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보선, 2011,『눈앞에 없는 사람』
지금 나의 그림자는 그대들과 동명이인이다
우리는 모두 한때 돌로 태어나
불로 달궈진 아기들이었다
우리의 발걸음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점점 단순한 양식으로 진화해왔다지만
상관없다 무시하자
자유는 가장 난해한 스텝의 이름이기에
가난한 선조들을 배반하고 우리는
자기만의 무질서와 신념으로
자기만의 가난을 구축하기로 한다
지금은 새로운 가난으로 미만한 밤
달빛이 모든 사물의 가장자리에 묻은 독(毒)을 핥으며
수십 수백 갈래로 찢어지고 있다
우리는 아주 커다란 행성의 아주 작은 노예들
실패할 수 없는 것들을 실패하고
반복될 수 없는 것들을 반복한다
그리하여 지상의 마지막 겨울이 오면
우리는 충혈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빛나는 유리구슬 하나를 정성스레 까 먹여줄 것이다
우리는 망상이 빚은 말들 속에서 만나
세계의 심연을 향해 절규한다
지금은 시초라 불릴
충분한 자격을 갖춘 순간
한 방울의 잉크가 흐르는 빗물에 섞이며
불가능한 기록이 막 시작되려 한다
(주)문학과지성사
문학과지성 시인선 397
©심보선, 2011,『눈앞에 없는 사람』
54-55쪽
나는 그래
한 사람의 시작과 끝은 정해져 있다.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는지 당사자만 모를 뿐 신은 안다는.
운명이라 하며 살다가, 가끔 미칠 듯하면 비극이라고 하고
또 그러다 삐죽거리는 입술 끝이 살짝 말아 올라가면 희극이라.
한 사람이 그렇고, 다른 이도 그러하니
우린 모두 같은 운명을 가진 것들인가.
같은 방식으로 태어나 자유롭게 방식을 재창조하며 살다
이따금 서로를 확인하며 눈물콧물 흘려주는 것들.
한 사람의 끝에 닿은, 한 사람의 시작.
'지금 나의 그림자는 그대들과 동명이인이다'
우린 '자기만의' 것들로 수없이 변주하지만
결국 '가난한 선조'들과 마음 깊이 교류한다
그때의 그들은 한 번도 꿈꾸지 않던 환상까지 덧붙여서-
쳇바퀴의 지난함이 어느새 버터 팝콘을 튀기듯이
12월에만 방긋거리던 눈사람이 8월에 오열하며 제 눈을 찾듯이
끝에 닿은 시작과 시작에 맞물린 끝이
오늘도 '불가능한 기록'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