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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Jan 06. 2023

소중한 이들을 위하여

쇄신[刷新]의 철학

아침부터 마음을 굳게 먹었다.


나의 소중한 이를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다는 걱정과 불안 한가득.


몸을 완전히 의자에 기대 뒤로 눕고


눈은 질끈

주먹은 꽉


위에서부터 강하고 밝게 내리쬐는 빛에

모든 것을 온전히 내어 맡기듯이 투항했다.


그리고 들리는 한 마디.


자, 이제 '아-' 해보세요~





시간은 일주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건강검진을 받는 날, 쇠뿔도 단김에 뺀다고 구강검진도 함께 받았다.

특별할 것 없이 간단한 설문지를 작성하고

의자에 뒤로 기대고 입 벌리고 있으면 담당 의사가 치아를 검사하고 끝나는 검진이었다.


근데 검진해주는 의사가 내 입 속에 조그마한 치아 거울을 넣고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옆에 간호사랑 뭔가 속닥이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알 수 없는 단어들이 오갔고

이내 의사가 심각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면서

이야기했다.


"오른쪽, 위, 맨 끝에 치아가 심하게 썩었어요.
겉으로 껍데기만 남아있고 안은 다 썩었네.
최소 신경치료를 해야 하고, 더 심하면 이 자체를 뽑아야 해요."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입 밖으로만 내뱉지 않았을 뿐이지

머릿속에서 비명소리가 수백 데시벨까지 올라갔다.


이 치료하는데 기본 수십만 원이 아니던가?

게다가 치료하는데 드는 시간이며 그 고통이며...


앞으로 고생은 불 보듯 뻔했다.




다시 일주일 뒤.


나의 구슬픈


'아-'


소리가 치과 진료실 안을 메웠다.


치과 원장선생님이 직접 요리조리 살펴보면서 치아 거울로 입 안 곳곳을 비췄다.


문제의 오른쪽 위 맨 마지막 이 근처에서 특별히 더 자세히 살펴봤다.



'제발 신경치료나 발치가 아니기를...'


머릿속에 같은 생각을 수백 번 반복했다고 생각이 들고


찰나가 쭉쭉 잡아당긴 모차렐라 치즈처럼 늘어진다고 느껴졌을 때쯤


원장선생님의 과묵한 입이 마침내 떨어졌다.



괜찮아요. 스케일링만 하면 되겠네.



오우 하나님 부처님 알라님 지져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여!


돈도 굳고 아프지도 않고

님도 보고 뽕도 따고


오늘 괴롭다고 느낄뻔한 하루가 어찌 이리 신명 나는지!

벌써 뭔가 생산적인 것을 해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원장선생님 왈,

정기 검진에서는 조그마한 증상 의심이라도 더 크게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나 같은 경우들이 종종 있다고 했다.





다행히 이 하나를 잃거나 대공사를 하는 사태는 면했지만


일주일간 전전긍긍하면서

평소에 제대로 치아 관리를 하지 않은 자신을 혼내고

꼼꼼하게 신경 써서 이를 닦았다.


부끄럽지만 그동안은 그러지 않았다.


야근하고 집에 들어오면

바로 드러누워서 핸드폰을 보다가 얼마 안 있어서

퍼질러 잠들던 게 일상이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스트레스를 받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뭔가 일탈한다는 마음으로 어렸을 적 몸에 배어있던

착한 어린이의 '치카치카'를 거부하고 싶었던 것인지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인 건간습관으로 지키고 있는

이 닦기는 어느새 나에게 낯설고 버거운 것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소소한 일탈, 소소한 자해가

하루 이틀 쌓이면서 어느덧 이런 지경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태가 단순히 이() 사태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지난 몇 개월 혹은 더 길게 일이 년간 점점 빚에 허덕이고

건강 관리를 점점 더 신경 쓰지 않게 되고

불안감 속에서 스스로를 속이고 있던 기간 동안

나는 나 자신을 속이고 점점 더 더럽고 지저분하고

정돈되지 않은 환경 속에 나를 계속 방치하고 있었다.

마치 치석에 점점 더 잠식되어가는 치아처럼.


그나마 이런 검진이 아니었으면

사태의 심각성을 내가 알았을까?

나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가 또 있었을까?

쇄신하고 다시 정신을 가다듬기 위한 기회로 내가 삼을 수 있었을까?




쇄신(刷新)이란

'그릇된 것이나 묵은 것을 버리고 새롭게 함.'이라는 뜻이다.


재미있게도 이 쇄(刷)라는 한자는

중국어에서 솔로 닦다, 솔질을 하다는 뜻으로 쓰이며

이 글자가 가장 많이 쓰이는 곳 중에 하나가

'刷牙'라는 동사이다.


바로 이를 닦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쇄신(刷新)을 굳이 이 공식에 대입해보면 어떻게 될까.

하루하루 새롭게 하듯이 솔질을 하다는 것이다.

삶에서 때가 타더라도 정진을 한다는 것이다.




이를 닦는다는 행위는

어쩌면 너무나도 하찮아 보이고

너무나도 일상 속에서 너무 평범해 보인다.


아니다.

적어도 나한테는 아니다.


이를 닦는 행위도

나에게는 돈도 아껴주고

건강도 확실하게 챙겨주며

삶의 궤적을 바꾸는

하루하루의 쇄신 행위이다.


이 닦는 행위는 신성하다.

하루하루 나 자신을 정진하고

나아가 세상에 도움이 되는 존재로 거듭난다.



처음에는 소중한 이(齒)들을 위한 행위가
나중에는 소중한 이(人)들을 위한 행위가 되도록


오늘, 잊지 말고 이를 잘 닦도록 하자.


치카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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