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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초록 Jul 06. 2024

그대라는 사치

사랑이 밥을 먹여주진 않더라도

가난한 사랑 노래라는 시가 있다. 사랑을 모를 것만 같았던 고등학생 때부터 나는 그 시를 좋아했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법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현재를 기점으로 유와 마지막으로 헤어진 건 맑은 빨강의 장미가 흐드러지던 6월이었다. 내 기준으로 나는 그날 꽤 예뻤다. 전에 예약해 둔 스냅사진을 찍기 위해 샵에 가서 드라이를 하고 엷게 메이크업도 했었다. 좋아하는 옷을 입고 이름다운 포토님과 함께 장미그늘 아래서 사진을 찍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때 찍은 사진은 여러 군데 요긴하게 쓰기도 하고.


촬영장소는 그의 일터와 꽤 가까웠다. 나는 아련한 기분으로 3일째 연락이 되지 않는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스냅 촬영이 끝나고 집과는 꽤 먼 거리라 지하철 승강장에 서서 다음 열차를 3분 남겼을 무렵, 톡이 왔다. 결론적으로는 예상했던 것처럼 이제 정말 그만하여자는는 이야기였다. 몸이 아프다는 말도 있었다. 나는 무어라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뒤돌아섰다. 마침 집으로 가는 지하철이 들어오고 있었지만 당장 그에게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마음이 빨랐다. 정말 다시는 못 보는 거라면, 이게 마지막이라면. 오늘의 그를 보고 싶었다.


며칠의 부재 동안 생각한 많은 말들을 장문의 톡으로 보내봐도 유는 냉담하고 완고했다. 연애를 지속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겠지. 남자들의 이 화법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너와) 연애할 상황이 아니다.


톡으로 잠시간 실랑이하는 사이에 일터 근처에 도착했고 약국을 찾아다녔지만 세 군데 모두 닫혀 있었다. 그해서 하는 수 없이 그에게 잠시만 나와달라고 했다. 낯선 버스정류장에 앉아해야 할 말을 고른지도 한참. 유는 전례 없을 정도로 굳은 얼굴로 걸어왔다.


    "(대체 여기는) 왜?"

    "이거 돌려줘야 할 것 같아서. 내가 찾아올까 걱정할까 봐. 안 찾아오겠다는 말이야. 아프다고 해서 약을 사 오려고 했는데 일요일이라 그런지 약국이 다 닫았더라."

    "지금도 멋대로 온 거 아닌가?"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테니 안심했음 해서."


손에 오래 쥐어져 있어 체온으로 달궈진 그의 집 열쇠를 건넸다. 감정을 잘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유가 열쇠를 받았다.


    "기다릴게."

    "아니."

    "부담가지란 건 아니야. 그냥 내 마음이 마음대로 안돼.

    "일단 알았어. 이제 가."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말은 약속 못 해. 그래도 노력할게. 부담 주지 않게."

    "가."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침잠된 목소리와 얼굴. 일을 하다 나온 게 분명했기에 하는 수 없이 바로 돌아섰다. 돌아보지는 않았다. 내 뒤에 그가 있어도 슬프고 없어도 아플 것 같았다. 이별이란 게 그런 것이니까. 만약 있더라도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즈음 횡단보도가 있었다. 이번엔 정말 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신호를 기다리며 잠깐 주저앉았다. 역시 눈물이 나오진 않았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자. 가장 안전하고 내 울음을 들을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자.


나는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타박타박 걸어 길을 두 번 건너 광역버스를 탔다. 집까지 가는 경로는 1시간 정도. 버스의 순환점에서 내려  걸어서 지하철이나 다른 버스를 타야 했다. 나는 버스를 타는 것을 선택했다. 도보로 12~15분 거리의 길을 걸었다. 영등포시장역 부근에서 영등포역까지 가는 루트였다.


이 길은 늘 그가 걷던 길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닿자 걷는 속도가 평소보다 느려졌다. 나는 영등포역에서 지하철을 타는 걸 선호했지만 유는 하루종일 서서 일을 하다 보면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것이 좋다고 했었다. 자정 즈음이거나 조금 넘은 시간 일을 마감하면 유는 오늘 내가 온 루트대로 나에게 왔었다. 언제나 버스에서 다른 버스로 환승하기 위해 걷는 그 시간 동안 상기 된 목소리로 늘 전화가 왔었다. 금방 갈게, 조금만 기다려. 나는 그 목소리를 참 좋아했었다.


