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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바람벽이 있어

자신만의 언어를 빼어나게 이미지화한 백석

by 교실밖 Mar 1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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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쓰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

.

.

- 흰 바람벽이 있어(백석,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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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과 만나는 월요일은 수업 때문에도 작은 설렘이 있지만 수업 후 있을 일에 대한 기대로 인해 마음이 약간 공중에 뜬다. 


교육과정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배울 것인지를 탐구한다. 우리 교육과정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 미국 교육과정 100년사와 해방 후 지금까지 한국 교육과정 변천사를 비교하는 일은 언제나 흥미롭다. 


두 시간 동안 젊은이들과 교육과정의 재개념화니, 과학적 교수기법이니, 행동적 수업목표니, 교육과 정치의 연관, 교육적 감식안, 지식교육과 역랑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교직과목으로 이 과목을 듣는 그들이 어떤 느낌이었을지 알 길은 없다. 마치 백석의 시를 처음 대할 때 '해석되지 않으면서도 강한 끌림을 당하는' 기분이기를 바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르치는 자의 희망 사항이다.


수업이 끝난 후 중도(중앙도서관)로 향했다. 새로 발급받은 신분증으로 호기롭게 게이트를 통과하여 들어간 곳은 2층의 인문학 열람실. 백석의 서가에서 발을 멈추었다. 시집을 비롯해 평론집, 연구물, 대학원생들의 집단 작업물 등이 서가 한 칸을 꽉 채우고 있다. '다시 읽는 백석 시'를 꺼내 들고 봄볕 내리는 창가에 앉았다.


다시 읽는 백석 시, 현대시비평연구회 편저다시 읽는 백석 시, 현대시비평연구회 편저


문학에도, 미술에도, 음악에도 합당한 전문가가 있다. 말하자면 나는 이 분야에 대해 문외한이자 학습 욕구를 가진 사람이다. 무엇을 안다 말하기 어려운 수준임이 분명하고 기껏해야 내 스스로의 감상을 내 언어에 실을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교육적 감식안(educational connoisseurship)'에 대한 이해가 있기 때문에 그 수준에서 연결할 능력은 있다. 그렇게 보면 예술 자체에 대한 실행과 해석 능력은 떨어져도 이를 교육과 접목하는 좁은 경계에선 나름대로 몇 줄 글을 쓸 순 있을 게다.


교육적 감식안은 교육 상황의 복잡성을 파악하면서 세련되게 개념화하는 능력이며 대상의 가치 자체를 인정하는 사적인 일임과 동시에 가르치는 자가 수업 상황에서 학습자들에게 나타나는 미묘한 변화와 행동 패턴의 차이를 알아차릴 수 있는 질적인 시선이다. 전통적  지식을 중시했던 관점과 기술적 합리성(technical rationality)이 만나 과학적 교수기법과 가시적 성과를 요구했던 당시의 교육 풍토에서 아이즈너는 교육과정에 예술적 접근을 시도한 학자였다. 


'교육적 상상력(The educational imagination, Eisner, 1979)'이라니. 모든 사람들이 똑 같이 볼 수 있는 객관의 인식 세계가 있는데 상상력이라니... 지금도 교육에 대하여 투입과 산출, 가시적 성과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가르치는 자의 상상력은 학생들에게 의미 있는 다양한 학습 기회를 제공할 수 있도록 교육목표와 내용을 적합한 형태로 변형하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교육학 공부를 하면서 가르치는 자의 전문성의 차이는 바로 상상력의 차이라고 생각했다. 


백석 시 풍년^^백석 시 풍년^^


유독 백석의 시에는 해설이 많이 따라붙는다. 의미 해설도 있지만 어휘 해설이 많다. 그가 토속의 언어를 캐내 민중의 삶을 노래한 최고의 현대 시인이라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이다. 금방이라도 그 맛이 배어 나올 것 같은 여러 지방 사투리와 고어들, 당시의 조선 땅과 만주 일대를 유랑하며 작품을 발표했던, 기질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삶, 도처에 묻어 있는 고향 부재의 상실감은 시를 잘 모르는 사람도 빠져들게 하는 마력이 있다. 


백석의 시는 '읽는 시'이면서 '보는 시'이다. 백석은 자신만의 언어를 빼어나게 이미지화하였다. 그의 시를 읽으면 덩달아 춥고, 외롭고, 쓴 소주를 한 잔 마셔야 할 것 같은 심상에 빠져든다. 한동안 이 서가를 찾을 것이다. 바로 옆에 김수영 칸이 있다는 것도 좋다. 오랜만에 압도적인 책의 무게를 느끼는 장소를 찾아 종이 냄새를 맡으며 창밖을 보니 그저 편안하다. 


몇 푼 되지 않는 강의료를 생각하면 대학 출강이란 한가한 지식인 놀음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나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만족한다. 도서관을 마음대로 드나드는 것, 온라인에서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도 학술 논문을 제한 없이 볼 수 있다는 것, 그 빈도에 따라 본전 생각나지 않는 인생 후반부 강의 생활을 즐길 수 있으니 복 받은 사람이다.

압도적인 책의 무게감으로 편안한 마음^^압도적인 책의 무게감으로 편안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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