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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Jan 23. 2024

고독한 백수의 즉흥환상극 3부작

1부.


광증은 시원은 여의도였다. 여의도, 직장인들의 아틀란티스, 내 추억의 유배지. 그 이야기를 좀 해까 해. 그곳은 제정신으로부 유배된 자들의 초대형 밥통. 밥통섬 옆으로 세계의 도심에서 젤넓은 강이 흘렀죠. 새벽장이 열리면 훈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죠. 두들 여의도 밥을 먹으려 줄을 섰어요. 도나도 한 숟갈 걸쳐보려고 뭉치뭉치 으쌰으쌰 판돈 걸고 오.예.! 자 자, 흥이 좀 나셨나요? 이제 곧 첫 문장이 시작됩니다. 휴대전화는 무음 모드 설정해 주시길 바라-yo!


옛날 옛적에, 백수 일하던 시절,


가짜땅 한복판에 야광나무랑 산사나무가 살았습니다. 나는 그 둘을 구분하느라 꼬박 두 해를 보냈습니다. 점심시간마다 나무 사이에 서서 생각했지요. 열매알이 좀 더 잔잔한 네가 야광나무구나. 나무 그늘에 열매가 소복소복 쌓이는 네가 산사나무구나. 호 신기하군, 야광나무 아래에는 쌓이지 않는구나?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에 소중한 점심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어요. 그런데 맙소사! 그게 바로


정신 이상이라는 겁니다. 아흐! 나는 당신의 따뜻한, 희망전하는, MZ, 찾아뵙겠, 그래프 그래프흐흐…… 히.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여의도가 아닌지도 모르겠어요. 상암동에서 일할 때도, 목동에서 일할 때도, 나는 줄곧 광증에 시달리고 있었거든요. 내 서울 지도에는 해골 표시가 가득합니다. 이 도시에 아직도 보물이 남아있는 곳이 있을까요? 아! 어쩌면 모든 것은 서울역에서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난 서울역에서 태어났던 겁니다! 히유,


당신, 설마 여의도가 가짜땅인 거 몰랐습니까? 문학으로 치면 일종의 환상 소설 같은 장르죠. 그곳에 가면 누구나 멀쩡한 헛소리를 하게 돼요. 당신이라고 안 그럴 것 같아요? 좀, 저 미워하지 좀 마세요. 누구나 조금씩 허언증이 있지 않습니까. 나무도 다정을 모르는데 당신이 뭘 안다고…… 쉿! 지금 다 녹음되고 있는 거 몰라요? 최첨단 일렉트로닉 시스템이 불량 분자를 자동 변환하고 있다고 경고했을 텐데요?  맞다, 네네 그래서 제 의견은요, 헥헥, 야광나무 꽃이 귀룽나무나 꽃사과나무 꽃이랑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음…… 반응이 왜 이렇죠? 괜찮은 아이디어 아니었습니까?


화가 난 독재자들과 독자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폭락이다. 강등이다. 이야기가 중단된다.




(인터미션) ? 시작도 안 했는데요?




2부.


그러니까 이건 책 이야기예요. 희곡이자 극시이자 병상 일지죠. 내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까? 뭐든 너무 진심으로 대하는 건 좋지 않아요. 그때, 저쪽 무대에 불이 켜진다. 거기서 질의응답 세션이 진행되고 있다.


Q: 그래서 이번에는 진심을 다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저는 왜 또 상처받았지요?


A: 쯧쯧, 당신은 지독한 둔재로군요.


Q: 진심을 다하란 겁니까, 대충 그러려니 하라는 겁니까.


A: 몇 번을 말해요. 당신은 사는 일에 소질이 없어요. 다른 일을 찾아보는 게…….


Q: (mute)


연출자가 반문하려는 Q의 마이크를 껐다. 진행자는 다음 사연을 뒤적거린다. 자, 다음!




(인터미션) ……저는 왜 또 상처받았지요?




