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상대적 우월감이 삶의 동력이었던 때를 살았다
"인간은 방랑자로 이 세상에 첫발을 내디뎠다.
인간은 자아를 실현하려고 방랑 생활을 한 게 아니다.
더할 나위 없이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피터 자이한은 이 문장으로 자신의 책 <붕괴하는 세계와 인구학>을 시작한다. 제목이 암시하 듯, 이 책은 탈세계화와 인구감소가 가져올 지구촌의 재앙적 미래를 담고 있다. 이 두꺼운 책에 대해서는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별도로 시간을 내어 독후감을 쓰려한다.
처음 이 문장을 읽고 내가 한 혼잣말은 "와, 이 놈 봐라?"였다. 내게는 찰스 디킨즈의 <두 도시 이야기> 첫머리의 몇 문장만큼이나 강렬한 시작이었다. 문장에 국한하여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아를 실현하려고 방랑 생활을 한 것이 아니다'라는 저자의 말은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동인은 무엇일까'에 대한 원초적 질문을 담고 있다. 어제 '중도보수와 그 밖의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한 꼭지 쓰는 동안 계속 맴돌던 생각의 파편이기도 했다.
젊은이들이 자유롭게 쓴 글을 검토할 기회가 있었다. 모두 정직하게 쓴 글이었다. 당장의 생계를 꾸리는 것에 대한 압박, 홍수처럼 쏟아지는 자기 계발에 대한 유혹 등은 모두 절박한 생존과 직결돼 있었다. 종합해 보면 자기 실현은 자기 이익의 다른 말이었다. 87년 이후 민주화 운동 과정은 도덕적 기반 위에서 행해졌다. 상대를 '반민주세력'으로 퉁쳐 호명하기 좋았던 시절이었다. 고백하자면 우린 상대적 우월감이 삶의 동력이었던 때를 살았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풍성해진 물적 토대는 내심 가치를 지향한다는 운동 세력을 내 집 마련과 지극히 현실적인 자녀 교육 앞에서 '자기 이익'에 눈 뜨게 만들었다. 이상과 현실이 혼재하고, 가치와 이해가 충돌하는 사이 민주화의 터널을 통과한 사람들이 기성세대가 됐다. 외적으로는 진보적 가치를, 내적으로는 보수적 안정을 꾀하는 일상은 이른바 '교양 있는 좌파'들의 암묵적 코드였다.
성실하게 자기 이익을 추구하면 성장의 과실을 나누어 주겠다는 것은 보수적 기획이다. 개인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 법이고 질서였다. 최초의 법은 타인의 사유 재산을 넘보는 자에게 행해진 것이지 않은가.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법치냐 저항이냐, 성장이냐 분배냐, 증세냐 감세냐, 자유 경쟁이냐 국가 개입이냐를 논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정도로 혼재한다.
이재명의 중도보수 선언은 그래서 감각적(꼭 좋은 의미는 아니다)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정치적 전략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어떤 동기로 그가 이런 말을 했든 상관 없이 이 간결한 선언 속에는 현재를 사는 한국 사회의 발전 담론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 전문가들은 진영 논리를 넘어 이 혼란의 시기에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가 취해야 할 다양한 방도를 고민했으면 좋겠다.
다만, 피터 자이한이라면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 중에서 '인구구조의 붕괴'를 첫손가락에 꼽을 것이고, 불행하게도 피할 방법은 없다고 말할 것이다. 인구구조의 붕괴와 탈세계화는 자국의 영토 안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한 지를 물을 텐데 인적 자원과 수출로 경쟁력을 유지해 왔던 한국은 중국과 더불어 가장 먼저 쇠락하는 나라로 진단할 가능성이 크다.
젊은이들이 당장 생존의 문제를 절박하게 느끼고, 자기 계발을 곧 생존의 기술로 치환하는 일을 어색하지 않게 여기며, 이익을 좇는 결정을 한다고 해서 나무랄 일은 아니다. 선배들이 자기 이익 실현 욕구를 세련된 교양으로 포장했다면 젊은이들은 그냥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깝지 않을까.
나는 한국 교육을 말할 때 야만적 경쟁이 문제이고, 이것의 원인은 자본주의라고 쉽게 말하는 것만큼이나, 기승전 '시민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역시 게으른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선거권을 가진 사람들이 언제 자기 이익에 반하여 투표권을 행사한 적이 있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시민적 소양을 갖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간절하지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래서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이익을 주는데?'로 환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민교육의 결과로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무엇을 줄 수 있는지 답해야 한다.
결국 남는 것은 나와 타자의 이익을 합법적으로 조절하기 위한 규범과 약속, 그리고 합리적 배분 절차이지 않을까. 나는 종종 시민사회가 익숙하게 형성하기도 전에 익은 것과 날 것이 부딪치는 전장에 선 느낌이 든다. 진영 간, 세대 간, 성별 간의 문제들이 풀리기는커녕, 얽히는 기분이다.
그저 진영 논리를 합리화하는 지루한 담론보다 더 넓고 깊은 시야로 서로 다른 의견을 조정하고, 시민이 부여한 권위의 바탕 위에서 화해와 치유를 말하는 사람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이른, 나 혼자만의 욕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