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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초록 Jul 20. 2024

미역으로도 때리지 말라

생일이 그대에게 행복한 날이 아닐지라도

생일이라는 게 그렇다. 30대쯤 되면 유난스레 기념하지 않게 되는 것. 어릴 땐 그 1년의 하루가 나의 날이라는 것이 좋았다. 맛있는 것에 친구와 가족들에게 받은 선물까지 모든 게 좋았던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기쁨이 줄어가는 일. 인사이드 아웃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이 세상이 내가 태어난 게 뭐 그리 대수라고.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 나를 기억해 주고 축하해 주길 바라게 되는 일이다.


30대 중반쯤 되니 엄마조차 생일 축하 연락이 없던 그 해, 나는 굉장한 배신감을 느꼈다. 우습게도 난  태어나기만 했지, 정작 힘들었을 건 나를 낳으신 그분인데도 아무에게도 축하받지 못한 그날은 하루종일 슬펐다.


유와 처음 대화를 할 무렵 생일 이야기를 하다가 그가 한 달 전쯤 생일이었다는 걸 알았고 나는 여름 태생이라는 이야기가 오갔다.


    '저는 생일을 챙기지 않아요.'

    '응? 왜요? 물론 저도 2년 전엔 엄마조차 연락이 안 오길래 전화로 화도 냈었어요. 너무하다고.'

    '올해도 평소처럼 일을 하다가 퇴근하고 혼자 맥주나 조금 마시다가 잠들었던 것 같아요.'

    '그럼 내년엔 제가 챙겨드릴게요.'


나는 사람들의 생일을 잘 기록해 놓는 편이었다. 인연이 닿는다면 축하의 말이든 선물이든 하곤 했고 그의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은 것은 진심이었다. 우리가 어떻게 태어나 어떤 사람으로 자랐든 생일만큼은 축하받을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앞선 이야기처럼 우리는 고작 이야기 한지 3일 만에 만났고 연애를 시작했다. 나는 남자친구가 된 그의 생일을 챙겨주고 싶었다. 마침 지방에 사는 내 지인과 유의 친구가 서울로 놀러 온다기에 그날을 결행일로 잡고 만나기로 한 멤버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선물은 필요 없으니 같이 축하해 달라고. 그날도 유는 바빠서 일을 밤늦게 마치면 두어 시간 얼굴만 보고 가겠다고 했다.


나는 부지런히 생크림 딸기케이크로 유명한 곳에 가서 딸기케이크를 샀고 그가 오기 전까지 친구와 시간을 보내다가 그가 왔을 때 간단한 배달 음식과 케이크를 꺼내 사람들과 함께 생일을 축하해 주었다. 비록 한 달도 지난 생일이었지만 혼자서 보낸 그날을 즐거운 기억으로 덧칠해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다음 해의 생일엔 소량의 한우 치마양지를 사서 미역국을 끓였다. 딸자식 키워봐야 소용없는 일이듯 엄마에게도 해본 적이 없던 일이었다. 대단한 선물은 아니지만 내가 받은 사랑이란 결국 엄마가 내가 준 것들이라 나도 그에게 그렇게 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엄마는 표현에 인색하고 냉정한 부분이 있는 점이 유와 꼭 닮았지만 나에게 밥을 먹이는 것으로 애정표현을 대신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고향에서 보내온 남쪽 바다의 건미역을 30분가량 물에 충분히 불린 뒤 물기를 짜고 불린 물은 따로 담아놓는다. 물기를 짜낸 미역은 한입 크기로 잘라서 액젓 두 숟갈과 미역 불린 물 네 숟갈을 넣고 잠시 볶다가 소고기를 넣고 붉은 기가 사라지고 하얗게 겉이 익을 때쯤 따로 담아둔 물을 넣으면 준비는 끝.


이때 물의 양은 원하는 최종 결과물의 양과 비슷하게 잡으면 편하다. 한번 팔팔 끓이면서 약간의 조미료를 첨가하고 싱겁다면 소금 간 약간, 거의 다 끓고 나면 참기름을 둘러 향을 입히면 완성.


하지만 국이나 찌개류는 한번 끓인 뒤 뚜껑을 덮어 식히면 재료에 국물의 간이 잘 배기 때문에 식힌 국을 재가열해서 미역국을 끓여냈다.


이렇게 끓인 미역국은 부들부들한 맛으로 훌훌 넘어간다. 흑미와 잡곡을 넣은 밥, 잘 익은 김치와 함께 내면 밥이 뜨거울 땐 조금씩 떠서 먹다가 밥이 살짝 식으면 말아먹는 맛이 또 다르다.


유는 미역국을 맛있게 먹었다. 연애를 시작할 때 가장하고 싶은 게 무엇이냐 묻자 함께 밥을 차려서 먹는 것이라고 했던 사람이니까.



