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라 Dec 12. 2023

번아웃의 그늘에서

퇴사한 지 9개월, 이제 나는 내 상태가 무엇인지 진심으로 의심하게 된다. 끝없이 공부하고 이직했던 지난 세월의 나는 다른 사람 같다. 그때의 나는 비명을 지르며 푸드덕대다 죽었고, 어쩌다 조금 더 별로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그냥 살아가고 있다.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이 금수의 자아는 어느 수렁 속으로 침잠하고 있는지, 어떻게 해야 구조해줄 수 있는지. 그러나 모르겠다. 막상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뻗어 오면, 누구도 날 구조하지 못하도록 있는 힘껏 도망친다. 날 아껴주는 이들의 마음을 기어이 스크래치 낸다. 그들이 모두 떠난 뒤 번아웃의 그늘에 홀로 앉아, 짙어지는 자기혐오를 바라본다. 한 번 배시시 웃어본다. 그리고 아무 생각이 없다.


퇴사 후 관계자들의 잡 오퍼를 몇 번 거절했다. 주저앉은 날 대신해서 짬짬이 채용 공고를 찾아 보내주는 친구의 연락도 점점 피했다. 콘텐츠 사업을 같이 하자는 친한 언니에게 성의 없이 대답해서 그 이를 화나게 만들었다. 나도 번아웃이야, 나도 어쩔 수 없이 하잖아, 다들 어쩔 수 없는데 억지로 하는 거야, 라고 말하는 지인들 앞에서, 입을 닫았다. 그래서 어쩌라고, 라고 말하게 될까 봐.


백수 폐인으로 환생해 삶을 연명 중인 지금에도 나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주고 함께 하자고 제안해 주는 지인들에게 너무나 고마우면서도, 정말로 보답하고 싶으면서도, 의지와 열정의 뉴런을 거세당한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넌 뭐든 잘할 것 같다고 말해주는데, 나는 퇴사 이후에 유튜브를 비롯한 영상 콘텐츠와는 아예 담을 쌓았다. 손 끝에 붙어 있던 단축키도 다 잘라버리지 않았던가. 트렌드 따위, 이제 정말 관심 없다. 잘 팔린다는 숏폼, 릴스, 틱톡, 그런 것도 싫다. 1분의 자극과 소비를 위해 나는 1800프레임을, 한 땀 한 땀 얼마나 미련스럽게 쌓아 올렸던가. 나는 뉴미디어 시대에 어울리지 않아요. 알바? 해 봤자 이자의 절반의 절반도 못 벌텐데, 의미 없잖아요. 그래서, 그대로 있을 거야? 계속 그렇게 살 거야? 걱정 어린 마음으로 물어도, 당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네, 아니면, 아니요? 양자택일? 그 사이의 어딘가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대나무 숲으로 몰래 들어가 혼잣말을 한다. 아, 살기 싫다…….


어떤 이는 우울증이나 번아웃이나 똑같은 거니까 조심하라고 한다. 자꾸 부정적으로 말하면 정말 말하는 대로 되니까, 긍정적으로 말해야 한다고 한다. 아니 그래요, 나도 차라리 우울증이면 좋겠어요. 그런데 사실 전 말짱해요. 하나도 말짱하지 않은데 너무 말짱해서 죽겠어요. 내가 나를 아니까, 그리고 나도 나를 모르겠으니까, 제발 우울증이니 뭐니 날 정의하지 말아 줄래요. 왜 아직도 미쳐지지 않는지, 나도 진짜 진짜 궁금하니까.


어떤 이는 세금과 이자 더미 속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 너는 그것 때문에라도 강제로 다시 일해야 하니까 오히려 다행이다, 라고 말한다. 이자 때문에 다행이라니, 이자 때문에 힘든 건데? 끝없이 거처를 전전해야 하는 가난한 이방인의 삶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어차피 내가 내 곳간 갉아먹고 있는 건데 뭐. 학자금까지 아주 지긋지긋해 죽겠는 걸. 이게 다행한 건 아니잖아. 난 마음이 팍 상해버렸고, 오래 마음을 나누어 왔던 그이에게 연락을 끊었다.


어떤 이는 너는 그래도 노력하고 있으니까 잘하고 있어, 올해까지만 그러고 새해부터는 다시 시작해 보는 거야, 라고 말한다. 근데 내가 뭘 노력하고 있지? 나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니까요? 물론 아무것도 안 하고 뭐 하냐고 말했어 못된 내 마음이 순순히 받아들이진 않았겠지만, 새해라고 새로운 마음을 먹자는 것도 싫었다. 그런 말을 들을수록 나는 더욱더 열렬한 슬픔의 수호자가 된다. 슬픔은 나의 힘. 슬픔은 나의 친구. 나는 슬픔하고 놀 거야. 묵은 새해에게 내 싱싱한 슬픔을 빼앗기지 않을 거야.


겨우 술이나 빌어 먹으면서 그나마 간간이 하고 있는 것이 글 읽고 쓰기다. 한 번은 누군가에게 자비로 포토북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말했는데, 너 그런 거 할 돈은 있냐, 또 어디 가서 사기당하는 거 아니냐,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력서는커녕 이 나이에 시집이나 안고 다니는 내가 또 헛짓거리나 하고 다니는 걸로 보였겠지…… 그래요, 그렇잖아도 그냥 해본 말이었어요. 사기 안 당해도 어차피 의지박약에 체력 부족이니까 걱정 마시고요.


나는 지금 힘들게 모은 돈과 얼마 안 남은 젊음만 낭비하고 있는 게 아니다. 주변의 사랑과 지지도 낭비하고 있다. 나중에 후회하고 자책하게 될 걸 알면서도 펑펑 쓰고 있다. 번아웃의 증상 중 하나가 사랑에 대한 낭비벽이라는 건 몰랐다. 이런 내 곁에 아직도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사실 단 한 글자도 할 말이 없다. 일 년에 한두 번쯤 연락하는 엄마가 뭘 하고 사느냐고 묻는다.


그냥 있어요.


엄마도 이제 육십이 넘었는데 참 답답하다. 알았다. 끊어라.


네, 그 한 글자를 말하지 못했다. 네, 겨우 한 글자 주제에, 너무 많이 떨릴 것만 같아서. 아무 말 못 하는 사이에 먼 곳에서 걸려온 전화는 툭 끊겼다. 미안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