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일본의 약
이 알약은 왜 이렇게 큰거야? 도대체 이걸 어떻게 삼키라는 거지?
이 약은 왜 한번에 4알씩이나 먹어야 하는거야? 귀찮게 하지말고 그냥 한알로 만들어 주면 안되나?
라는 물음을 가져 본적 있나요? 약국에서 환자들을 만나면 가장 자주 듣게 되는 불만 중 한가지 입니다. 도대체 왜 어떤 제약회사는 알을 그렇게 크게 만들고, 어떤 제약회사는 그렇게 여러 알을 먹어야 되게 만드는 걸까요?
저는 제약회사에서 제품 개발업무를 담당했습니다. 전 세계의 다양한 의약품들을 찾고 발견하고 공부하는 것이 일상이죠. 주로 8대 의약품 국가 (미국, 캐나다,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스위스)의 의약품집을 뒤지면서 한국에 소개되지 않는 어떤 의약품이 있는가를 찾아보는 것이 중요한 일과 중 하나입니다.
이렇게 나라마다 다양한 의약품들을 보다 보면 국가별로 약이 굉장히 다르게 개발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미국과 일본의 의약품을 비교하며 나라별 약의 특징을 한번 살펴보죠.
사람들이 가장 친근할 만한 두 가지의 약을 살펴봅시다.
왼쪽의 약은 정로환입니다. 러일전쟁 당시 설사병으로 고생하던 일본군들을 위해 덴노가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일화가 있는 약이죠. 그래서 이름도 러시아를 정복할 환이라고 征露丸이었다고 하죠. (2차 대전 이후 표기를 正露丸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일본의 의약품 중 하나입니다. 알이 굉장히 작죠? 그래서 한번 복용할 때 한번 4알이나 먹어야 합니다.
오른쪽의 약은 미국산 영양제의 대명사 센트룸입니다. 비타민과 고함량의 미네랄을 포함한 미국 멀티비타민의 대표주자죠. 센트룸의 영양성분표를 보면 함량이 어마어마합니다. 미네랄이 굉장히 많이 들어있어서 이건 정제 사이즈를 줄이려고 해 봐야 더 줄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함량을 반으로 낮추고, 한번에 2정씩 먹으면 되죠. 하지만 이 무식한 약은 그냥 정제 사이즈를 키우고 한번에 한알만 먹으면 되는쪽으로 약을 만들어 냅니다.
정리하자면 일본약의 전략은 '한 번에 먹는 알의 수가 많아지더라도 삼키기 좋도록 정제를 작게 만들어라', 미국약의 전략은 '알이 커지더라도 한 번에 한 알만 먹으면 되도록 만들어라' 라는 것이죠.
그럼 감기약을 한번 살펴볼까요?
일본의 감기약과 미국의 감기약입니다. 들어있는 주성분의 함량을 같이 기록했습니다. 왼쪽 일본의 감기약 [파프론 에스 콜드정]은 총 397.5mg의 주성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른쪽 미국의 감기약 [타이레놀 콜드 맥스정]은 총 340mg의 주성분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두 약의 크기도 비슷해야겠죠.(1) 하지만 [파프론 에스 콜드정]은 3정의 함량이고, [타이레놀 콜드 맥스정]은 1정의 함량입니다. 미국에서는 한 알에 다 때려박고 알이 좀 커지더라도 한번에 먹을 수 있게 만들고, 일본은 알이 여러 개로 나누어 지더라도 정제가 작아서 삼키기 쉽도록 만드는 것이죠. (2)
기본적으로 서양인보다 동양인의 목구멍이 작아서일까요? 아니면 일본의 의약산업 초기 아직 알약을 먹는것이 익숙치 않았던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정제의 크기를 줄인 회사들이 매출이 높아지면서 모두가 이런 흐름을 따르기 시작했기 때문일까요?
물론 일본과 미국의 모든 약들이 이러한 흐름을 따르는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경향성은 분명 존재합니다. 정제의 사이즈만 보고도 '이 이거 일본약인가 본데?' 하고 찾아보면 맞는 경우가 다수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먹고 있는 약은 일본에서 처음 개발된 약일까요? 아니면 미국에서 개발된 약일까요? 한번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을겁니다.
(1) 물론 약을 만드는데에 주성분만 들어가는것이 아니고, 질량이 부피와 정비례하는것은 아니지만 주성분의 총 질량과 정제의 크기는 일반적으로 비례합니다.
(2) 실제로 파프론 콜드 에스정은 1회 복용량이 3정이고, 타이레놀 콜드 맥스정은 1회 복용량이 2정입니다. 타이레놀 콜드 에스정의 처방자체가 고함량으로 설정이 된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