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세대의 시민들이 경험의 연속적 재구성을 통해 한 단계 성숙한 시간
긴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다. 평소와 다름없이 오전엔 운동을 했고, 책을 읽다가 오후 들어 모니터 앞에 앉았다. 어제 헌재가 윤석열을 파면한 것을 두고 여기저기서 논평이 한창이다. 일개 시민에게도 긴장과 불안의 연속이었고, 일상이 여지없이 망가졌으며 존엄을 훼손당한 4개월이었다. 문형배 재판관이 주문을 낭독한 순간에 시민들은 민주주의가 살아있음을 확인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결정문 요지는 다시 읽어봐도 지극히 상식적 문장이었다.
큰 감정의 동요 없이 묵묵히 삶을 이어가던 사람도 오랜 굴레에서 해방된 듯, 기쁨을 만끽했다. 생각해 보니 해방 이후 오늘까지 이어오는 동안 국가 지도자가 일탈의 길을 걸었을 때 예외 없이 시민의 손으로 단죄했다. 누군가는 한국의 야만적 경쟁교육이 파시스트를 키웠다고 연일 성토했지만, 동시대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광화문으로, 안국역으로, 남태령으로 기꺼이 나아가 또 다른 파시스트의 횡포에 맞섰다.
교육받은 사람은 지식과 기능, 가치 및 태도를 내면화한다. 교육은 피교육자의 손에 삶의 도구를 쥐어주거나 사용법을 알려준다. 이것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윤석열 추종자 같은 사람도 나오고 불의를 단죄하는 사람도 나온다. 여기에는 학교교육뿐만 아니라 당사자가 처한 사회적 조건, 타인과의 관계, 입수하는 정보의 통로 등 많은 변인들이 복잡하게 결합한다.
주장하듯이 '야만적 경쟁교육'을 통해 세상에 나온 시민들은 한편으로 공정성 논리에 포획되어 '불이익'을 참지 못하는 개별자로 존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민주주의 수호라는 공동의 가치 앞에서 정의감을 발휘했다. 헌재가 결정문에 명시했듯이 계엄을 막은 것은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 임무수행이었다. '시민의 저항'이라고 결정문에 명시한 것은 이번 사태와 관련하여 대단히 큰 의미를 가진다. 그 표현은 저항의 대상이 '불의한 권력'이었다는 것을 함축한다.
시민의식이라고 하는 것도 어떤 거창한 이론이기 이전에 보편적 '상식'을 삶에서 체화한 소양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구성원이 상식에 터해 발언하고 행위하는 것은 사회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룰이다. 윤석열 일당은 그것을 일방적으로 깼다. 물론 앞서 언급한 바와 마찬가지로 초경합사회를 살아가는 시민들의 마음속에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강박과 그에 따른 공정함에 대한 갈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때로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기도 하니, 공정한 절차를 마련하는 일은 정의로운 사회를 지속하는 최소한이다. 여러 차례 불의한 권력을 끌어내리는 데 있어 공동의 정의감을 발휘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개별 시민들의 마음속에는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삭막함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불의한 권력에 대한 단죄'를 이뤄냈다는 것이 다른 모든 사항들을 압도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민주주의 진전도, 법치의 이행도 시민의 힘이 바탕에 없으면 일거에 허약한 토대로 전락할 수 있음을 보았다. 말하자면 지난 4개월 간은, 우리나라 현대사에 걸쳐 나타날 수 있는 많은 현상들이 집약적으로 드러난 시기였다. 현실화한 극우의 준동도 보았고, 돈의 노예가 된 선동꾼들도 보았다. 포용과 공존은 이들을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을까. 우린 이번 사태를 통해 지속가능한 사회적 회복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모든 세대의 시민들이 구체적 경험의 연속적 재구성을 통해 한 단계 성숙했다는 점이다. 오늘은 냉소적 전망보다 희망을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