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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의 나에게 답장을 보낸다면?

우리가 현재를 살아야하는 이유

 네이버 블로그를 뒤지다가 8년 전에 쓴 일기를 발견했다. 2014년, 내가 독일로 교환학생을 떠나기 전

나에게 쓴 편지였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는 너무 무거움에 매료된 거 아닐까? 짊어진

짐이 무거울수록 우리의 삶이 더 생생하고 의미 있다는 착각에 빠져서 말이야. 그게 착각인지 아닌지

나는 독일에서 알아보기로 했어. 1년 뒤엔 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 글을 쓰기 전에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읽었던 모양이다. 쪼끄만 게 되게 비장한

마음으로 독일로 떠났군. 뭐 아무튼. 굉장히 무게를 잡고 썼지만, 결국 취업이고 나발이고 신경 끄고

되는대로 살아보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1년 뒤의 신은지에게 어떤 답장을 받았냐고? 아무 답장도

받지 못했다. 한국에 돌아오니 졸업이 코앞이었다. 누가 절벽에서 등이라도 떠민 것처럼 쫓기듯

취업하고 나니 8년이 후루룩 지나 있었다. 편지를 보고 문득 궁금해졌다. 2015년 교환학생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나라면 그 편지에 뭐라고 답장했을까?


 2014년의 신은지가 소망했듯, 나는 뮌헨에서 모든 속박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되는대로 살았다.

뮌헨은 그러기 정말 좋은 도시였다. 이 도시에선 계절마다 축제가 벌어졌다. 봄에는 봄이어서 가을엔

가을이어서 축제가 열렸다. 축제는 열렸다 하면 한 달씩 이어졌다. 학교가 끝나면 나는 축제가 열리는

테레지안비제(Theresien Wiese)로 달려갔다. 100명은 거뜬히 들어가는 대형 텐트가 줄지어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머리통만 한 맥주잔을 쉴 새 없이 비워 댔다. 취기가 오르면 테이블에 올라가서 다 같이

발을 구르며 독일 전통 노래에 맞춰 춤을 췄다. 그러다 막차시간이 되어서야 기숙사로 돌아왔다.


 겨울엔 크리스마스가 있었다. 12월 한 달간 시청 앞에서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렸다. 스노우볼,

캐럴이 흘러나오는 오르골, 지팡이 모양 캔디까지. 나는 놀이공원을 처음 방문한 유치원생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마켓의 노정상들을 구경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했던 건 바로 글뤼바인! 독일식

뱅쇼다. 귀여운 장화 모양 컵에 글뤼바인을 담아 마시면 얼었던 몸이 금 새 녹았다. 가끔 마음에 드는

컵은 집으로 사 오기도 했다. 여름엔? 여름이란 계절이 그냥 축제였다. 햇볕이 부족한 독일인에게 해가

긴 여름은 축복이니까. 맑은 날이면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잉글리시 가든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수영복만 입은 채 태닝을 했다. 그리고 사우나에서 오래 버티기 시합을 하는 사람들처럼 누군가

기권할 때까지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 번씩 인생이 시시하게 느껴진다. 숨 고를 틈도 없이 달려왔는데 여전히 나는 출발선 주위만 뱅뱅

맴돌고 있고, 인생에서 이렇다 할 성취도 없는 것 같다. 무기력이 파도처럼 나를 덮친다. 그럴 때마다

매번 나를 구해주는 건 뮌헨에서의 추억이다. 망나니처럼 술통에 빠져 지내긴 했지만, 그 시간만큼은

현재에 충실했다. 탐욕스럽게 보고, 듣고 경험했던 그 시절은 내 머리 속에 사진처럼 선명히 남아있다.


 그렇다고 그 때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내가 다시 23살이 되어독일에

가 있는 상상을 해본다. 나의 서른 한 살 영혼이 23살인 나의 몸에 들어가 있는 상상. 아마 그

은지는 굉장히 성실할 거다. 아침 6시면 일어나서 조깅하고, 학교 수업도 빠짐없이 들을 거다. 그

때 사귀었던 외국인 남자친구는 다시 만나지 않을 거 같다. 그 땐 몰랐지만, 돌아보니 그 친구는

인종차별주의자였다. 클럽에서 밤을 새우는 일도 없을 거다. 시끄러운 클럽 음악을 들으면서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대화하는 건 31살 신은지가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23살의 신은지에게

즐거움을 줬던 일들은 31살의 신은지에겐 그다지 즐겁지 않다. 그건 그 시절에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과 기쁨이었던 거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2014년의 은지의 편지에 답장한다면 이렇게 쓸 것 같다. 한 번 지나간 인생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 23살 은지의 인생은 31살에 절대 다시 살아낼 수 없단다. 그러니까 지금 네가

있는 현실을 두 눈 크게 뜨고 즐겨. 뭘 느끼고 뭘 경험하고 있는지 온몸으로 느껴. 그리고 가볍게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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