3부.


내담자 분은 그래서 책 속의 고독이 내 것인지, 작가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거군요?


네. 이건 그냥 생각이다, 생각일 뿐이다, 혼자 되뇌어보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생각이 아닌 겁니다. 감각이 실재합니다. 나는 뜨거운 언어에서 화상을 입고, 차가운 언어에서 동상을 입습니다. 언어에는 질문도 없고 대답도 없어요. 언어에는 이 있고 물살이 있지요. 여길 보세요, 손목을 그은 흔적이 보이죠? 언어가 실제로 살 속을 파고든 겁니다. 그런데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아서, 핏줄이 막히고 토사가 쏟아질 때쯤 되어서야 알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면 책상 앞이고요?


그렇죠. 아차 싶어 잊고 있던 시각을 사용해 앞을 더듬어 보면, 희멀건 책상이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에요. 수십 권의 책과 노트 더미 사이에, 삶은 지우개 가루처럼 싸늘하게 식어 있고요. 눈앞에 낭떠러지라도 있었다면 바로 뛰어내렸을 텐데, 아이들이 칭얼대며 어나니 별 수 있나요.


아이들에게 화를 냈나요?


화를 낸 건 아니에요, 부드럽고 사려 깊게, 그러나 단호하게 '깨어나지 마'라고 말했을 뿐이에요. 정말이지 자랑스러울만큼 침착했지요. 이미 어난 아이들에겐 술을 따라주었죠. 그런데 그중 한 녀석이 취하지도 않고 멀뚱히 말하는 겁니다. 책상이라니? 잘 봐, 책상 같은 건 없어. 보라고. 없잖아!


책 이야기입니까?


구분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분명한 건 저는 책 속에서 조금 더 제정신이라는 거예요. 책 속에 도사리는 고독과 광기, 내 것 같지요? 그건 조금 가짜입니다. 그건 곧 중단될 이야기예요. (그게 스스로 쓴 글이라 하더라도요.) 텍스트 속에서 한나절 구르고 놀다 보면, 어느 순간 '진짜 나'를 찾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잖아요? 바로 그때! 책이 끝나고! 순정한 내 고독만이 남는데! 아아 그건…… 감당할 수 있는 양을 넘어선 니다…… 적당한 타이밍에 다시 책 속으로 진입하지 못하면, 나는 고독의 아가리 속에서 주, 죽음을…… 요나의 절망을…… 하악 학…….


진정하세요, 진정하세요, 여긴 글 속입니다.


나는 당신이 필요해요. 당신은 이렇게 나에게 용기를 주잖아요. 하지만 관객들은 다 어디로 갔나요? 화가 많이 났을까요? 내 글이 별로인가 봐요. 하긴, 글이 어떻게 증시만큼 생생할 수 있겠어요. 파란 슬픔은 절제할게요. 여의도에서 파란색은 불륜의 상징이거든요. 앗, 내 손가락이 왜 이러지? 불운이요, 불운! 저는 그래프를 읽을 줄 몰라서 '옛날 옛적에' 강등된 적 있었답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를 쓰지 못했죠.


행복합니까?


고독합니다. 대답하는 이는 고독합니다. 질문하는 이도 고독합니까?


글 속에는 질문도 없고 대답없습니다. 


야광나무와 산사나무가 그리워요. 그건 진짜였어요. 믿어주시겠어요? 바람에 하늘거리는 꽃잎은 꿈이 아니었어요. 말을 거는 것 같았어요. 요나를 배신한 천사가 와서 손을 내미는 같았어요…….


깨어나세요, 1부와 2부는 지나갔어요. 실은 3부도 옛날옛적에 끝났습니다.


나 말고는 내 독자가 없습니까?


(mute)


(mute)

.

.

.


어느 해 4월. 이 글은 두 나무를 추억하다가 즉흥적으로 썼습니다. 쓰다 보니 헛소리 3부작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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