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마음건강 지원 프로그램> 6회 차가 끝나고, 다시 <전국민 마음투자 지원사업>을 통해 새로운 8회 차를 시작했다. 맨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무척 망설였는데, 자발적으로 연장했다는 점이 여전히낯설었다. '나는 왜 이 상담을 계속하고 싶었을까?' 버스 안에서 잠시 생각해 보았다. 막상 해 보니 6회는 인사말이자 도입부의 분량이기도 했고,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이만큼 털어놓는게 살면서 처음이기도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한 어른이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게, 귀가 있는 어른에게 내 이야기를 말할 수 있다는 게, 나는 좋았던 것 같다. 내 주변에는, 이 세상에는, 어른이란 희귀한 존재였으니까.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인생 30대 후반의 지점에서, 한 번쯤 내 삶을 제대로 청소하고 싶었다. 나 혼자서 내 삶을 돌아보는 건 누가 시키지 않아도끊임없이 해 왔다. 언제나 반성하면서. 나에게 벌 주듯이. 그러므로 혼자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을 통해. 처음으로 도움의 손길을 붙잡고.
3주 만에 다시 만난 선생님이 드디어, 조금 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처음과 다름없이 환하게 웃으면서 "다시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하고 말씀해 주실 때, 괜히 찡했다.
반갑다는 말은 참 예쁘네. 나도 '반가워요' 하고 웃으면서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3주 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너무너무 바빴어요.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저 진짜 알코올 중독인 것 같아요. 전날 너무 많이 마셔서 마실 수 없었던 날 빼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마셨어요."
그냥 마음 가는 대로 대답했다. 입사 후 몇 달간은 역류성 식도염과 위염과 피부염을 앓느라 밥이건술이건 거의 못 먹었지만, 최근에는 서서히 호전되면서 살도 찌고, 회복되는 대로 술을 마셔대고 있었다. 물론 평일 출근에 주말 알바까지 하는 처지로서 폭주까지는 못 했다마는, 어쨌건 두세 잔 아삼삼홀짝이다가 라면을 먹고 지친 채 잠드는 게 나의 일상이었다.
"술을 마시면 뭐가 좋아요?"
"그냥 저는…… 술 마시고 혼자 끄적거리는 게 좋아서요. 버릇이 된 것도 있어요."
"거기서는 솔직하게 내 얘기를 하는 거네요?"
"네, 맞아요."
"술을 마시면 머리가 더 맑아지거나 가벼워져요?"
"그런 것 같아요."
"그런 거면 저 같아도 유혹을 참기 힘들 것 같은데요?"
선생님은 술 마시는 행위를 비난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지지해 주기까지 하셨다. 술 마시는 내가 싫어서술 마시기를 반복하는악순환. 그것이야말로해롭다는 것이었다. 술 마시는 자신을스스로 부정적으로 여기고 있는 이상, 자신을비난하기보다는차라리당분간은자유롭게풀어주라고 하셨다. 술보다 나쁜 것의 진짜 정체는 바로 부정적인 감정이었던 것이다.
"선생님, 저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봐요. 제 친구들은 다 뭐라고 하거든요."
"막말로 술 먹고 내가 세상에 피해를 줬어요 뭘 했어요? 그게 뭐 어때서요? 그럴 수도 있지!"
생각해 보면, 비난하는 친구들 앞에서는 점점 말을 사리게 되었던 것 같다. 안 마셨다고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만, 마시고 후회하는 것을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선생님의 반응은, 나에게는 정말로 신선했다. 그러자 나는 농담까지 섞어가며 더 밝게 대답할 수 있었다.
"저 사실 더 건강해지고 싶어요. 더 마시고 싶어서요!"
물론 술고래가 되라는 뜻은 아니었다. 상담의 끝부분에 말씀하신 거지만, 그렇게 스스로를 용인해 주고 이해해 주며 언젠가 마음에 안정감이 생기면, 그때는 내가 마시고 싶은 날에 마시고, 안 마시고 싶은 날에 안 마실 수 있을 거라고, '선택'할 수 있게 될 거라고 하셨다. 나는 거의 충격적인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매일 저녁 홀로 술을 마실 때마다 나 자신을 그토록 가열하게 비난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술 먹고 쓴 글이 상당히 되겠네요?"