너는 그때마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불이 꺼진 사계절의 거리를 걸어서 내게 올 때마다. 애정표현이 적은 사람이라고 생각은 자주 했었지만 이제야 상대의 입장에서 한번 더 생각해 본다. 10~12시간 이상 서서 일하고 난 뒤 편도 1시간 거리를 온다는 것이 과연 쉬울까? 그게 주 1~3회라면 더더욱. 쉬울 리가 없다. 그것이 그의 표현이었던 걸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우리는 서로 참아왔을 거라는 게 느껴졌다. 나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자기가 오는 게 낫다고 말하던 그 사람과 남이 되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서투른 사람 둘이 만나 함량 미달의 정체 모를 것을 했다. 세 시간씩 말없이 눈을 들여다 보아도 좋아서 이게 무엇인지를 알 사이도 없이. 초라하고 가난한 것 사이에서 몸을 맞대고 그저 서로의 눈을 바라보던 시간. 이대로 눈 감아도 좋다는 네게 계속 함께 살아가자 했었다.


우리에게는 연애라는 것도 사랑도 모두 사치 같았다. 살아남기에 급급하면 그렇게 된다. 삶이 우리의 적성에 맞지 않는 게 분명했다. 나는 기꺼이 그 사치를 감내하려 했었고 그런 내가 유에겐 늘 커다란 부담이었을 거다. 아마도.



짧든 길든 헤어짐도 세 번째, 나는 전처럼 비장하진 않았다. 그리고 방황하지도 않았다. 가끔 명상을 했고 주 3일은 고강도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다. 삶은 고통의 연속인데 고강도 운동은 내가 정한 시간 동안 안전하게 고통받을 수 있으니 합리적이었다. 체력이 늘수록 마음도 단단해진다는 것을 이미 경험했었다. 어차피 지금의 나와 그로는 이 관계를 지속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2주가 지났다. 일을 마친 그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잘 지내? 하는 조금 눌린 목소리. 나중엔 알아챘지만 술을 먹었던 거겠지. 1시간 정도 통화를 했다. 나를 원망하는 말도 듣고 소중했'던' 사람이라는 말도 듣고 다시 해본다 해도 전처럼은 할 수 없을 거라는 말과 나를 상처주기만 할 것 같다는 말들. 1시간의 통화 끝에 유는 가도 되냐고 물었다. 나는 한 번도 온다는 그를 오지 말라고 한 적이 없었음에도.


사실 알고 있다. 이 모든 허락을 구하는 듯한 말들은 책임 소재를 지우는 말이며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권리를 타진해보는 말이라는 것을. 만약 남의 이야기였다면 냉철하게 그렇게 설명했겠지만 나는 모르는 척했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니까.


새벽 3시. 집 밖에서 들어오지 않고 서있던 유는 한참 뒤에 들어왔고 나는 그의 마른 몸을 안았다. 안은 손이 떨렸다. 유는 나를 안다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긴 허그였다. 우리는 조금 떨어져 앉아 이야길 꽤 오래 했다. 전화로 한 것과 비슷한 이야기도 많았다.


    "표현을 잘 못했었지만 술을 힘을 빌어 말해주고 싶었어.  정말... 사랑했었어. 아직도 보고 있으면 좋은데 마음이 너무 오락가락해. 나 원래는 헤어지면 연락 안 하는 사람인데... 자기도 알잖아. 그런데 왜 날 상처 줬어?"

    "미안해."


나 이상으로 잘 울지 않는 그는 울먹이며 말했다. 이 장면을 아주 오래 기억할 것만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유에게 다가가 목과 머리를 끌어안았다. 내 잘못이 뭐든 사실 크게 상관없었다. 상처는 나만 받은 게 아니었으니까. 한번 더 말하지만 더 사랑하는 자가 약자다. 조금 더 가벼운 이야기들을 나누다 전처럼 유가 나에게 입을 맞추었다. 우리는 껴안고 잠에 들었다.


다만 이 만남의 결과는 전과 같지 않았다. 다음날 낮에 유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나갔고 연락도 없었다. 조금 불안했지만 하루 뒤 다시 연락을 해보았다.


    - 다시 만나는 걸로 아는 거 아니지?

    " 그럼 어떻게 지내고 싶은 건데?"

    - 친구 같은 사이?


너무 간단한 이야기인데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가슴이 철렁하고 주저앉았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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