또 한 해가 지나 그의 생일이 돌아왔지만 우리는 헤어진 뒤였고 친구도 연인도 아닌 기묘한 관계로 지내고 있었다. 게다가 1주일 넘게 연락도 되지 않던 시기. 헤어진 지도 4개월이 넘었고 우리가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한도는 3주 이내인 것을 알기에 마음이 썩 좋진 않았지만 견딜만했다.


10월인데도 이상기온으로 날씨는 제법 추웠고 유는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었다. 나는 생일 이틀 전쯤 침구 빨래를 했다. 그가 우리 집에 처음 와서 지낼 무렵 샀던 새 침구세트였다. 갈색 양털 모양의 소재로 마치 곰인형 같은 촉감의 베개커버와 폭신한 토퍼와 솜이불로 이루어진 세트로 유는 그 이불을 무척 좋아했다.


섬유 유연제를 넉넉히 넣어서 세탁한 두꺼운 이불과 토퍼라 이틀에 걸쳐 햇빛으로 잘 말려서 개어놓고 나는 퇴근하자마자 또 미역국을 끓였다. 재료를 볶고 물을 부어 안정화시킨 다음 중 약불로 뭉근히 끓이는 동안 손 편지를 썼다.


쓰다 보니 다섯 장. 그럴 만도 했다. 헤어진 연인에게 보내는 생일축하 편지란 온통 간절함으로 가득했다. 잘 울지 않는 성격이지만 이상하게도 유와 관련된 일이면 감정이 넘치곤 했다. 나는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썼다. 만나는 동안 무던히 애를 썼지만 나의 최선이 상대방의 최선은 아니었기에 못 다해준 많은 것들. 그렇게 아득한 후회와 함께 온통 그의 안녕과 행복을 비는 말로 가득 찬 편지였다. 자주 쓰던 향수를 뿌리고 종이봉투에 꾹꾹 마음을 눌러 담았다.



실리콘 두 개와 작은 반찬통을 꺼내 방금 끓인 미역국을 지은 밥을 담고 곁들일 익은 김치도 같이 챙겼다. 그가 일을 마치고 나면 늘 늦은 저녁 겸 야식을 먹는 걸 알고 있어서 따듯한 밥을 먹이고 싶었다. 퇴근 후라 피폐한 얼굴이었지만 깨끗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아랫배의 싸한 느낌에 진통제를 하나 먹은 다음카카오 택시를 불렀다. 저녁은 다행히 차가 막히는 시간은 아니라 택시로 20~30분 거리를 가면 유의 자취방이 있었다.


내비게이션 문제로 택시기사가 막무가내로 내려 준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골목길. 지도 앱을 보니 10분쯤 돌아가야 하는 곳이라 팔로 들면 코끝까지 올라오는 침구세트 압축팩을 들고 뒤뚱거리며 오르막길을 올랐다. 추운 날씨인데도 땀이 날 정도였다. 톡으로 연락해서 출입허가를 받고 싶었지만 바쁜지 조금 있다 연락한다던 유는 연락이 없었다. 30분쯤 집 밖에서 덜덜 떨면서 기다리다가 하는 수 없이 여름에 돌려받았던 열쇠로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생각보다 집은 엉망이었다. 선연히 눈에 그려지는 장면. 일만 하느라 아마 일상을 돌 볼 여유가 없었겠지. 눈 뜨면 일을 하러 가고 돌아오면 잠이 드는 삶. 사람이 사는 방이란 건 아무리 열쇠로 열고 들어왔다지만 방을 치우는 것까진 선을 넘는 일인가 해서 침대 위의 옷가지나 이전의 침구들을 개거나 접어서 옆에 두고 가져온 압축팩을 열었다.


매트리스 위에 토퍼를 깔고 손으로 살살 매만져서 구겨진 털도 한 방향으로 곱게 폈다. 베개 커버를 바꾼 베개를 머리맡에 나란히 놓고 가져온 음식이 식지 않도록 베개에 실리콘 백에 든 미역국과 밥을 기대놓았다. 나머지 베개에는 편지를 두고 이불을 가지런히 덮은 뒤 방에 불을 끄고 나왔다.


마침 모든 과정을 끝내고 나와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유에게 연락이 왔다. 집에 뭘 조금 두고 나왔다니까 화를 내었다. 아무래도 허락이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집에 들어간 거니까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배의 통증은 이제 심상치 않았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버스를 놓칠 것 같아 그의 일터 쪽에 열쇠를 숨겨두었다. 유는 퍼스널 스페이스를 아주 소중히 하는 사람이었고 나는 더 이상 그의 연인도 무엇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집 열쇠를 가지고 있었던, 어디에도 정의되지 않는 그런 사람.


    - 뭐 하자는 거야. 제발 가져 가. 그리고 키 놓고 가.

    - 키 바로 앞에 있어. 챙겨 가. 오른쪽 전등 밑에. 나 버스 타서 못 챙겨주니까 빨리 찾아가.


아릿한 마음과 저린 배를 부여잡고 광역버스에 올랐다. 어떻게 집으로 간 건지도 모르게 1시간의 이동 끝에 집으로 돌아와 온수매트의 온도를 올리고 끙끙 앓다가 까무룩 잠에 들었다.



