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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Jan 10. 2024

오 나의 반려 귀신

책상 맞은편에 어떤 존재가 앉아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귀신. 거울. 혹은 나의 복사본. 나는 귀신과 함께 술을 마신다. 귀신은 내 술친구다. 어느 날 나는 귀신에게 툭 말한다. "책을 좀 팔아야겠어." 귀신은 흡족한 듯 책상 저 편에서 허연 팔을 쑤욱 뽑아내어 내 목을 조른다. 사실 그건 우리만의 일종의 장난 같은 거다. 귀신이랑 노는 건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재미있다.


계절이 바뀌면 또 이사를 해야 하는데, 고새 또 그걸 까먹고 책을 많이 모았다.  집으로 이사 올 때 자취 이래 처음으로 책장을 샀다. 자취 15년 만의 성과이자 업적이었다. 내 인생의 연대기를 쓴다면 그 해는 아마 이 문장으로 충분했으리라.: '책장을 사다'(휘날리는 글씨체). 나는 아늑한 기쁨에 젖어 책을 한 권 한 권 벽돌처럼 사다 모았고, 집을 짓듯 차곡차곡 세워 올렸다. 책을 세로로 세워두는  참으로 근사한 이었다. 먹고사느라 낡은 옷만 빌어 입히던 책들에게, 처음으로 영롱한 턱시도를 입혀준 것 같았다. 고귀한 영혼들이 비로소 우아하게 빛났다. 그때의 짜릿을 잊지 못한다.


다시 읽지 않을 것 같은 책을 12권 골라냈다. 중고 서점에 갖다요량으로 인덱스와 포스트잇을 떼고 밑줄과 메모를 지우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기억도 못할 표시를 뭘 그리도 많이 해 뒀는지, 뒤로 갈수록 귀찮음이 짜증으로, 짜증이 철철대마왕으로, 천장에 닿을 듯 비대해지고 있었다. 원래도 좋지 않은 손목이 얼얼 왔다. 이거 또 귀신의 장난인가. 정신력을 짜내어 10권까지 최상급으로 단장시키고, 2권은 보류했다. 손목이 너덜너덜해져서 뚜껑 열기는 물론, 컵도 들 수 없고 문고리조차 돌릴 수 없는 아주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봤던 기억 때문이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멈출 줄 안다는 건 좋은 일이다.


10권을 메고, 안고, 중고 서점으로 갔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중 절반 이상은 증정품이었다. 증정품은 매입이 안 된다고 했다. 시간이 꽤 지난 터라 생각지도 못했다. 4권을 팔고 6800원을 벌었다. 나는 도시인답게 쿨하고 근엄한 표정으로 중고 서점을 나왔다. 그리고 귀신에게 반항하듯, 무인 카페에 들어가 냉큼 카페 라떼를 사 먹었다. 며칠 동안 사 먹을까 말까 허접하게 고민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무인 카페에 같이 있던 남자가 10초에 한 번씩 요상한 짐승 소리를 내고, 3분에 한 번씩 일어나 카페를 한 바퀴씩 돌았다. 내 정신도 돌아버릴 것 같았다. 해서 나는 또 한 번, 귀신에게 반항하듯, 시장통에 들어가 김밥을 한 줄 사 먹었다. 무려 참.치.김.밥. 그런데 먹다 보니 배가 불렀다. 마지막 한 알까지 굶주린 아귀처럼 달게 먹고 싶었는데, 배가 불러 초라해졌다. 장에 대충 앉아 있는 내 모습이 그냥 싫어졌다.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사람 사는 집 같지 않게 너무도 차가웠다. 양말을 벗으면 얼음장에 발이 델 것 같았다. 러면 나는 발부터 총총히 사라지는 지. 아래부터 위로 똑딱똑딱 얼어서 천장에 한 점의 별이 되는 거야. 가로도 없고 세로도 없는 별. 마왕별. 아, 그토록 멋진 일이 또 있을까. 싸늘한 예감에 내 사랑스런 책장을 한번 쳐다봤다. 빛나는 나의 업적. 영롱한 나의 유물. 몇 시간 동안 홀린 듯 벌인 짓이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싶을 정도로 멍청해서, 왜 사나 싶었다. 청색의 사신이 강림한다는 2024년에도 금리가 떨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재취업의 길은 요원하기만 한데, 나는 다시 또 어떤 열악한 단칸방을 찾아야 할 것인가. 왜 살지. 왜 살까.


언젠가 딱 한 번, 삶이 답답해 점을 보러 간 적 있다. 그때 점쟁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너 혼자 술 마실 때 그거, 혼자 마시는 것 같지? 아니야, 귀신이 같이 마시고 있는 거야." 점쟁이는 눈물을 쏟으며 내 삶을 연민했고(이때 좀 감동했다), 저주했고(불행이 계속될 것이며 질병이 생기거나 교통사고가 날 거라 했다), 굿으로써 구원받으라 했다. 나는 구원을 거절했다. 구원은 너무 비쌌다. 구원은 개뻥 같았다. 이 세상에 불쌍한 중생이 넘쳐나는 건 다들 가난하고 믿음이 부족해서였군요, , 아 어쩌라고요 돈 없어요


어차피 어느 월셋집을 가도 만만치 않으니, 조금 더 내고 사람다운 집에 살자는 것이 지금의 전셋집으로 들어온 비장한 이유였다. 푸하하 꽝! 여긴 나락이었다. 누군가 지적했듯 마음은 이해하겠으나 욕심이었던 거다. 전세 사기는 생각도 못했다. 이어진 건 실업과 실연과 실족과 실망…. 라떼와 참치김밥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이제 내 곁에는 다정한 귀신밖에 없다. 포기할 수 없는 거? 그런 건 없다! 포기할 수 없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낄낄! 나는 당근 마켓에 들어가 최상급 책 6권을 오천 원에 올렸다. 당근! 당근! 당근! 새 채팅이 밀려왔다. 아, 또 너무 싸게 올렸구나. 이것도 자주 하던 멍청한 짓이다. (대충 싸게 올리면 당신도 위대한 당근 천사가 될 수 있다.)


다음날, 아무 데도 나가지 않고, 머리도 감지 않고, 담요와 스웨터를 뚤뚤 말고 일회용 손난로를 까고 앉아서, 시를 읽었다. 내가 사는 곳은 햇빛이 들지 않는 완벽한 북향의 공간. 오후 세 시쯤인가, 낯선 방향에서 희미한 겨울 햇빛을 발견했다. 저것은 정말 햇빛인가? 내 방에도 햇빛이 드는가? 나는  군데 고장 난 접이식 테이블을 꺼내 햇빛이 잘 보이는 아무 위치에 펼쳤다. 지름 60cm의 원형 테이블이 놀라울 만큼 작게 느껴졌다. 여기서 밥도 먹고 책도 읽고 양파를 썰기도 했다니, 말도 안 된다. 한때 내 밥상이자 책상이자 부엌이었던 공간. 반지름 곱하기 반지름 곱하기 3.14의 동그란 공간이 거기서 외따로운 섬으로 융기했다. 미색의 벽에 묽은 내 그림자가 보였다. 귀신이었을까. 무수한 질문에 대한 그 어떤 답이었을까.  순간 그림자가 작게 무어라 웅얼거렸는데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시, 시를 읽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림자가 사라지고 없었다. 햇빛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신에 들린 건지 햇빛에 들린 건지 알 수 없는 오후였다. 테이블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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