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라 Nov 20. 2023

국수 더 줄까?

한 인간이 한 인간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러니 우리는 작고 사소한 친절에도 감사해야 하며 낙엽이 꿈결같이 흩날리는 거리에서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는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여기자, 라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혹시 마음에 여력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남을 위해주자고, 조금 더 가능하다면 같이 울어주자고, 그 순간만이 우리가 가까스로 닿을 수 있는 최소 거리이자 최대 거리이며 각자가 저지른 불완전한 과거에 대해 용서받을 수 있는 간신한 길이라고 한 번쯤 믿어보자, 라는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으며, 버겁고 육중하며 생각보다 규칙적인 이 고독을 결국에는 불규칙적으로나마 받아들이게 될 거라는 것, 그러나 이런 식으로 자신의 고독을 노출하고 발화하다 보면 어느 순간 최초에 의도한 고독과는 가장 대척되는 지점에 가 있게 되리라는 것, 가장 내성적으로 고독을 발화하는 형식인 글쓰기조차도 그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정체를 알든 모르든 고독은 우리 안에서 그런 식으로 활동하며 누구도 고독의 욕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이렇게 고약한 고독의 성질을 언제나 주의해야 한다는 것, 또한 고독은 사랑이나 상실이 떨어져 나가고 남은 존재의 본질이 아니라 충동이나 몽상처럼 창밖의 유령 같은 개념이라는 것, 슥 문지르면 잠시 맑아졌다가도 곧바로 엄습하는 진득한 습기 같은 거라는 것,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것도 나는……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내 말은 그러니까,


그저 내 일은 내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야 한다기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에 더 가깝겠다. 이 세상에 내 월세를 대신해서 내 줄 사람은 없고, 내 밥을 대신해서 차려줄 사람도 없으며, 내 감기약을 대신해서 사다 주어야만 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으며, 내 유서를 읽어줄 책임과 의무는 그 누구에게도 없는 것처럼. 그것이 나에게 생명을 준 자일 지라도,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로부터 생명을 받은 자일 지라도. 누가 나의 내일을 대신해서 살아주겠는가. 나는 비관적이거나 염세적인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사는 일이 다 똑같이 그렇다는 것이다. 애써도 사라지고 애쓰지 않아도 사라진다. 기록해도 잊히고 기록하지 않아도 잊힌다. 짧게 머무는 자도 떠나고 오래 머무는 자도 떠난다. 그런데 나는 왜 쓰는가? 그것은 내게 가장 친밀한 고독의 습관 내지 고독의 형태라고 해 둬야겠다.


