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디까지 흘러가고 어디부터 계획해야 하는가
마음이 복잡한 하루다. 날씨를 워낙 타는 탓에 오늘 흐리고 비가 오는 것이 무드를 더 다운시켰는지도 모른다. 내가 주로 맡는 한국 시장이 더이상 팀의 포커스가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받았고, 내 매니저는 거기다 대고 책임지고 싶지 않아하는 어투로 (내게는 그렇게 읽혔다) 내 고용안정성을 보장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 미팅이 착잡함의 시작이었다. 괜히 공채로 들어갔던 대기업을 떠났나, 얼마나 기세등등하게 떠났는데 그 결정이 잘못되었던 것인가, 어느 날 갑자기 소속이 없어진다는 것은 한번도 경험해 본 적 없고 경험하기 싫어서 이렇게 열심히 살았던 건데, 원망, 분노, 아직 결정된 건 없고 이건 모두 기우일 수 있다는 자기위로, 계속 속앓이중인 지난 연애의 상처들까지 겹겹이 쌓여 또다시 험한 세상에 방호복 없이 혈혈단신으로 노출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결정론에 대한 물리학 유튜브 영상을 봤다. 물리학의 두 개념인 인과론과 목적론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내 인생은 내가 켜켜이 쌓아가는 인과의 결과인가, 이미 정해진 거대한 목적의 파도에 쓸려가는 현재인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했다. 잠시 눈을 붙이고, 신이 생각났다. 20대 때 자기결정적이고 자신감 넘치던 나는 종교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었다. 손아귀에 많이 움켜쥐기 위해 바쁘게 28년 간 움직였는데, 이제는 모래알마냥 빠져나가는 것들 투성이다. 일도, 사랑도, 내 손을 떠난다. 앞으로 건강까지, 더 많은 것들이 떠나겠지. 삶은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이며 그 사이사이 이겨낼 고통들이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실은 그 반대인가, 삶은 고통이며 그 사이사이 비교적 행복한 일들이 있는 것인가 라고 생각하니 뭔가 지금까지의 확신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 동네로 이사 온지 5년만에 처음으로 동네 성당을 갔다. 2층의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둠과 적막이 가득한 곳에 스테인드글라스의 빛과 십자가가 보였다. 성호를 긋고 기도라기보다는 명상에 가까운 것을 했다.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떠돌도록 두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구절이 떠올라 조용히 되뇌었더니 조금은 마음의 무게가 덜어졌다.
카페에서 책을 읽던 도중 이전에 만났던 남자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지금껏 이전 인연들에게 연락이 온 적은 잘 없었는데, 그래서 멈칫했다. 아이러니다. 저녁은 소개팅 약속이 있었다. 처음 보는 상대를 만나자마자 아 잘되긴 어렵겠는데 라고 생각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나에 대한 이야기와 고민들을 풀어놓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것도 이기적이지만, 사실 나는 내 말을 들어주고 지지해줄 사람이 필요한 걸지도 모른다. 특히 오늘은 더.
그의 카톡에 답을 했다. 답톡이 오길, 해외로 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해외로 나간다고? 정말 생각지 못한 일들 투성이다. 예상하지 못하는 일들이 계속 내게 일어난다. 흐름에 몸을 내맡겨볼까. 나는 어디까지 흘러가고 어디부터 계획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