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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Jan 18. 2024

백수가 세계의 비타민D를 수호한다

전에 한 번 언급해서 눈치채셨는지 모르겠지만, 현재 내 직업은 달지기다. 밤마다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달의 스위치를 켜고, 아침에는 출근길에 달빛 홍수가 나지 않도록 제시간에 스위치 끄기! 요것이 바로 찬란하고 근면한 나의 루틴이라, 이 말이다. 당신이 누리고 있는 그 밤은 다 내 덕이다. 몰랐다면 지금이라도 나에게 고맙다고 한 번 말해주길 바란다. 이것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니까.


나는 밖에 나가면 내 마지막 직업을 PD라고 소개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 대답은 내가 도깨비처럼 부리고 다니는 헛짓거리를 비밀에 부친 것에 불과하다. 나도 가끔은 사회생활을 해야 하니까 말이다. PD고 뭐고, 아 예술이고 뭐고, 이 몸은 절망에 푹 절은 부랑자올시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사회생활은 참 어렵다. 아, 그런데 어쩌다  글을 읽어버린 당신은 지금부터 내 비밀 요원이 좀 되어줘야겠다. 우연히 들어왔더라도 당신은 이미 뒷덜미를  잡혀뿟다. 거부하지 마시라. 당신에게도 비밀이 있다면 말해도 좋다. 뭐, 말하지 않아도 좋다.


작년에 회사에서 잘리고 난 뒤에 한동안 나는 찢어진 마음의 조각을 줍는 대도시의 넝마주이가 되었다. 그게 끝인 줄 알았는데, 이어진 다음 직업은 메모광이었다. 스쳐가는 모든 잡념을 메모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는데, 나는 그것도 일종의 직업병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최근에 나는 달지기로 전직했다. 이 직업의 필수 자격은 불면증이었고, 근무 조건은 해가 뜰 때까지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대 사항에는 밤에 대한 헛된 열정, 밤의 순도를 높이는 우울과 공상 능력,  세계의 노동에 대한 일반 경험치, 그 외 고독, 광기, 낭만주의 등이 있었다. 나는 이 분야에 있어 대단한 인재였기 때문에 면접을 볼 것도 없이 최종 합격했다. 밤의 확장을 원하는 음침한 세계들이 일제히 나를 탐냈다. 그리하여 이렇게 팔자도 좋게 <밤중일기>를 쓰고 있는 것이다.


PD로 일하던 시절에 사실 나는 투잡을 뛰고 있었는데, 내친김에 이것도 고백하자면 나는 제사장이었다. 나는 밤마다 수마에게 무릎을 꿇고 제사를 지냈다. 위대한 수마여, 여기 지독한 피로와 악몽을 바칩니다! 세상 미천한 불면자들을 위하여, 부디 톨의 잠을 내려주소서! 주소서 주소서! 혹시 당신에게 불면증이 없다면 그것도 다 내 덕이다. 뭐, 그렇다는 다. 의는 직장 생활을 그만둔 뒤, 백수 생활 중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수마라는 놈은 해가 중천에 뜰 때쯤 되어서야 어슬렁어슬렁 찾아오곤 했다. 그러면 나는 마치 술잔 끝에 발라놓은 소금을 핥아먹듯 겨우겨우 잠을 핥아먹었다. 간사할 만큼 달콤한 잠에게 날 살려줘, 아니 그냥 죽여줘, 한 모금만 더 줘 제발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면서.


이제는 안다. 수마는 낮을 좋아한다는 거. 밤의 주요 업무는 나같이 한물 간 늙은 달지기에게나 맡겨 놓고, 낮에나 저제나 어야둥둥 산책을 나오는 것이다. 망할 놈, 내가 몸과 마음을 바쳐 그리도 충성을 했거늘! 이제는 나도 수마에게 무릎을 꿇는 자존심 상하는 짓을 그만뒀다. 대신 이렇게 달을 켜놓고 미치광이 같은 글을 쓰고 노닥거린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이런 헛소리를 내 조대로 지껄이리야.


해를 못 본 지가 오래되었다 보니, 나는 마치 극야 속에서 실눈을 뜨고 살아가는 21세기 희귀 생명체가 된 것만 같다. 아직도 어제인가? 오늘은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걸까? 나는 몇 살일까? 어제가, 몇 해 전이, 몇 생 전까지도 어깨에 짐짝처럼 주울줄 매달려 있으니 이 거대하고 격렬한 피로는 응당 기원전부터 시작된 것이리라! 나는 거의 모든 인간과 단절한 채 긴 긴 시간을 보냈고, 바야흐로 시땅 다 함께 걷기 시작하는 횡단보도 따위에서 인간종 전체에 소속감을 느끼기에 이르렀다. 하하하! 이건 내가 가장 원하던 상태다! 고독의 마에스트로가 되어, 아주 가끔 천재적인 고독을 지루해하는 것! 그러나 초록불이 한 번 켜졌다 꺼지면 내 고독은 여전히 최상급이다. 이렇듯 천재에게는 일탈이라는 것도 쉽지가 않다. 솔직히 말하면 독거하는 백수들 중에서 제정신인 이가 있기나 할까 싶다. 그들도 알고 보면 나처럼 미치광이일 거다.


홀로 지껄이는 자들이여! 나의 비밀 요원들이여! 나는 당신의 고독을 좋아한다. 나는 당신의 광팬이다. 나는 당신의 헛소리가 듣고 싶다. 당신의 헛소리는 충분히 자랑스럽다. 그러니 가끔 휘영청 달빛 아래 바로 나! 미치광이 달지기의 노고가 떠오를 때면, 당신의 헛소리도 한 수 들려주겠는가? 어이 거기, 무표정한 당신!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괜찮다. 나는 내가 혼자라는 것도 안다.


눈부신 낮의 종족이여, 혹시 대낮에 별이 떨어지는  본다면 그건 내가 잠시 빛나는 단잠에 들었다는 뜻이다. 당신이 지쳐 잠든 영혼을 곤히 한  바라봐 준다면, 나는 당신의 꿈을 위해 꿈을 꾸리라. 끝나지 않는 밤을 수놓는, 이 세기 무엇에도 뒤지지 않는, 세상 끝내주게 아름다운 꿈을…….


오늘의 달지기는 여기서 물러간다. 여러분, 나는 가히 칭송받아 마땅한, 이 시대를 대표하는 대단히 큰 백수라는 걸 잊지 말아 주시라. 그럼 나는 이만 달을 끄러 가겠다. 당신을 위하여, 그리고 비타민D를 위하여, 똑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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