"네." (브런치에는 차마 못 올린 술 냄새나는 글이 많다……)
"그 글을 다시 읽어본 적도 있어요?"
"네, 아주 가끔요."
"다시 읽어 보면 어때요?"
"……."
전혀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나는 갑자기 휘청거렸다. 당황스러웠다.
"글이…… 글이 울고 있어요."
누구에게도 말 못 하는 마음은, 늘 글로 썼다. 글로만 말할 수 있었다. 이 진력 나는 세상에서 누가 내 얘기를 들어준단 말인가. 내가 쓴 글 또한남세스러워서 쓰고 나면 잘 들춰보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다시 읽을 때면 꼭 울고 말았다. 술이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매일 저녁 울고 싶어서,참아 왔던 마음을 터뜨리고 싶어서, 말로는 못하는 얘기들이 가슴속에 남아 있어서,술을 마셨던 건지도 모른다.마시자마자 두 눈에서 잉크처럼 새어나가는 감미로운 액체를.
"그럼 더 어릴 때는요? 어릴 때는 힘들 때 어떻게 했어요?"
이삼십 대 내내 벼랑 끝에 지푸라기집 짓고 살았다지만, 십 대 역시 순탄치는 않았다. 망각이 그 시절을 무감하게 만들었지만, 사실은 그때가 더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더 어렸으니까. 더 몰랐으니까. 기습적으로 떠올려 보았으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마치 일괄 삭제된 것처럼. 내가 내 기억을 스스로 봉인한 걸까? 생각나는 건 파편적인 이미지들뿐. 이유 없이 미움받았고, 성인 남자는 알 수 없는 포인트에서 발작하듯 화를 냈고, 물건을 던졌고, 여동생과 차별했고, 지금도 그의 직업이 뭐였는지 모르겠고, 그는 이상한 종교에 빠졌던 것도 같고, 그런 와중에도 가난만큼은 봉인된 바 없이 생생히 비참했다. 그때 나는 어떻게 풀었지?
애써 떠올리자 어렴풋한 이미지만. 거긴 산을 깎아 만든 마을이었고, 나는 산과 집 사이에 난, 가로등도 없는 좁고 어두운 뒤안길을 혼자 걸었다. 그저 걸었다. 왔다 갔다. 무한히. 검은교복을 입고. 검은 영혼을 이끌고 밤새도록 말없이 저벅저벅 걸어 다녔던 것만이 옅은 이미지로 남아 있다. 술도 마실 줄 모르던 십 대의 나, 그때는 정말 어떻게 풀었던 걸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의 나는 더 작았고, 더 연약했고, 어른에게 저항할 수 있다는 것도 제대로 모를 만큼 순수했는데. 누군가 그 애 앞에 슬쩍 나타나서 비행청소년이 되는 법을 귀띔해 준다고 해도, 아마 그 애는 못할 거야. 그 애는 좀 바보 같았으니까.
그리하여 상담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어린 시절 이야기가 들올하게 튀어나왔다. 많은 부분이 무감각했고, 무감정했다. 마치 '어떤 시간대의 나'가 그 봉인을 풀지 않길 바라는 것처럼. 아빠. 아빠라는 존재는 찌꺼기만 남기고 삭제되었다. 그 옛날 아빠라는 존재와 법적으로 분리될 때, 나는 안전함을 느꼈다. 솔직히 말하면 아빠 얘기를 꺼려하는 일차적인 이유는 내가 '아빠'라는 일반 명사 자체를 견디기 힘들 만큼 혐오하기 때문이다. 엄마. 엄마는 내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엄마는 내가 힘든 것을 하나 이야기하면, 본인이 힘든 것을 백 개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단 한 마디도 받아준 적 없었다. 하나만 들어준다면, 백 개고 천 개고 내가 들어줄 수 있었을 텐데. 엄마라는 존재와는 대화라는 걸 할 수가 없었다. 가난은 우리 모두를 이기적으로 만들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조용히 출가하였다. 이십 대와 삼십 대에 혼자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위기를 숱하게 겪었지만, 엄마에게 얘기한 적은 당연히 없었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들어서 이 모든 걸 순간적으로 망각하고 내 얘기를 꺼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언제나, 바로 즉시, 세상의 냉정함을 예비 체험하게 했다. 나는 오랜 세월 스스로를 감금하는 법을 장인처럼 단련해 왔다.