고독에 대해 해찰을 하고자 밖으로 나간 것은 아니었다. 밖으로 나간 것은 배가 고파서였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가장 푸짐한 양을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메뉴는 재래시장 좌판에 파는 '잔치국수'인 것 같다. 양동이 철그릇에 성인 남자도 배부를 만한 양이 한가득 담겨 나오는데, 양배추 하나에 8000원으로 올라버린 이 가상현실 같은 물가 폭등 시대에서 그나마 아직까지 한 그릇에 5000원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거기다. 나는 이 시대 백수답게 낡고 허름한 표정으로 국수를 한 그릇 주문했다. 밥을 해 먹을 힘도 의지도 없었는데 기온까지 다락같이 추락하여 머릿속에 오직 따뜻한 국물만 간절한 11월이었다. 국수는 뜨거웠다. 나는 뜨거운 것을 잘 먹는다. 입안이 데이고 헐려도 뜨거운 것이 좋다. 뜨거운 국물이 식기 전에 먹고 싶다. 뜨거운 국물이 식기 전까지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으면 좋겠다. 뜨거움에 대한 뜨거움으로 먹고 마셨다. 나는 왜 그렇게 뜨거움을 열망하는가. 나는 뜨거움을 타고난 사람이다. 나를 가장 아프게 한 것은 늘 열병이었다. 생의 차가운 극점들을 지날 때, 나는 어떻게든 뜨겁게 부서지방식으로만 버텨냈다. 나는 한여름 장마철에 태어났으며 내 사주는 본질적으로 火를 타고났고 심지어 그 아래 火를 깔고 있다고 들었는데 나는 그 이론이, 순수하게 뜨거운 국물에 대한 내 취향 때문에, 꽤나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때도 이미 객지 생활 경력이 적지 않았던 20대 중반에 본가에 며칠 머문 적 있다. 몇 월 며칠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과 비슷한 소슬한 저녁이었다. 식탁에 혼자 앉아 몇 년 만에 엄마가 차려 준 뜨거운 밥과 국을 먹었을 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뜨거움이 식도를 통해 내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한 숟갈, 두 숟갈, 떠먹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알갱이와 국물 입자너무도 안락뜨거움 때문이었다. 나는 애써 숨 죽이지 않고 태연하게 눈물만 흘렸다. 내 뒷모습은 거짓말에 익숙하다. 그때 내 앞모습을 본 건 7살 터울인 남동생뿐이었다. 고등학생이었던 남동생은 몇 년 만에 돌아온 누이가 소리 없이 울면서 밥을 먹는 장면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같은 엄마를 지녔지만 너무도 다른 삶을 산 그 애는, 지금도 여전히 제 누이를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스물이 넘어서 몇 번은 내 술잔을 받아줬었다. 그때 나는 신이 나서 동생에게 기다리라며, 조급해하며, 조잡한 안주를 야물야물 만들어 와서 식탁 위로 가져다 놓고 그랬다. 나와 달리 입맛 까다로운 동생이 내가 만들어낸 걸 팍팍 잘 먹어주면, 엄마도 아니면서, 엄마의 마음이 지금도 뭔지 모르면서, 엄마처럼 기분이 좋고 그랬다. "맛있제? 진짜 맛있제? 맞제?" 내가 먼저 맛있게 먹는 척했다. 그렇게 하면 진짜 맛있게 느껴졌다. 종종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그랬던 것이다.


나이를 더 먹고 이제 그렇게 울지는 않는다. 누군가를 위해 애쓸 일도 그다지 없다. 그러나 여전히 내 생에 火의 운명이 작동하고 있는 것인지, 뜨거운 국물만은 계속해서 좋아한다. 푸짐한 국수 한 그릇을 바닥이 보일 때까지 다 먹었다는 것도 모른 채 숟가락으로 얄팍한 쇠그릇을 흘치고 있을 때였다. 옆구리로 어떤 목소리가 기습해 왔다. "국수 더 줄까?"


국숫집 아주머니의 얼굴이었다. 화들짝 놀라며 아니에요, 괜찮아요, 라고 말하는데 아주머니가 잘 먹어서 모자라면 더 주려고, 하며 두어 번 더 권했다. 이미 배가 불렀는데 바닥까지 긁어먹고 있던 내 모습이 민망해서 나도 모르게 소리까지 내어 웃었다. 계산을 하고 뒤돌아 시장을 빠져나오는데 뭘 그렇게 헤프게 웃었지, 싶었다. 그러다가 웃음기가 아직 다 빠지지 않았는데 갑자 눈물이 빙글 맺혔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없다. 좋아서? 무엇이 서러워서? 날씨 때문에? 그 옛날 엄마의 뜨거운 밥상 때문에? 아니면 순진한 동생을 위해 프라이팬 앞에 서 있었던 순간 때문에? 속도를 늦추지 않고 걸었다. 배 부른 동작으로 태연하게 걸었다. 내 뒷모습은 오래도록 거짓말에 익숙했고, 내 앞모습을 본 사람은 없었다.


한 인간과 한 인간이 닿는 순간들은 왜  그토록 뜨거운가. 그리고 내 고독은, 언제 이 왁자한 시장통까지 따라왔는가. 뜨거운 순간들은 금세 식어 옛날이 되고 내가 그것들을 기억할 수 있는 것도 그나마 이렇게 잠깐뿐이다. "국수 더 줄까?" 나는 고독이 식기 전에 그것을 다 먹을 수 있을 것인가. 말 한마디의 훈기를 붙잡아 피워 보는 불면의 밤, 글쓰기는 내 고독의 습기인지, 아니면 열기인지, 그저 내가 해야 할 일 중 하나인지. 모르겠다. 꼭 알아야겠는가. 그저 쓰는 것이 나는.

이전 04화 오 나의 반려 귀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