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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lla Jan 29. 2020

전투적인 그림 그리기

프로 일러스트레이터의 작업환경 만들기



집에선 아무리 해도 안돼요.



당신의 게으름을 탓하지 마라.

집은 생활하는 곳, 그곳에서 일하는 것은 누구나 쉽지 않다. 하루 2시간 이내의 가벼운 일이라면 집에서 잠시 노트북을 열어 일하는 것도 효율적이겠지만, 오랜 시간 집중을 요하는 일이라면, 집에서는 작업이 안 되는 게 당연하다. TV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 출연자 기안 84가 직업이 잘되는 곳, 본인이 집중을 잘할 수 있을만한 환경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여정을 눈팅해보며 느꼈을 테지만, 집에선 안된다. 프로로 활동하고 창의력을 쥐어짜는 중이리면 다더욱 집에서는 작업이 잘 안 되는 게 진리다  

집에서 작업하면 집중력이 흩어지고, 누가 뭐라는 사람 없고, 누가 뭐라는 사람이 있어도 문제가 되기도 한다.

나는 쭉 작업실이 있다가, 여러 이유로 잠시처럼 집에서 3개월, 오픈공간에서 1개월을 작업해 보았다.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이 세팅되어있는 공간에서 벗어나자, 작업 속도가 현저하게 줄어 월 소득이 처참해진 뒤로는, 쭉 작업실을 고수한다. 한번 적응하는데 소요기간이 들기 때문에, 최대한 한 장소에서 2년 정도는 흐름을 가지고 간다.


작업실은 어쩌면 장비 투자 비용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작업 속도뿐 아니라 정서적인 부분까지도.


아이로부터, 강아지로부터, 엄마 아빠, 남편 어쩌면 고양이로부터 분리되어 - 작업실에 가서 그림을 그리는 건 회사에 가서 9 to 6로 근무하는 것만큼의 강제력이 생긴다. 물리적으로 떨어져야만 작업을 많이 그리고 집중해서 할 수 있다. 내가 잘 조절해서 신경을 스위치 해야지 (끄고 켜야지)가 인간인지라....



작업실을 써야 하는 첫 번째 이유 '환기성'이다.


프로로 일하다 보면, 그리고 또 일에 치여 살다 보면 점점 망가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옛날 만화에서 묘사되던, 꼬질한 만화가, 예술가의 모습이 내가 되다니. 그 그래도 나는 여자니까 한껏 잘 꾸미고 다닐 줄 알았지만  예외는 나를 비껴간다. 어딘가로 이동하지 않고, 나를 가꿀 필요도 없어져서 = 약속은 최대한 미루고, 꾸미는 일도 게으르게 된다. 게다가 당신이 30대를 지나는 중이라면, 시집가서 점점 연락 끊기는 친구들, 지방으로 흩어지는 지인들, 동기들은 다 포기한 그림을 계속 그린 다는 건 쉽지 않다. 가끔 교육업으로 창업을 한 친구들이나 그림이야기를 주고받는 정도. 그래서 때로는 그림을 그만두지 않을 이유로 가득한 사람들과 함께, (친하지 않더라도) 작업실이라는 한 공간 속에서 생산성을 주고받는 건, 꽤 괜찮은 정서적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들이 야작 할 땐 자극이 되기도 하고 - 그 사람들을 만나러 하루 최소 30분 이상의 이동을 통해 작업실을 가는 건, 업무적인 측면에서도 환기(Refresh)가 된다.

환기성이 중요한 이유: 프리랜서는 흔히 퇴근이 없다고 하는데, 작업실에서 '퇴근'을 만들어내야만 - 업무와 삶을 분리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퇴근하는사람들, 가을의 런던에서 2014, yulla




두 번째 이유 '업무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다.
 


어렸을 때 집에서 공부하려고 하면, 누구는 TV를 시끄럽게 하고, 아버지 오셨다고 잠깐 나와보라고도 하고, 심부름도 잠깐 하라고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똑같았다. 게다가 집에서 일하다 보면 내가 아무리 돈을 버는 사람이라는 걸 인식한다고 해도, 백수 취급을 받을 때가 있다. 가족들이 나의 업무를 알바(Extra job) 취급하는 것의 문제점은.... 따로 적지 않겠다. 가족끼리도 적당한 신비감은 필요하다.

제대로 된 직업임을 인정받는데 출퇴근이 꽤나 답이 된다. 나 조차도 일면식이 없는 제삼자를 미팅할 때, (코딩을 하던 디자인이든 기획이든) 어느 직업이든 집에서 일하는 사람보다는, 작업장소가 별도로 있는 사람이 직업인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일까, 일부 클라이언트는 집에서 작업하는 사람은 일단 가격 흥정을 아무래도 더 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인지 하기도 한다.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한다면 이런 말 많이 들어보셨을 거다.


"어디서 일하세요?"
"집에서요"


그리고 나의 경우, 업무의 30% 비율로 출판사나 광고사에서 직접 작업실을 방문해서 함께 일할 때가 있다. 미팅이야 커피숍에서 간단하게 진행해도 된다고 해도 협업이 필요한 경우에는 컴퓨터로 주고받는 것보다 만나서 한 번에 끝내버리면 효과적인 경우도 많다. 이건 쌍방을 위해 편하다. 많지는 않지만 그런 일이 더러 있다.



세 번째는 효율성이다.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곳은 효율이 다르다. 집에서 한 달 걸릴걸, 2주면 해낸다고 해야 할까. 작업을 하려다가 갑자기 설거지거리가 눈에 보이고. 관리사무소에서 띵동 벨을 눌러서 집중력이 흩어졌던 경험은 있을 것이다. 작업실에서 근무하면, 똑같은 업무라도 빨리 끝내고 쉴 수 있다. 일을 더 할 수 도 있고 -    일단 집안일을 할 시간에, 작업실에선 앉아있어야 하기 때문에 연필이라도 깎는다.


작업실을 구한다면 15만 원~ 20만 원 미만은 데스크 공간 하나가 평균적인 가격이다. 좁디좁거나 화장실이 엉망이거나 엘리베이터가 없는 경우이거나 지하 작업실이라면 20만 원선에서 썩 괜찮은 작업실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작업을 좀 하다 보면, 이젤도 좀 가져다 두고, 가끔 수채화도 좀 그리고 싶고, 위에 언급한 경우처럼, 클라이언트의 방문도 있을 수 있고, 동료의 방문이나 협업을 하고 싶은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일러스트레이터, 디자이너라면 휴게공간보다는 업무 공간 자체가 넓어야 좋다.


내 직업을 존중하며,

돈을 아직 못 벌어서 작업실을 못쓰겠어 - 그래서 더 아르바이트생처럼 일을 하게 되지 -  돈을 아직 못 버니까 작업실은 나중에 마련해야 지하는 악순환에서 탈출하고, 커피값 지출 보태서, 작업실로 가자.



* 능률적인 작업실 구하는 팁은 다음 브런치에 적어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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