품이 아니었다.
더욱 치밀해야 했고
한번에 혹해야 했고,
소비자 일상 깊숙히 스며들어야 했다.
일상 깊숙히 스며드는 글을 썼다.
'효과좋다', '추천한다' 따위의 단어는
무의식의 서랍 안에 박아두고
의식의 푯대가 정확하게 지시하는 방향으로
밀면처럼 쭉쭉 밀며 나아갔다.
어설프디 어설펐던 첫 문장은
치이고 부딪히고 깨지고 다듬어져
날카롭게,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표현하는 모든 것을
한 획, 한 획 분명한 점, 선, 면으로 구체화시키고 구현했다.
퇴사할 때 나의 문장들은
입사할 때의 그것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판매자 입장에서 소비자 입장으로 전환되었고
120만개 문장을 기록하며 이미 120만번 구매한 사람이 되었다.
흐릿하다 또렷해지는 육지의 윤곽에 환호하고
마침내 배를 정착한 뒤 환호하는 선장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그 당시 나의 성과에 대해 아무런 코멘트가 없었고
누구도 나의 원고에 피드백이나 관심조차 없었는데 그랬다.
그저 '내 문장이 이렇게 달라졌구나' 하는 기쁨에 심취해
매일 새싹에 물을 주듯, 그렇게 내 문장들을 키웠다.
지금도 나의 문장에
매일 물 주는 것을 잊지 않고
지금 여기 브런치에서,
인스타에서, 블로그에서 매일 키우는 중이다.
좋은 기회와 인연이 닿는다면
또다시 상업적인 글을 쓸 기회가 올 것이고,
그 때를 대비하며,
어느 때보다 풍성한 열매와 수확을 거둘
나의 자식들에게 끝없는 격려의 말과 환호를 보낸다.
다 쓰고 보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너무 심취했나봐요.
다음엔 좀 더 이성적인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한 알의 좁쌀만큼이라도 도움이 되셨다면
구독 꾹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