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될 편지
누군가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보면
누군가를 얼마나 많이 생각하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있다와 없다는 공생한다.
부재는 존재를 증명한다
황경신 - 생각이나서
일하러 온 사무실, 문득 돌이켜보다 사랑을 물어보던 너가 생각 나. 황경신 작가의 말로, 너의 부재를 증명하고자 해. 부재는 다른 결론이 가져올 수 있다는 너의 말에 혼자 가시덩쿨에 넘어져버린 내가 조금 속상해서. 부재는 존재를 증명하니까.
사랑의 정의를 나를 내어주는 것이라고 했지만, 오래 전 지금은 만나지 않는 친구에게 선물했던 에리히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이 생각 나. 대학을 다니던, 십년 전쯤의 기억으로, 책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지만, 다시 책의 글을 찾아보니 이 글의 말들이 나의 무의식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기도 하고.
사랑의 기술은, 사랑을 어떤 기술이나 스킬로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투사적 사랑, 희생적 사랑의 반례를 통해서 사랑의 정의나 실존등의 가치를 찾아가는 책이라고 생각해. 꽤 많은 분량의 내용을 모두 서술할 순 없겠지만, 오늘은 독후감 같은 느낌으로 내 정의를 알려주고 싶어. 앞뒤의 구절이나 맥락을 본다면, 내가 이야기하는 것이 틀릴 수 도있겠지만 오늘은 사랑의 기술에 나오는 문장으로만 글을 써보기로 마음먹었어.
#1.
미성숙한 사랑은 말한다. “나는 당신이 필요해서 (소유하려고) 사랑한다.”
성숙한 사랑은 말한다. “나는 사랑하기에 당신이 필요하다.”
내가 성숙한 사랑이라고 말하는것도, 너가 나에게 미성숙한 사랑이야. 라고 말하는 것도 모두 옳지 않기에, 나는 성숙함을 주장하고, 너는 미성숙한 것을 걱정하는것으로 생각 해. 내 삶의 가치는 사실상 무소유에 가깝다고 생각 해. 이전에 글에도 써놨듯, 이것은 내것이야 라고 소리치는 방식은 그걸 제일 빠르게 잃은 무언의 방법이라고도 서술했으니까. 그러기에 나는 너를 사랑하기에 너가 필요해. 이 말은 너를 구속하거나, 집착하거나, 너를 바꿔놓지 않겠다는 말이야. 너의 변화는 나에겐 강요라기 보다는 부탁이야. 그리하여 내가 너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것들은 늘 건강, 가족, 그리고 너야. 그중에 너라는 건 스스로의 최선을 존중해주기. 남들을 미워하기 보단 내가 잘하는것으로 생각하여 일부러라도 긍정을 남기기. 모두에게 충분한 사랑받을 수 있는 있다는 것을 믿기. 나를 보여주거나 내색하는 일을 큰 부정이나 부끄러워 생각하지말기. 용기내기. 다정하기. 라는 말들이야.
우리의 시작은 너의 걱정과 다정함이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부재한다고해서 나의 사랑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너가 없어도 너를 사랑할 수 있다." 라는 말이 생각 나. 그럼에도 영원히 너를 기다린다고 농담처럼 오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그리하여 우리의 결말지가 지어질지라도 나는 너를.
#2. 사랑은 인간 존재의 문제에 대한 사리분별이 있으며 만족스러운 유일한 해답이다.
우리가 대화가 밤에 춤을 추던 어느 밤, 너에게 얘기했던 "사람들은 왜 살아갈까" 라는 질문에 대답같은 말이기도 해. 니체의 말처럼 삶은 아이의 놀이와 같은 거라서, 대단한 정의나 신념이 아니라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 해. 조금 궤변일 수 있겠고, 오해의 소지도 있겠지만, 나는 사랑도 같은거라고 생각해. 사람들은 왜 살아가지라고 물어보면 마치 사랑하기 위해서. 라는 중간의 논리가 끊어져버린 대답을 하고싶은 마음이야. 사리분별이라는 건 결국에 객관이나 본인의 대한 이해같은거라고 생각해. 사랑하기 위해선,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하고, 그 뒤에도 이기와 이해타산, 집착와 분노를 지나 공감과 이해, 나의 생각을 정확히 전할 수 있고, 상대방의 말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너에겐 "반대가 끌리는 사람들" 이라고 설명했지만, 그 끌림은 투사일때도 있고, 그/그녀를 바꿔놓음으로써 미워했던 사람을 더 미워하거나, 오히려 이해하려고 하는 무의식 같은 거라고 말하고 싶어. 거기엔 위에 말한 객관이나 본인의 대한 이해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이번 단락에서의 나의 사랑의 정의는 "자아 탐구" 같은거야. 너를 사랑함으로써, 나는 어떤 사람이지, 무엇을 원하지, 나의 결핍은 무엇이지를 스스로 탐구해가며, 나를 알아감으로써 너를 알아갈 수 있는 일이기에. 너를 알아가고싶지만 나를 먼저 알아야하는 첫 단계를 지나서야 언젠간 너에게 닿을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보여진다고 생각 해.
"재미있어" 라고 얘기하는 너가 니체의 가치나 사랑의 기술을 본능적으로 아는건가 싶어서 나에겐 신기롭기도 하고.
이렇게 쓰다보면, 나는 나를 마치 전부 아는 척 잘하는 하는것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역시나 나의 가치는 솔직이기도 하고, 나도 모르는 나도 있기에.
