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엔 바다, 한쪽엔 성벽. 깜페체(Campeche)의 구성은 단조로웠다. 깜페체는 멕시코 동부의 유카탄 반도에 위치한 해변 도시로, 그곳에 간 것은 순전히 어디선가 본 파스텔 톤의 거리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처음 깜페체에 도착했을 때는 야속하리만큼 더워서 아름다운 카리브해의 물결조차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다. 새하얀 햇빛을 피해 그늘진 거리 사이사이를 걸어 다녔다.
일러스트 엽서 같은 풍경 속에서 사진을 찍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나는 길을 막고 있었나 싶어 재빨리 비켜주는 자세를 취했다.
이거 먹어볼래?
돌아온 반응은 의외였다. 한 남자가 처음 보는 삐죽삐죽하게 생긴 열대과일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는 내가 여행자인 것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던 것이었다. 그는 멕시코 사람이지만 이 도시에는 처음 왔고, 시장을 둘러보다 그 과일이 특이해 보여서 샀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내게 나누어 준 '삐따야(Pitahaya)'라는 과일이었다. 그는 과일과 함께 이제 자기에겐 필요 없다는 깜페체 지도까지 주고서는 나를 앞질러 갔다.
그가 떠나고 난 뒤 나는 잠시 방금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어리둥절해졌다. 손에 받아 든 과일에서는 진득한 액즙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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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나잖아?
깜페체는 도시 전체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요새 도시'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사실 반나절이면 충분히 볼 수 있을 만큼 작은 도시였다. 그런 곳에 나는 3일이나 일정을 잡아버린 탓에 무척 여유로웠다. 거리를 배회하다가 길가의 한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은 전형적인 멕시코 풍으로 꾸며져 있었다. 타코와 하마이까(Jamaica, 히비스커스) 주스를 주문한 뒤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식당 아주머니가 다가와 내 앞에 놓인 과일들을 가리키며 어떻게 먹는지 아냐고 물었다. 외국인인 나에게 자세히 알려주고 싶으신 건지, 그때까지는 몰랐던 삐따야(Pitahaya, 용과)라는 과일의 이름도 알려주고, 손수 잘라서 접시에 가져다주기까지 했다. 삐따야는 반으로 자르고 숟가락으로 파먹는 거라고 가르쳐 주셨지만, 막생 해 보니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았다. 그러자 웃으며 다시 와서 직접 해 주시기까지 했다. 길 가다 받은 선물에 이런 친절까지, 더위에 늘어지던 마음이 달게 차오르는 순간이었다.
혼자 삐따야를 열심히 파먹고 있는데 건너편에 앉아 식사를 하던 남자가 이 모습이 재밌는지 나를 보며 웃었다. 나도 응답의 표시로 어색한 미소를 날려주고는(?) 천천히 오후의 식사를 즐겼다.
배를 채우고 난 뒤 다시 거리로 나와 걸었다. 해 질 녘까지 해변을 좀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낮에 느꼈던 지독한 더위가 가시자 한결 살 것 같았다. 그때였다. 또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아까 식당에서 내가 과일 먹는 법을 배우는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던 그 남자였다. 그는 또 마주쳐서 신기하다며, 자기도 산책 중인데 같이 걸어도 되겠냐고 물었다. 인상이 선해보였다. 그와 함께 잠시 해변을 걸었다. 그는 나에게 삐따야의 맛이 어땠냐고 물었다. 나는 맛있었다고 대답하며, 낮에 길을 가는데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주고 갔다는 사연을 들려주었다. 그런데...
"그게 나잖아!"
"에에? 뭐?... 응???!!!"
과일을 준 사람이 자기라는 거다.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한동안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천천히 기억의 조각이 맞춰지면서 입이 절로 벌어졌다. 그는 정말, 나에게 과일과 지도를 주고 간 그 남자였다(!!!) 과일에 정신이 팔려서 잠깐 봤던 그의 얼굴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 그가 들어간 식당에 내가 들어갔고, 그는 나를 알아보고 미소를 지어 보인 것이었다. 아주머니한테 나한테 먹는 방법을 알려주라고 한 것 역시 그였다.
"진짜?(¿En serio?)"
나는 내 짧은 기억력에 다소 충격(?)을 받고 진짜냐며 재차 물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크게 웃어버렸다. 그도 이 상황이 웃긴 듯 같이 웃었다. 그의 폰에는 내가 찍은 것과 거의 똑같은 구도의 삐따야 사진들이 있었다. 우리는 사진을 맞춰 보며 또 웃어댔다.