카톡 소리에 살포시 잠에서 깨어 톡을 확인하니 그였다.


    - 진짜 너무한다. 너무해 진짜 너무.

    - 이제는 뭘 해도 다 잘못한 것 같아서 어떤 걸 말하는지 모르겠어. 미안하다는 말도 뭘 잘못했는지 알고 해야 하는 건데. 그냥 다 미안.

    - 집에 오는 거만큼은 미리 말을 했어야지. 이미 와서 그러면 어떻게 하는데. 게다가 이상하게도 오늘은 정말 늦게 터져서 얼굴 볼 틈도 없었고 그게 너무 화나. 최소한 왔으면 잠깐이라도 보고 보내줘야 마음이 편한데 결국 혼자 오고 혼자 가게 했잖아. 그게 너무 짜증 나서 그랬어. 그리고 이제야 이불 들춰봤는데 안에 있는 거 보고 솔직히 울었어. 그래서 더 짜증 나고 열받아.

    - 나도 어제 아침부터 울었어. 이불은 가져가려던 건 아닌데, 그 핑계로 한번 더 보고 싶었는데. 너 추울까 봐.


    - 내가 분명 며칠 전에 전화해서 힘들다고 했는데 꼭 왔어야 했나? 괜찮다고 할 때 오면 안 되는 거였나?

    - 생일이니까 갔지.

    - 내가 해준 건 아무것도 없는데 왜.

    - 네가 생일이 뭐 별거냐고 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속상한데. 몰라, 그래도 사랑하는데 어쩌라고.


한참 톡으로 서로 속상해서 투닥거렸다. 나는 그저 유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기억하고 또 축하하고 싶었다. 늘 그가 외롭지 않길 바랐고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한 그의 생일을 챙겨주고 싶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 아 저거 어떻게 먹냐고.

    - 먹으라고 한 건데 그럼 버릴 거야?

    - 먹기 싫은 게 아니라 저걸 어떻게 먹어.

    - 따뜻하게 가져가려고 품에 안고 갔는데.

    - 미친다 진짜... 아, 그런데 저거 진짜 어떻게 먹어. 못 먹어. 나중에 집에 가면 그때 해줘.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나는 유를 미역국으로 때렸다. 그것도 아주 아프게. 다 큰 성인 남성을 울릴 정도로.


    - 그러고도 죽어라 온 것도 대단하다. 내가 어떻게 나올지 뻔히 알면서.

    - 너도 날 그렇게 몰라? 생일이잖아. 내가 평일에 이렇게 무리하겠어?

    - 왜 생일인걸 인지하게 만들어서 더 슬프게 하냐고.

    - 너 만났을 때부터 나에겐 제일 중요한 날 중의 하나니까.

    - 하 진짜... 아 진짜 겨우 겨우 참고 살았는데. 슬프다고... 난 이게 너무 싫었어서 잊고 산거라고.

    

    - 미안해. 내가 뭐 하나 아는 것도 제대로 하는 것도 없네.

    - 고맙다는 말은 못 하고 역정이나 내고 있네.

    - 싫은 거 생각하게 해서 미안.

    - 그 마음을 아니까 더 열받는다고. 아 진짜... 왜 나까지 울게 만들어.


1시간 가까이 이어진 대화는 주말에 나를 보러 오겠다로 매듭지어졌다. 그날 새벽, 유는 3시가 넘은 시간에 두 사람 분의 눈물로 간이 맞추어진 미역국을 먹은 모양이다. 김치 싸대기도 아닌 미역 싸대기를 맞은 그의 마음을 나는 다 알 수 없지만 나는 유의 생일을 꼭 챙겨주겠다는 스스로에게 했던 약속은 고집스럽게 지켰다.



두 달 뒤, 우리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다음 해인 지난해 내 생일에는 서프라이즈였는지 퇴근하고 돌아오니 먼저 퇴근한 그가 미역국을 끓여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인스턴트 베이스로 만든 건지 쓰레기통엔 미처 깔끔하게 버리지 못한 오뚜기 미역국 박스의 흔적이 남아있었지만 소고기와 마늘을 추가로 넣은 게 귀여워서 고마워하며 먹었다.


그리고 두 달 뒤 찾아온 유의 생일에는 또 내가 소고기와 새우를 잔뜩 넣은 엄청 진한 미역국을 끓였고 고구마 케이크를 사서 나눠먹으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지난해의 눈물바람을 생각하면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감사하게 되었다. 울다 지치던 시간들이 있었으니까.


나는 가끔씩 평소에도 미역국을 끓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젠 자타공인할 정도로 맛이 대단한 미역국을 끓일 수 있게 되었다. 유를 만나서 할 수 있게 된 작은 일 중의 하나이며 우리가 서로의 삶에 남긴 잊지 못할 일들 중에 하나의 색인일 것이다. 3주 뒤엔 다시 내 생일이 돌아온다. 그날도 나와 유는 함께 생일을 보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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