내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치듯 떠나가서 홀로 남미의 위험한 밤거리를 돌아다녔을 때도, 엄마는 몰랐다. 내가 전세 사기를 당하고 매일 밤 미친 여자처럼지껄이며 운동장을 걸어 다녔을 때도, 엄마는 몰랐다. 몰랐다몰랐다. 그러니 엄마는 그저 생물학적 엄마일 뿐이었다. 성인 남자가 그러했듯.
그래도 엄마는 힘들 때면 큰딸을 찾았다. 직업을 유지하며 결혼을 하고 집도 있고 차도 있는 여동생이 아니라, 집에서 하루종일 놀면서 같이 사는 백수 남동생이 아니라, 월화수목금토일 입 잠그고 빚 갚느라 바쁜 나에게, 본인의 일에 필요한 것들을 부탁했다. 나는 그것들을 모두 해 드렸다. 일하면서 몰래, 알바하면서 몰래, 엄마의 일을 도왔다.
"'나'는 그래도 그걸 해 주네요?"
"네…… 엄마 힘드시잖아요."
그 순간 당황스럽게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엄마는, 혼자서 애 셋 데리고, 여기저기 일자리 전전하다가, 그러다가 늙어버리셨잖아요, 인생이 다 가 버렸잖아요, 너무 불쌍하잖아요……."
내 마음을 알아줬다면 더 좋았겠지. 내 얘기를 한 번이라도 들어줬다면. 하지만 나는 엄마라는 한 여인이 덜 힘들었으면 했다. 나의 도움으로 인해 조금 덜 슬펐으면 해서.
엄마가 듣는 귀를 잃어버린 것은 물질적으로 가난해서 그랬을 수도 있었고, 마음이 가난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원래 섬세하지 않은 사람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는 사이에 한 영혼이 불안하게 성장했고, 세상으로 나아갔고, 홀로 어둠길을 무한히 반복 산책하던 정형 행동을 다 잊을 만큼 아슬하게 살아갔다. 언젠가부터 그 영혼은 불안이 자신의 원동력이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걷고 걸었을 것이다. 한강변을, 낯선 도시를, 지구 반대편을.기쁠 때도 슬플 때도, 불안할때도, 혼자서.
언젠가부터 아빠와는 헤어져 살았다. 그런데 그 시기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어릴 때도 지금만큼이나 이사를 자주 다녔고, 단지 어느 집부터는 아빠 없이 엄마와 동생들과 살았던 것 같다. 전설의 고향에 나올 것 같은 푸세식 화장실이 집 밖에 있었고, 너무도 추웠고, 좁다란 마루에 요강이 있었고, 겨울에는 엄마가 부엌에서 머리 감을 물을 끓였고, 작은 다용도실을 열면 육중한 귀뚜라미들이 내 키보다 더 높이 뛰어오르며 나를 위협하던옹색하고 흐릿한 집. 달동네 작은 집.
선생님도 나와 비슷한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었다고 하셨다. 밤마다 문풍지가 뚫리는 추운 초가집에 홀로 앉아 있었고, 뇌리에서는 나이 육십이 되어도 고독한 이미지들이 멈추어 있다고했다. 마음의 여유란 억지로는 결코 생기지 않았다고. 어른이 되고 가정을 이루고 어느 정도 물질적 안정을 이룬 후에, 그때는 억지로 떠올리지 않아도 마음의 여유가 알아서 번지수를 찾아왔다고.
