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보다는 소소한 마을과 자연을 좋아하는 나에게 소치밀코(Xochimilco)는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소치밀코는 멕시코시티 근교의 강이 있는 작은 도시이다. 실컷 자고 체크아웃 시간이 되어서야 호스텔을 나섰다. 지하철을 타고 따스께냐(Tasqueña)역까지 가서 뜨렌(Tren)으로 갈아탔다. 선착장이 어딘 줄도 몰랐고 배를 타려면 일행도 필요했는데, 그날만큼은 무계획에 몸을 맡겼다. '가면 다 해결되겠지 뭐.'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나와 비슷하게 갈팡질팡하는 사람이 한 명 보였다. 서로 누가 봐도 외국인 관광객이었다. 그가 내게 다가와 먼저 악수를 청했다
"안녕, 난 페리라고 해.(Hi, I'm Perry.)"
그는 미국에서 온 여행자였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팀이 되었다. 함께 길을 찾아 선착장에 도착한 우리는 1인당 300페소에 배를 타기로 했다.
소치밀코의 강 위에서는 모든 것을 팔았다. 과자, 맥주, 음악…… 누군가가 홀리듯 먼저 음악을 샀고, 풍경에는 마리아치의 노래 소리가 스며들었다. 모두가 환상 속에 잠긴 듯 이 배에서 저 배로 축배가 오갔다. 현실을 잊어버린 사람들 같았다. 어느새 페리는 갑판에 다리를 쭉 펴고 누웠다. 나도 선상 시장 구경을 멈추고 다른 한쪽에 철푸덕 누워버렸다. 배에 몸을 맡기고 있자니 강은 가만히 있는데 하늘이 흘러가는 것 같았다. 따사로운 햇빛이 뭉친 근육들을 풀어주려는 듯 내 몸 위에 소복소복 내려앉았다. 렘수면의 경계를 한숨에 넘어갈 것만 같았다. 즐거운 오후의 몽상이었다. 페리는 비디오 아트를 하고 있다고 했는데, 나중에 그의 영상에는 배 위에서 바람결에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동양인 여자도 한 컷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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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치밀코 라이프
이번에는 '땅 위의 시장'으로 갔다. 소치밀코의 재래시장에는 그들의 일상이 펼쳐져 있었다. 페리는 나와 달리 적극적으로 말을 잘 걸었고, 덕분에 시장 상인들과 유쾌하게 대화를 나누며 풍성한 인심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중에 '미겔(Miguel)'이라는 상인이 있었다. 그와의 대화가 길어지는 듯싶더니, 급기야 그는 장사를 접고(!) 우리에게 합류해 '소치밀코 가이드'가 되어주었다. 그러고도 모자란 지 이번에는 자기 집으로 초대하겠다고 했다. 페리는 그의 제안을 덥석 수락했고, 둘 다 기대 찬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빛나는 네 개의 눈동자를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미겔의 집에 도착하니 대문부터 귀여운 강아지와 미겔의 어머니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 장면을 보자, 끝까지 내려놓지 않고 있었던 내 경계심이 사르르 풀렸다.
"This picture says that you have a warm heart"
한편 페리는 경계심이 풀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날 나는 페리에게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달콤한 영단어를 들은 것 같다. 비스듬히 비치는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강아지를 안아주는 그의 옆모습은, 내 소치밀코 여행의 명장면 중 하나다. 나는 이 사진을 즉석 인화해서 페리에게 선물로 주었다. 사진 뒷면에 "This picture says that you have a warm heart"라고 적었다.
미겔의 어머니는 아들이 데려온 친구들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봐 주셨다. 미겔이 자신의 방을 보여준다고 해서 인사를 하고 헤어질 때, 미겔의 어머니는 우리를 한 명 한 명 꼭 안아주시고 기도해 주셨다. 나와 페리는 동시에 울컥했다. 어쩌면 마음을 전하는 일은 언어와 무관한 건지도 모르겠다. 때로 마음은 이렇게 짜릿한 전기처럼 오는 것이다. 우리는 미겔이 안내하는 '소치밀코 라이프'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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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의 박물관
계단을 따라 2층으로 걸어 올라가 '미겔의 방'의 문을 열었을 때, 페리와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건 방이 아니고, 거의 박물관이잖아! No es un cuarto, ¡es casi un museo!
미겔이 안내한 공간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평생 동안 모았다는 전 세계의 여행기념품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어쩐지 미겔은 여러 언어에 능통했고 외국 문화에도 해박했던 것이다! 감격한 우리는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고, 미겔은 오랜만에 손님을 만난 박물관 도슨트처럼 들뜬 표정으로 작품에 딸린 사연을 들려주었다.
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
오늘의 연속된 우연들은 모두 '미겔'이라는 상상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마법 같았다. 그 어떤 계획보다 완벽한 무계획으로 소치밀코를 활보하며,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퀴즈를 풀어서 여기로 들어와 있는 걸까? 미겔은 지구상의 모든 대륙을 정복한 신비한 여행자 같았고, 이 모든 환대는 오직 여행자를 위한 것이라는 듯, '오늘'이라는 선물을 즐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맥주 한 잔 할래? Quieres una cerveza?
미겔이 맥주를 권했고, 우리는 "좋아!"를 외쳤다. 그러자 정말 5분도 안 돼서 미겔의 또 다른 친구가 생맥주를 들고 나타났다. 정말, 혹시, 미겔은 마법사일까?
나, 미겔의 친구, 미겔.
미겔, 나, 페리.
미겔, 페리, 나. 우리는 나이나 국적과 상관없이 서로를 '친구(Amigo)'라고 칭했다. 미겔은 헤어지기 전 치아빠스(Chiapas, 멕시코의 한 지역 이름) 스타일의 예쁜 천가방을 선물해 주었고, 나는 이후 한동안 행운의 상징처럼 지니고 다녔다. 이 날의 모든 것이 행운이자 파티였다. 혼자 다니기 좋아하는 내성적인 여행자로서,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내려놓고, 계획도 내려놓고, 길 위의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 온전한 여행자가 되는 기적…….
그러니 여행 중 얼마간은 완전한 무계획에 몸을 맡겨보는 것도 좋겠다. 길 위에서 친구가 찾아오면 망설이지 말고 마음을 활짝 열어보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