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며 어떤 도시를 얼마나 많이 기억하게 되느냐는 어쩌면 얼마나 많은 우연이 일어났느냐에 달린 건지도 모른다. 내게 께레따로(Querétaro)는 '지오반니'라는 친구와의 우연으로 기억되는 도시다.
그를 처음 만난 건 께레따로의 작은 책방이었다. 우연이 우리를 여러 번 스쳐 지나가는 동안에도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렸던 것 같다. 책방에서의 첫 만남이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Cuando te vi por primera vez, no creí que te hubiera importado mucho. (처음 너를 만났을 땐, 네가 이렇게 중요해질 거란 걸 몰랐어.)
께레따로에 도착했을 때, 나는 몹시 우울한 상태였다. 여행 도중, 2주 동안 지독한 열병에 시달리며 모든 일정을 망쳐버렸고 낯선 호스텔 방에서 홀로 앓아야 했다. 짜고 뜨거운 이국의 음식들은 도무지 한 입도 넘어가지 않았고, 'Antigripal'이라고 쓰여 있는 멕시코 감기약은 전혀 듣지 않았다. 나는 온전히 나의 체력으로만 회복해야 했는데 이는 아주 오래 걸렸다.
겨우 운신이 가능해졌을 때 나는 께레따로로 넘어왔다. 감기는 회복세였지만 몸에는 여전히 기운이 없었다. 나는 가까운 곳만 천천히 걸어 다녔고, 때때로 정원에 앉아 쉬었다. 그렇게 햇살 속에 평온하게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코끝이 찡해졌다.
힘없이 걸어 다니다 보면 책방이 자주 보였다. 그중 한 군데에 들어가 보았다. 아담한 규모에 비해 보안은 철저한 곳이었다. 입구 사물함에 모든 짐을 맡기고 번호패를 받아 들어가야 했고, 대부분의 책들이 비닐로 포장되어 있어서 내용을 볼 수 없었다. 의외의 강경함이 불편했지만, 그중 볼 수 있는 책들만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나는 영화 '코코'가 소설책으로 나와 있는 걸 발견하고 그 책을 샀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와의 인연이 여기서 시작됐는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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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얼굴
께레따로의 센뜨로(Centro,시내)에는 늦은 시간까지 문을 연 가게들이 많았다. 숙소도 가까이 있었고 치안도 괜찮은 편이었기에, 어둑한 시간이었지만 레스토랑에 들어가 음식을 시켰다. 딱히 배가 고픈 건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앓은 시간이 억울했달까. 가게 벽에는 께레따로의 땅 모양이 보물섬의 지도처럼 그려져 있었다. 이 땅은 저렇게 생겼구나, 여기서 내일은 무엇을 할까?
나는 마음속으로 혼잣말을 하며 께레따로의 밤 분위기를 만끽하다 나왔다. Jardín Zenea 정원 근처에서 코너를 도는 순간이었다. 정확한 타이밍에 누군가 반대쪽에서 코너를 돌았고, 하마터면 상대방과 부딪칠 뻔했다. 양쪽에서 단말마의 비명을 내뱉으며 눈을 마주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그런데 단발머리에 하얀 얼굴, 분명 어디선가 본 얼굴이다. 잘 생각해 보니 그는 낮에 책방에서 책을 계산해 줬던 남자였다.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얼굴인데도 내 기억 속에 들어가 있었다.
"너는 아까 그 책방에 그?"
책을 계산할 때 눈을 마주쳤던 기억이 스쳐갔다. 마성 같은 기시감 속에서 그와 짧게 인사를 나누었고, 그도 나를 알아보았다. 그의 이름은 지오반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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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반니와의 약속
며칠 뒤, 지오반니와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따지고 보면 세 번째 만남이었지만 제대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근교 투어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미리 정원에 나가 그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답장조차 없었다. 조금만 더, 하면서 그를 기다리다가 결국 날이 저물어 버리자 나는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점심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던 터라 몹시 허기졌고, 그동안 감기로 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한 울분까지 함께 폭발해 버렸다.
