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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자동차를 멈추지 않고 수리하는 일

한국 교육은 정말 파시스트를 길러내고 있는가

by 교실밖 Mar 15. 2025

지난번에 이 분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글을 썼었는데, 최근 유명 유튜브 채널에 출연하여 발언하는 내용을 보니 사람의 생각은 어지간해서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겠다. 그의 발언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 한국 교육 문제의 핵심은 '야만적 경쟁교육'이다.  

- 야만적 경쟁교육이 약육강식의 가치관을 주입한다.

- 12년 동안의 야만적 경쟁교육이 파시스트를 길러낸다.

- 한편 독일의 경우 경쟁교육을 청산하여 민주시민을 길러냈다.

- 미디어 리터러시 등 선동가를 구분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늘었다면 서울법대 출신의 지배 엘리트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말인데, 새로운 것은 아니고 경쟁에서 이긴 자가 자원을 독식한다는 적자생존 법칙에 대한 사회적 버전이라 할만하다.  

 

학자로서 하는 발언은 합리적 근거에 기반해야 하고, 특히 확신이나 단정하는 일은 신중해야 한다. 어떤 강한 확신도 학문의 세계에서는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가 반복하여 주장하는 한국의 교육 시스템이 성숙한 민주주의자를 양성하기보다는 위험한 파시스트를 양성하고 있다는 주장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나는 이 분의 논리 전개가 주의 집중의 요소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글에서 (그가 그토록 비판했던) 자본주의와 미디어 전파 방식은 오히려 그의 주장을 돋보이게 만드는 장치로 부역한다. 그는 복잡한 사회 현상을 (미디어가 활용하기 쉽게) 단순하게 포착한다. 이는 대중들에게 문제를 단순화시켜 직관적 이해를 돕는데 탁월한 강점이 있다. 문제는 그다음인데, 한 두 가지 사례를 들어 분석, 판단을 거친 내용을 성급하게 전체 문제로 일반화한다는 점이다. 흔히 말하는 일반화의 오류다.


나는 한국 교육이 파시스트를 양산한다는 이 분의 주장에 대해 명확한 실증적 증거를 찾기 어렵다. 이를 경쟁교육 원죄론으로 말할 수야 있겠지만, 충분하지 않다. 설명 가능한 부분보다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더 많을 때 일반화의 오류는 생각보다 크다. 물론 교육 시스템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교육 시스템은 변화해 왔고, 앞으로도 변화를 거듭할 것이다. 그리고 더디지만 민주주의를 심화하는 쪽으로 진화해 왔다는 점도 부인하기 힘들다.


이 분의 입장에서 보면 야만적 경쟁교육은 너무 견고해서 앞으로도 개선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파시스트는 계속해서 양산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분이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선동 구분 교육' 따위로는 걷어낼 수 없는 깊고 넓은 뿌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 진단 보다 대안이 약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분 발언의 비중은 '희망 없는 한국사회'에 있기 때문에 독일과는 달리 어떤 개혁으로도 치유하기 힘들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교육이 경쟁적 기반 위에 있다는 진단은 상당 부분 맞다. 사회적 자원의 한정돼 있을 때 필연적으로 경쟁이 동반된다. 따라서 당장의 교육을 어떻게 개혁하여 경쟁을 극복하고 '평등하며 선의에 가득 찬' 교육 시스템을 구축하려면, 당연히 사회 개혁과 병행 추진돼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사회의 작동 방식이 변하지 않을 때 교육만 변화하라고 주문하는 것은 교육을 더욱 삶에서 멀어지게 할 뿐이다.


이 분이 즐겨 예를 드는 '줄 세우기 경쟁교육'은 적어도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는 거의 없어졌다. 고등학교에서도 일부 과목은 절대평가화 되고 있고, 등급은 완화되고 있다. 그가 드는 많은 예는 본인의 학창 시절에 머물러 있다. 과거의 예를 현재로 끌어와 '교육이 문제야'라고 하는 그의 진단 방식은 학문적 자세는 아니다. 가령 그가 말하는 것이 영유(영어 유치원), 초등 의대반, 특목고 경쟁이라면 번짓수를 잘못 잡은 것이다. 이는 사교육에서 번식하는 것이지 공교육이 조장하는 측면이 아니다.


그래서 이 분의 진단에 일견 동의하는 측면이 없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문제들로 인해 지난 글에서 권고했던 대로 교육분야의 다른 학자들, 현직 교사들, 학부모들과 많은 토론을 통해 생각을 다듬기를 기대한다.


- 복잡한 교육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후

- 과잉 일반화함으로써 진단-처방에서 오류 발생

- 과거의 예로 현재의 문제를 드러내는 것에서 불일치

- 한국교육이 파시스트를 키운다는 주장은 합리적 근거 필요

- 빈약한 대안으로 현실의 희망 없음을 고착화

- 최근 독일의 선거 결과는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보임

- 교원에게 정치적 기본권을 부여하자는 주장에는 동의


나는 1970년대 초 미국에서 일었던 '교육과정 재개념화 운동'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그때 한국에선 유신 후 '학문적 교육과정'을 기본으로 한 3차 교육과정기가 시작되었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정치사회적 요구에 따라 부침을 거듭했다. 그렇긴 해도 가르치는 문제는 분권화, 지역화, 자율화를 지향하면서 조금씩 진화해 온 것은 사실이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복잡한 정치사회적 맥락을 포함하고 있고, 교육개혁의 방향도 일도양단식으로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 차이가 미미할지언정 80년대 이전에 비하여 한국 교육은 많이 바뀌었고, 깨어 있는 교사들도 훨씬 많아지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는 분명히 교육 문제에 대해 '우려스러운 일 측면'을 전체 문제로 과잉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했고  그것에 터하여 '자본주의 극복'이라거나 '선동가 구분'이라는 뜬구름 잡는 처방을 내어 놓았다. 이럴 땐 교육개혁이란 "달리는 자동차를 멈추지 않고 수리하는 과정과 같다"는 우치다 다쓰루의 말도 참고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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