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의 크리스티안

"저 사람 따라가면 안 돼!"

by 세라

저 사람 따라가면 안 돼!


위험한 순간이었다. 집단 사기꾼에게 납치될 뻔했다. 나는 위험한 순간에 빠졌다는 것도 모른 채, 길에서 만난 낯선 사람을 내가 묵는 호스텔 앞까지 데려 왔다. 판단력이 흐려졌던 것일까. 시작은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한 중년의 여자였다. 자신은 남아공에서 온 관광객이라며, 나에게 영어로 도움을 요청했다. 택시에서 강도를 당해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녀가 자기는 스페인어도 못한다며 울먹거리며 도와달라고 말할 때, 나의 경계는 풀어지고 말았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런 것이었다. 가장 가까운 대사관이 에콰도르에 있어서 거기로 가서 여권을 재발급받아야 하는데, 거기까지 가는 버스비가 얼마이고…… 나는 그날 순진했던 건지 대담했던 건지, 시내 버스비까지 내주면서 그녀를 내 호스텔로 데려 왔다. 여행이 길어지면서 길 위의 여행자들에게 관대해진 탓에, 얼마 정도는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행 중에는 마음이 평소와는 조금 다른 상태가 된다. '나는 절대 그런 거에 안 속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낯선 환경에 가면 실수할 수 있다는 것...)


마침내 내 방에서 돈(!)을 꺼내서 내려왔을 때, 보안을 서고 있던 직원이 혹시 저 사람이 친구냐고 물었다. 그 호스텔은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보안을 서고 있었는데, 그는 나에게 아침에 지도도 주고 길도 설명해 줬던 직원이었다. 나는 더듬더듬 상황을 설명했다. 그랬더니 그가 한껏 경계를 취하며, 조심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내가 방에 올라갔을 때, 저 여자 뒤에 다른 남자 2명이 함께 있는 걸 봤다고.


소름이 확 끼쳤다. 그제서야 너무 방심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되짚어 보면 조짐은 있었다. 아무리 관광객이라도 'Hola(안녕)'조차 모르는 것은 이상했고, 일주일 전에 남아공에서 남편이 죽었다고 했고, 죽은 남편이 중국인이라고 했고, 그러다 한국 노래 '강남 스타일'을 안다며 신나게 말하기도 했다. 뭔가 이야기가 안 맞았다. 오는 동안에 겪었던 주변 사람들과의 상황도 연출됐을 가능성이 컸다. 아, 내가 납치될 뻔하다니…….


크리스티안의 충고대로 대충 핑계를 대면서 여자를 보내려고 했더니, 갑자기 표정이 급변하며 화를 냈다. 나는 20솔(약 7000원)만 주고 잽싸게 호스텔로 들어왔고, 타이밍에 맞춰서 그 직원이 문을 꽁꽁 잠갔다. 후! 그 직원의 이름은 크리스티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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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꾸까라차


그 일을 당하고 나서, 다시 밖으로 나가기가 무서워졌다. 아직 사기꾼들이 근처에 있을지도 몰랐다. 초저녁인데 나가지도 못하고 호스텔 내부를 배회하다가, 다시 크리스티안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와 얘기를 하다 보니 내가 주요 관광지는 하나도 못 가봤고 대표적인 현지 음식들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여행자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자기가 7시에 마치는데, 같이 구경하겠냐고 제안했다. 그렇게 그와 함께 저녁 산책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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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과 함께 근처의 바닷가 공원을 걸었다. 그에게 오늘 겪었던 아슬아슬한 상황을 들려주며 되짚고 생각하다가, 우리가 함께 이룩해 낸 '해피 엔딩' 부분에서는 손뼉을 마주치기도 했다. 크리스티안은 도시에 종종 그런 사기꾼들이 돌아다니고 있으니 절대 따라가면 안 된다고 했다.


한편 바닥 쪽에서 무언가 심상찮은 속도감이 느껴졌다. 자세히 보니 육중한 검은색 벌레들이었다. 나는 기겁하며 순간적으로 몸 개그(?)를 선보였고, 크리스티안은 넘어지기 직전에 나를 잡아주며 배를 잡고 웃었다. 크리스티안이 말했다.


라 꾸까라차는 여기서 흔해.


맙소사, '라 꾸까라차'라는 단어를 실제로 쓸 날이 줄이야.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노래, '라 꾸까라차, 라 꾸까라차, 아름다운 그 얼굴~'에 등장하는 단어. 그렇다, '라 꾸까라차'는 바퀴벌레다(!!!!) (생각해 보니 바닷가 근처라 갯강구였을 수도 있겠다.)


우리는 한 번은 한국어 버전으로, 한 번은 스페인어 버전으로 가위바위보를 해서 간식 내기를 하기도 했다. 웃고 마시며 시원한 밤바다를 걷다 보니 어느새 의기소침해졌던 마음이 다시 활짝 열렸다. 나는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모른 척하지 않고 나를 도와준 크리스티안이 너무 고마워서, 가지고 있던 블루투스 헤드폰을 선물로 주었다. 그러자 그는 자기가 아끼는 팔찌를 선물로 주었고 내 폰에 편지도 써 주었다. 최악이 될 뻔한 하루였는데, 크리스티안 덕분에 최고의 하루로 반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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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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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또 다른 나의 남미 친구가 이 편지를 보고는, 꺄아악 호들갑을 떨며 이건 '연애 편지'라고 했다.


"안녕! 오늘 밤,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답고 근사한 한국 소녀를 만나게 되었어. 너는 예쁜 미소를 가졌어. 너는 친절하고, 재미있고, 바퀴벌레를 굉장히 무서워해. 내가 널 지켜줄게. 오늘 밤 자기 전, 너는 나에게 아주 특별했다는 것을 기억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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