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삼역 카페
일요일, 출근을 했다.
늘어지게 자겠다고 마음먹고 자는데 아침에 걸려온 상사의 업무 전화에 회사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명조씨~ 부탁해!
급한 일도 아니건만, 상사는 얄밉게도 기어이 나를 회사로 불러드렸다.
사무실로 들어와 모니터를 켜며 앉았다.
나와 같이 출근한 이들의 신경질적인 타자 소리에 참을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메일을 확인하다 더 이상 사무실에 앉아 있을 수 없겠다 싶어 급하게 노트북만 챙겨 회사 건물 밖으로 뛰쳐나왔다. 아직 5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날씨는 또 왜 이리 더운지 숨이 막혔다.
주변 카페나 가자 싶어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멍 때리며 걷다 먹자골목을 지나 주택가까지 들어서게 되어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색다르다 싶은 주택을 발견했다. 카페였다! 저곳이다 싶어 걸음을 서둘렀다. 돌과 올리브 그린색의 천막 그리고 크고 작은 화분들이 입구에 놓여져있었다.
어서오세요. 친절한 직원의 인사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카페 분위기에 일그러졌을 내 표정이 조금은 펴졌으리라. 아이스 아메리카노랑 오렌지쿠헨 하나 주세요.
주문을 하고 왼쪽을 슬쩍 보던 순간 시선이 멈췄다.
‘싱그럽다!’ 투박한 철제 선반과 얼음과 함께 있는 맥주, 잎 사이사이로 빛이 든 이름 모를 식물을 보는 순간 치밀어 오르던 감정이 모두 정리가 되었다.
역시나 친절하게도 음료는 가져다주신다는 직원분 말씀에 카페 1층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로스터기와 8명은 넉넉히 앉을 수 있는 넓은 소파, 작은 화분들이 어우러졌다. 2층까지 넓게 뚫려있는 천장 덕분에 내 마음도 조금 뚫리는 듯했다.
1층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2층에 자리를 잡으려 계단에 발을 딛는 순간, 눈앞에 꽃 길이 펼쳐졌다.
한 칸씩 계단을 오를 때마다 1층과는 또 다른 2층이 한 발자국씩만큼 보이기 시작했다.마치 비밀의 화원 같았다. 테라스 쪽에 자리를 잡고 잠시, 잊고 있던 일을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커피와 데워진 오렌지쿠헨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고, 아메리카노의 산미와 향긋한 오렌지쿠헨의 조합은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려주었다. 입안이 행복했고, 그 순간 나도 행복했다.
그렇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오늘 귀찮음과 피곤함을 이겨내며 출근한 것도, 사무실이 참을 수 없어 노트북을 챙겨 밖으로 도망친 것도, 이 카페에 온 것도, 상사의 요구에 따른 것도 나는 틀리지 않았기에 화낼 이유가 없었다.
조정희-Bluebird, Paul McCartney-This Never Happed Before, Sweet & Holy Gift-We Are One, Aversion Extra Edition-Take A Picture 잔잔한 노래가 순서대로 흘러나왔고 집중하는 어느 순간 음악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이 모두 녹았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오늘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쳤다.
네, 말씀하신 자료 수정해서 메일로 보냈습니다. 아니에요.
아, 회사 근처 괜찮은 카페를 찾았어요. 다음에 같이 와요. 네. 내일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에밀리 대사를 읊조렸다.
나는 내 일을 사랑한다.
얄밉지만 나의 상사에게 분명 배울 점이 있고, 그저 나의 진심을 스스로 알아차려주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곳을 나오면서 딱 작년 이맘때쯤 떠났던 스페인 론다가 떠올랐다. 카페 413프로젝트는 론다 같은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