"제가 지금까지 몇 차례 세라 씨를 봐 왔지만, 사실 그 나이대의 저보다 훨씬 대단한 것 같아요. 기특하고,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야무지고요. 생활력도 강하고요. 그때의 저는 세라 씨만큼 자신의 감정을 되돌아볼 줄도 몰랐어요. 세라 씨는 가지고 있는 자원이 무척 많아요. 자신의 부정적인 면들만 '왕방울만 한 눈'을 하고 보고 있는 것 같아요. 없는 자원을 만드는 게 아니라, 원래 있던 자원을 발견해 보는 거예요. 남은 시간이 그랬으면 좋겠네요. 아마 제 나이대가 되면 저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될 것 같은데요?"
선생님은 내가 언젠가 안정감 있는 사람을 만나서 더 나은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만약 원가족과 내가 선택한 가족 중에 하나가 최악이라면, 그래도 원가족이 최악인 게 더 낫지 않냐면서. 인생은 마라톤이고, 살다 보면 원가족은 평생 중의 일부분이 된다고. 나 역시 원가족에 예속된 세월과 출가하여 방랑하던 세월이 이제는 거의 같아졌다. 선생님의 말씀에 동의했다. 그러나 누군가를 만나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다. 너무 늦은 나이라고도 생각한다.누군가와 '같이 산다'는 건 뭔가 지나친 일인 것 같다. 속으로는 그랬다. 그렇게 이야기가 마무리되어 갔다.
(선생님도 원가족과는 거리를 두고 지낸다고 하셨다.)
"맞아요. 저도 가족과의 거리는 지금 정도가 딱 좋아요. 일이 년에 한 번씩 가는데, 그 정도가 적당한 것 같아요. 그래도 가면 엄마가 밥은 해 주시니까……"
그때, 거의 마무리됐다고 여기던 시점에, 다시 한번 목소리가 큰 폭으로 떨려 왔다.
"밥…… 세상에서 저한테 밥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다른 엄마들만큼은 아니더라도…… 누군가 저에게 밥을 해준다는 게……그게 당연한 게 아니잖아요……"
감정의 둑이 또 어처구니없이 터져버렸다. 나는 흐느끼느라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했다. '밥'이라는 단어를, 분향하듯 몇 번 되풀이하고 나서야, 겨우 다음 문장을 이어갈 수 있었다. 삶이라는 한 글자보다 밥, 밥이라는 한 글자가, 주린 삶의 배를 채우곤 했다. 삶의 좌절이 곧 밥의 좌절인 건 아니었다. 하지만 밥의 좌절은 곧 삶의 좌절이었다. 더 이상 이 삶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을 때, 나는 늘 피골이 상접했었다. 내 삶의 아픔을 단 한 마디도 들어주지 않는 냉정한 당신, 그런 당신이라도 몇 년에 한 번씩 내가 고향에 내려갈 때면 밥상을 차려주시곤 했지. 나는 한 번도 외식을 원한 적이 없었다. 나는 언제나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뜻한 음식을 원했다. 갓 지은 밥, 된장찌개, 뜨거운 계란찜, 같은 것들. 불 위에서 방금 내려온 것들. 끓고 있는 것들. 살아있는 것들. 강력한 화기에 내장이 다친대도 좋았다. 식도가 타버려도 괜찮았다. 그만큼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원하지 않았다. 나는 밥을 원했다. 나는 당신이 차려준 밥상 앞에서 늘 울었다. 기차 위에 올라서도 울었다. 밥 때문에.정말로 밥 때문에. 그건 냉정한 삶이 내게 차려준, 믿을 수 없을 만큼 따뜻한 밥상이었다.
오늘도 여느 밤처럼 컵라면과 술 한 잔 하면서, 두서없이 일기를 쓴다. 내일이 회식인데, 거기선 술 못 마시는 척해야지. 뭐 어때요. 내게 허락된 알코올은 유한하고요, 혼자만의 시간이 우선인 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