멕시코에서 약속 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경우는 흔했다. 그것은 내가 멕시코에 와서 가장 먼저 뜯어고쳐야 했던 개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긍할 수 없었다. 아무리 지구 반대편이라지만, 여기도 인터넷을 쓰는 세상이잖아? 아무리 여기서 한국식 개념을 들이밀 수는 없다지만, 그것이 '약속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라 느껴질 때면 마음 한구석이 싸늘해지곤 했다.
Jardín Zenea, 지오반니를 기다리며.
어느새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나는 가로등이 빛나는 광장을 혼자 걸었다.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 저녁을 먹을까 싶었지만, 적당한 식당을 고르지도 못해서 시내를 두 바퀴나 돌았다. 2시간쯤 지났을까, 망연자실하게 벤치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지오반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구구절절한 사과를 담은 11개의 메시지와 함께. 그때가 이미 밤 10시 반이었다. 뭐라고 답장을 보내야 할지 몰라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딱 들었는데, 눈앞에 거짓말처럼 지오반니가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잦아드는 반가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도저히 구겨진 표정을 펴지 못했다. 지오반니는 거듭 미안하다고 말했다. 버스를 타려고 나왔는데 현금이 없었고, 현금을 가지러 다시 가야 했고, 폰이 갑자기 꺼졌고…….
Jardín constitución, 그가 나를 발견한 곳.
나는 그가 어떤 말을 해도 변명으로 느껴질 정도로 예민해져 있었지만, 그래도 그를 뿌리치고 숙소로 돌아갈 생각은 아니었기에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Tengo hambre. (나 배고파.)"
혼자 앉아 있었던 곳이 약속 장소도 아닌데 나를 찾아낸 것을 보면, 그 역시 나를 애타게 찾았던 거겠지? 그래, 그도 사정이 있었을 거야.
겨우 마음을 수습하고 함께 길을 나섰다. 그런데 근처에서 록 음악이 흘러나오자 지오반니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큰 소리로 신나게 노래를 따라 불렀다. 뭐지, 저 즐거운 자세는? 깊은 내면에서 강력한 황당함이 치솟아 올랐다. 사과를 받아내려고 매달리는 건 오히려 나 같았다. 왜 늦었냐, 뭐 때문이냐, 그게 몇 시간 걸렸냐, 전화는 왜 안 받았냐 하며 캐물은 건 다 나였다. 그의 우렁찬 노랫소리를 들으며, 아득한 거리감에 머리가 띵해졌다.
혼란스러움을 뒤로한 채 우선 허기를 달래러 갔다. 그가 골라 준 또르따를 먹고 나니 몸에 온기가 스며들었다. 따뜻해진 채 나뭇가지처럼 이어지는 골목들을 계속 걷다 보니 어느새 마음이 조금 느슨해졌다. 우리는 평범한 대화를 나누었다. 책방에 갔을 때 책 내부를 볼 수 없게 되어 있어 아쉬웠어, 나한테 말하지! 말했으면 언제든지 열어줄 수 있는 거였는데. 아, 그런 거였구나, 물어볼 걸 그랬어.
지오반니는 내가 혼자서는 절대 알아내지 못했을 께레따로의 지름길들을 리드미컬하게 건너 다녔다. 막다른 길처럼 보이는 곳에도 길이 이어져 있었다. 우리는 왁자지껄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바에 들어갔다. 그의 소개로 Pulque(뿔께)라는 Hidalgo(이달고, 께레따로가 속한 주) 주의 전통주도 맛보았다. 데낄라와 같은 선인장 증류주지만, 약한 도수에 다양한 과일즙이 가미된 달콤하고 가벼운 술이었다. 누군가 무슨 맛의 뿔게를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Maracuyá(마라꾸야)라고 대답하기로 정한 것도 이날 밤이었다.
지오반니는 책방 직원인 동시에 화가 지망생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연필로 스케치한 그림들을 보여주었다. 주로 동물이 많았다. 색칠된 그림은 없었고, 모두 연필 터치 그대로라는 점도 눈에 띄었다. 미완성 같기도 하고 완성 같기도 한 알쏭달쏭한 작품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는 마치 시간 여행 속에서 만난 예술가 같았다. 내가 영상을 만든다고 하면 그는 그림을 그린다고 했고, 내가 사진을 찍는다고 하면 그는 소리를 녹음한다고 했다. 우리는 정말로 동시대를 살고 있는 걸까? 나는 혹시 바다가 아니라 시간을 건너온 게 아닐까?