#3. 만일 한사람이 오직 단한명의 사람만을 사랑하고 그 밖의 다른 사람들에게 무관심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이해관계에서 비롯되는 애착이며, 또는 이기주의가 그 사람으로 확대된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가볍게 이야기하는 나에게만 잘해주는 사람과 모두에게 다정한 사람의 밸런스 게임에서 무겁게 얘기하고 싶은 나의 대답이야. 아가페적 사랑이나, 인류애적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사랑할 줄 아는 것" 이라고 생각해.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은, 타인의 불편함이 보여지기도 하고, 사랑을 할것인가,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를 오히려 더 선택할 수 있기에, 나는 늘 모두에게 긍정의 글자로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 가끔은 너는 나를 이해관계로 보기도 해서 그것은 나의 증명의 문제가 되겠지만, 나에게 너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 이라고 생각해. 그 사랑의 결론이 내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사랑할줄 아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내가 유일하게 삶에 욕심내는 몇 안되는 가치이기도 하기에. 이상한 말이지만, 심사숙고 끝에 선택하지 않는 사랑과 선택한 사랑으로, 무관심이나 대수롭지 않음을 결정한것과, 나를 모르는 상태로 나의 관성으로 생겨난 무관심은 보여지기엔 같지만 사유로써의 깊이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고 나는 믿기에.
#4. 19세기의 문제는 신이 죽었다는 것이다. 20세기의 문제는 인간이 죽었다는 것이다.
모든 현재의 세대는, 이전의 세대를 미워한대. 내가 뒤에 하는말에도 그런 말들이 있겠지만, 낭만이 사라진 시대, 규격화와 상품화된 시대, 사랑을 빠르게 소비하게 하는 사회 같은. 그래서 무거운 의미의 사랑에서는 인간이죽었다는 말을 하는 것 같아. 사랑이 거래되고, 조건을 비교하고, 무엇을 더 내놓아야하나 계산하는 행태를 미워하기에. 나는 사랑은 감정이야, 사랑 끝은 결혼이야. 같은 너무 깊이 없는 말들을 미워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지만, 그 말에는 어떤 경험을 어떻게 사유해서 내어놓는지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그리하여 나의 사랑은 인간의 살아있음이야. 공학의 끝은 문학이라고 농담하는 나의 말에는, 나에게 사랑은 "모든 물리법칙의 통용되는 세계에서 시공간을 초월하여 당신의 꿈에 날아 들어 보라색 튤립을 한송이 주고갈 수 있는 것" 이야.
#5. 사랑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능동적인 활동이다
사랑은 "빠지는 것" 이 아니라 "용기내어 결정하는 것" 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사랑은 늘 용기와 담대함이 수반되어야 해. 그렇지않으면 누군갈 결정해주길 기다리게 되거나, 나의 결핍을 투사하거나, 원인을 해결하지못한채 표면에 둥둥 떠다니는 일이 벌어지니까.
나에겐 능동이란 선택이지만, 구체적으로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 너에겐 늘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 말을 듣고나서 변했다기 보다는, 너는 최선이랑 글자랑 같은 말이기에. 나의 얘기보다는 너는 늘 능동이었어. 용기내서 하는 말들과, 누군가에 편안함에 이르기 위해 하는 선택과 희생을 보며, 너가 완전한 타인이라걸 비로소야 느껴. 오히려 내 주위에 제일 유일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오롯한 타인이라, 여전히 그리하여 그래서 나는 너를.
#6. 사랑의 정의
그리하여 나의 사랑의 정의는 "있는 그대로의 존중" 이야. 언젠가 한번 누군가 나에게 너에게는 내가 반드시 있어야해 라고 물어봤던 날이 생각도 나서. 그날의 대답을 다시한번 여기에 적게 되었어.
사실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기 위해서는, 어떤 선택을 하기전에 있어서 가치와 소신에 대해서 정의가 필요하거든. 내 주위엔 의외로 가치와 소신에 대한 정의가 없거나 부족해서, 반대가 끌리거나, 다정하지 않거나, 투사하거나, 잘못된 사람에게 있는 자체를 존중하는 실수를 너무 여러차례 봐와서 그런 것 같아. 그리하여 나는 너에게, 사랑도 마찬가지이고, 오히려 삶에 있어서 너 자체를 존중해. 그 모든 것들을 지나와서 현명한 사람이란걸 알기에.
그런 단계의 너는 충분한 고민과 결론으로 여기까지 왔기에, 너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존중할 수 있어. 물론 그 존중에는 나 스스로의 가치판단의 결정도 필요하고, 어떤 것들은 인내일 수 있겠지만, 그 반대편에서도 같은 가치를 존중해줄 것이라고 생각해.
너에게 이야기하는 있는 "그대로의 존중" 은 평소와는 반대로 "정답을 알지만 기다려 주는것" 이 아니라 있는 그자체의 대한 존중이야. 완전한 타인으로써의 인정함이야. 결국엔 사랑이 뭐냐고 물어보는 너에게, 할 수 있는 간단한 짧은 말들은 없어서, 글로 남겨.
#7.번외
나에게 사랑의 정의 말고 사랑의 수단은 객관화이기도 하고, 기다림이기도 해. 객관화가 필요한 이유는 너에게서 내가 사랑에 빠진 이유를 찾는 것이라기 보다는, 여러가지 상황 속에서 이걸 내가 이제 사랑이라고 불러도 되는걸까,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에도 자격이 있는가에 질문지들 속에서 답을 찾아가는 내면에 과정이 필요해서. 그렇기에 나와 너를 객관적으로 보고 싶었어. 외부 세계에서는 너와 나, 내부 세계의 너와나, 그리고 우리 둘이 살아가는 그 세계 속에서, 우리를 타인처럼 보는 것이 사랑의 수단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래서 우리가 있는 장면이 나의 시선이 아니라, 카메라 속에 있고, 사진속에 있어. 물론 사진의 초점은 너에게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