나는 그제야 미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자기랑 똑같이 혼자 앉아서 삐따야 사진을 찍고 있었을 때 얼마나 웃겼을까. 내가 날렸던 어색한 미소는 또 어떻고. 식당에서 나온 뒤에 우리는 또 같은 길로 걸어갔던 것이다. 세 번이나 마주치는 장난스러운 우연의 연속. 더구나 그가 아니었으면 나는 끝까지 몰라볼 뻔했다.
한바탕 에피소드를 겪고 난 뒤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그의 이름은 아브라암(Abraham), 우리는 동갑이었다. 그는 멕시코시티에 살고 있는 직장인인데, 그 주에 깜페체로 출장을 온 거라고 했다. 주말에는 일을 하지 않아서 그도 여행자가 되어 도시를 돌아보고 있던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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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페체의 비밀
깜페체의 모든 컬러가 감감히 잠겨갈 때쯤, 어디에선가 희미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저쪽으로 가보자!" 우리는 멜로디가 이끄는 길을 따라 걸어갔다. 여기다 싶은 코너를 돌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성벽 사이의 거대한 스크린에서는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그 순간, 이 작은 마을이 숨겨놓은 비밀을 찾아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 캄페체노들이 감추고 있었던 건 이거였구나!'
은밀한 축제 현장에 들어선 우리는, 얼떨결에 중요한 비밀을 알아버린 이방인들처럼 두근거림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니까, 도시를 에워싼 성벽들은 모두 영화 스크린이었던 것이다! 깜페체는 영화를 사랑하는 도시였고, 우리가 발견한 것은 성벽 사이의 영화 축제였다. 한마디로 깜페체는 거대한 영화관이었다.
우리는 피터팬의 그림자처럼 이쪽 성벽에서 저쪽 성벽으로 건너 다녔다. 가로로 긴 청사 건물에는 깜페체 특유의 거리 풍경과 해적에 얽힌 역사를 담은 영상이 흘러갔다. 어떤 성벽에서는 4:3 사이즈의 고전 영화가 흘러갔다. 그 옆에서는 옛 전통 복장을 한 사람들이 연극을 펼쳤다. 깜페체는 우리에게 자신의 비밀을 허락해 주기로 한 걸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보랏빛이 어른거리는 성벽 위의 좁은 통로를 따라 홀린 듯 걸어갔을 때, 그 끝에서 만난 또 다른 축제는 우리를 완전히 감동에 젖어들게 했다. 마치 한 시퀀스의 절정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여기 진짜 예쁘다!"
깜페체노들이 요정처럼 나타나 상냥하게 잔을 건넸다. 잔 끝에 묻어있는 소금이 뭇별처럼 반짝였다. 우리는 그 자리에 서서 달콤쌉살한 칵테일을 받아 들며 성벽 위의 사람들에게 물었다.
"깜페체에 오면 어딜 가야 하나요?"
"성벽이요!"
"성벽이랑 바다 말고는 없나요?"
"네, 여긴 아주 작은 도시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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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번 거리
우리는 마지막으로 바다와 도시를 연결하는 59번 거리(Calle 59)로 걸어갔다. 깜페체의 모든 곳과 통하는 거리였다. 그 옛날 한쪽에서는 뚫으려 하고, 한쪽에서는 지키려 했던 요새의 자리. 깜페체는 벽 뒤에 낭만을 감추고 있는 아름답고 폐쇄적인 도시였다.
59번 거리에서 파는 것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밤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사기 위해 테이블에 앉았다. 아브라암이 첫 주문에 다섯 종류의 맥주를 시켰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남미에 있는 일부 인디언들은 먼 옛날에 아시아에서 왔대. 그래서 얼굴색은 다르지만 자세히 보면 외모가 닮았다는 거야. 아주 비슷한 느낌이라는 거야."
아브라암이 스페인어로 하는 말들을 이해하기 힘들 때면 나는 "천천히 말해줘"라고 했고, 그가 천천히 말하면, 신기하게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떠도는 이야기들이 진실일 거라는 예감이 든다. 우리가 모르는 어딘가의 뒤편에서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것처럼.
59번 거리에서 모든 예감의 열쇠를 찾은 것만 같았다. 오직 깜페체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아브라암은 작별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써 주었다.
"널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 너와 함께한 깜페체의 오후들을 잊지 못할 거야. 헤어져야 해서 아쉽지만 언젠가 멕시코시티에 돌아오면 꼭 연락해. 추신: 글씨가 엉망이어서 미안. 근데 이런 디지털 펜은 오늘 처음 써 봤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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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없는 아침
다음 날 아침, 다시 무력하리만큼 뜨거운 햇빛이 59번 거리를 비추었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어 거리에 서 있었다. 지난밤 벽마다 흐르던 영상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많던 사람들도 묘연하게 사라지고, 견고한 성벽만이 흔들림 없이 서 있었다. 나는 도시 곳곳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