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윤가은, 2015
기대감에 차오른 얼굴은 이쪽, 저쪽 소리가 들리는 쪽을 차례로 바라본다. 이름이 불리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얼굴은 미소를 잃어간다. 상대방이 마지못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누군가는 반드시 미뤄지고 미뤄지다가 선택받는 경험을 한다. 작은 놀이를 시작하는, 익숙한 이 과정을 통해서도 우리들은 선택을 받고, 배제당하는 경험을 한다. 그것을 우리는 지켜보지만, 누군가는 저 상황에 놓이게 되리란 걸 알고 있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애들이니까, 순수한 아이들이니까, 우리도 저렇게 재밌게 놀았으니까. 그렇게 믿는다. 아니, 신경 쓰지 않는다. 영화가 시작하는 점점 갈 곳을 잃어가는 선이(최수인 역)의 눈동자는 그 게으른 믿음에 작은 돌을 던진다.
<우리들>은 가족을 벗어나 첫 번째 관계를 구성하게 되는 장소로서의 초등학교를 그린다. 선이를 따라 마주하는 초등학교의 모습은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또 누군가에게는 기억과 조금 다를지 모를 공간이다. 초등학교는 아이들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지만 그 속에서 맺어지는 관계들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 초등학교는 처음으로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방식을 배우는 공간이지만, 관계를 맺는 것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는 누구도 얘기해주지 못한다. 우리는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아이들처럼 '순수하고', '사이좋게' 관계를 맺길 바랄 뿐이다. 아이들끼리의 관계에서 문제가 수면 위로 마침내 보이게 되었을 때 우리는 말할 뿐이다. "친구끼리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고 왜" 그러냐고.
학교는 각기 다른 환경에서 온 아이들이 서로의 다름을 직접적으로 처음 마주하게 되는 공간이다. 관계 맺음에서 이 '다름'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 그리고 반응하느냐는 아주 중요하다. 아이들에게서 다름에 대한 반응이 부정적인 방식으로, 서로를 밀어내고 인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나타났을 때,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그것'은 옳지 못한 거라고 얘기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왜? 그런 행동을 하느냐"라고 질문하지만 많은 경우 아이들은 잘 대답하지 못한다. '다름'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은 아이들이 발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때 저 아이들이었던 우리들은, 어른이라고 스스로를 부르는 우리들은, '성숙한' 관계 맺음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할 뿐이다.
학교라는 상대적으로 좁은 생태계에서 벗어나 사회에 나올 때, 우리는 더욱 다양하고 많은 '다름'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저 아이들처럼 유치하게 대하지 않는다. 교묘하게, 문제가 생기지 않을 선을 봐가면서, 자신을 되도록 드러내지 않으면서 혐오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성숙하게 배척하고 혐오하는 방법을 익힌다. 혐오의 화살을 맞는 쪽은 아픔을 견디는 법을, 애써 무시하는 법을, 상처 입은 모습을 상대방에게 드러내지 않는 법을 익힌다. 우리는 매일 누군가를 배척하고, 밀어내지만 아이들은 순수하게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본다. 아이들에게서 관계의 그림자를 볼 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비교하고, 무시하고, 배제시키는 것이 만연하는 사회 속, 학교의 문제적 아이들에게 "왜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니?"라는 질문은 어른들의 게으른 질문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형식적인 악수와 서로에게 건네게 만드는 '미안해'라는 말 또한 어른들을 위한, 어른들이 제작한 연극일 뿐이다.
<우리들>은 아이들이 서로의 다름을 이유로 관계에서 상대방을 고립시키는 모습을 차분하게 그린다. 비슷한 소재를 다루는 영화가 흔히 메시지 전달을 위해 자극적인 사건에 인물들을 던져놓고 희생시키는 방식을 따르지는 않는다. 배제의 과정을 지긋이 바라보게 함으로써 단발성의 분노로 문제와 인물들을 대하게 하지 않고 관계 맺음에 작동원리에 대해 돌아보게 만든다.
관계의 세계에서 희생하고 용기를 내야 하는 쪽은 불공평하게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상대방으로부터 배제되어버린 쪽이다. 선이는 언젠가부터 틀어져 버린 지아(설혜인 역)와의 관계에 계속해서, 안쓰럽게 매달린다. 지속적으로 상처를 입으면서도 관계에 노력하는 선이의 모습을 지켜보면 이제 그만하면 안 될까?라고 말하고 싶어 진다. 선이를 밀어내려고 마음먹은 아이들에게, 상대방을 이해하기보다 밀어내는 것이 편하다고 느끼는 아이들에게 그만 노력하라고 너의 마음을 그만 쓰라고. 같은 종류의 시선으로 선이는 자신의 동생 윤이를 바라본다. 누나 입장에서는 화가 나게도, 윤이는 친구와 놀다가 계속 상처를 입는데도 끈질기게 친구와 어울린다. 왜 그렇게 바보처럼 그 친구와 어울리냐고, 왜 너는 상처를 입는데 계속해서 맞서 싸우지 않느냐고 선이가 물었을 때, 윤이는 대답한다. "그럼 언제 놀아? 나는 놀고 싶은데?"
윤이 말대로 관계를 맺는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이유는 결국 함께 어울리고 놀기 위해서 일지 모른다. 선이도 율이와 다르지 않다. 계속해서 다가갈수록 관계에서 갑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선이를 더욱 작아지게 만들지만, 지아와 다시 어울리고, 놀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선이는 계속 용기를 낸다. 영화는 그렇게 다시 한번 용기를 낸 선이의 눈동자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