지오반니는 그날, 숙소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짧지만 온갖 희로애락의 감정이 스쳤던 만남이었다. 나를 화나게 하고 웃게 했던 께레따로의 지오반니, 너를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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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너야?
나는 몸과 마음의 안정을 되찾게 해 준 '께레따로'라는 도시에 퍽 마음을 붙였다. 께레따로를 떠나기 하루 전날, 가장 자주 갔던 정원인 Jardín Zenea에 또 갔다. 숙소에서 5분만 걸으면 갈 수 있는 정원이었다.
Jardín Zenea
정원에 앉아 있으니 호기심 많은 멕시코 청년 둘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여행 중이냐고 물어와 그렇다고 대답을 하며 스몰 토크를 이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정원 귀퉁이에서부터 점점 다가오는, 분명 또 아는 얼굴.또 지오반니잖아?
"안녕! 뭐 하고 있었어?"
"친구들이랑 이야기하고 있었어."
우리는 친한 동네 친구 마냥 자연스럽게 인사했다. 만나기로 약속한 날에는 장장 나타나지 않고 복장을 태우더니, 약속하지도 않은 날 절묘한 타이밍에 만나는 것은 또 무슨 장난이람. 이것으로 네 번째 만남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그날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녁까지 쭉 함께 보내게 되었다. 타이밍이란 참 신기하다. 그날 그 시간에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그에 대한 기록을 이렇게 길게 남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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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반니가 좋아하는 골목
나는 지오반니와 함께 다시 한번 께레따로의 무한한 골목들을 걸었다. 그는 길거리 음식이 나올 때마다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고 조금씩 사서 맛보게 해 주었다. 또르따(Torta)와 뿔께(Pulque) 말고도 튀김과자 같이 생긴 부뉴엘로(Buñuelo), 설탕이 잔뜩 뿌려진 손바닥만 한 빵 등, 이 지역에서만 파는 거니 꼭 먹어 보고 가야 한다고 했다. 심지어 장사를 거의 다 정리한 빵장수에게 가서 하나만 사겠다고 했는데, 빵장수 역시 전혀 개의치 않고 모든 걸 다시 펼쳐서, 하나 더 얹어주었다. 그가 사준 빵은 다음 날 새벽 버스 안에서 먹었다. 연두색 빵에서 달콤한 멜론 맛이 났다.
우리는 께레따로의 모든 숨겨진 골목을 정복하려는 듯 새벽까지 도시를 누비고 다녔다. 푸릇한 밤공기가 흐르는 아슴아슴한 길을 지날 때, 그는 여기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골목이라고 소개했다. 사진을 한 장 남기려고 셔터를 누르는 순간, 갑자기 어디선가 고양이가 나타났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카메라는 그 순간을 포착해 냈다. "Perfecto(완벽해)", 그가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골목이야"
예고 없이 나타난 완벽한 순간, 그것은 내 앞에 자꾸만 나타나던 지오반니라는 존재 같았다.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써 달라고, 이 기막힌 우연들을 기억해 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나중의 이야기지만 한국으로 돌아가기 이틀 전 나는 께레따로에 다시 한번 들렀다. 그리하여 한 여행지에서 다섯 번이나 만난 사람이 생겼다. 책방에서 마주쳤을 때만 해도, 약속 장소에 뒤늦게 나타나 노래를 부를 때만 해도, 나는 지오반니와의 인연을 깊이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께레따로에 특별한 친구가 있다고, 그 덕분에 께레따로의 골목 마스터가 되었다고, 말하고 다니게 되겠지?
마지막날 밤엔 비가 왔다. 지오반니는 겹겹이 입은 옷 중 하나를 벗어 나에게 빌려주었다.
Espero que podamos vernos más tiempo en el futuro. 다음에 또, 더 긴 시간 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