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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초록 Jul 27. 2024

[외전-1] 스무 살, 너를 만났다

유는 내게 원의 그림자.

현재가 있다는 것은 시작도 있다는 것. 내게도 있었다, 첫사랑이. 여자에게 첫사랑이란 처음 좋아했던 사람보다 많이 사랑했었기에 사랑이 아닌 것을 부정할 수 없는 첫 번째 사람에게 할당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케이스였다.


사랑에 쉽게 빠지지 않지만 쉬이 누군갈 좋아하는 대책 없이 나의 심박수에 많은 것들 맡겨버렸던 나와, 그런 내가 본인들의 기준에 적당히 나쁘지 않으니 연애를 제안했던 어리고 가볍고 장난스러웠던 내 전 남자친구들. 관계에 임하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라서 연애를 하게 되면 언제나 내 나름의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는 흑역사만 빼곡하게 적립되었고 사실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여자들은 20대의 연애에서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 때문인지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애틋하고 흐린 분홍빛의 무드셀라 증후군처럼 고운 빛으로 남은 건지 이제는 중요하지 않은 오늘의 이야기는 나의 유일한 남자사람친구인 사람의 이야기다.



그 애, 원을 알게 된 것은 스무 살이었다. 우리는 같은 MMORPG를 했었다. 그 게임은 유저친화적인 커뮤니티를 형성 중이었고 2차 창작을 장려하는 곳이었다. 2차 창작물을 게임 속 콘텐츠로 만들어준다거나 공식 홈페이지에 선별해서 작은 베네핏을 주기도 하는 곳이었다. 자유도를 중요시한다는 콘셉트의 게임이라 서사가 독특했고 원래 작가가 꿈이었던 나는 2차 창작으로 글을 쓰는 것이 너무 좋았다. 게임 플레이보다 즐거운 경험이었다.


그 소설 게시판에서 우리는 알게 되었다. 나는 작은 동아리를 만들었고 게임의 연령대가 낮은 편이라 오히려 나는 나이가 많은 축에 속했고 동아리에 들어온 사람들도 대부분 학생이라 나와 원만이 20대였다. 중고등학생 동아리원들과 함께 우리는 글을 썼다. 목표는 아주 소소했다. 코믹월드에 참가하는 것. 적자가 날 소지가 컸지만 같이 모은 돈으로 회지를 발간하는 것이 목표였다.


주마다 미션을 내고 각자 관련된 글이나 자유 주제의 글을 쓰고 그렇게 몇 달 치가 모이면 그중에서 가장 내고 싶은 글을 골라 회지로 꾸렸다. 퀄리티를 따지면 사실 그렇게 좋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비슷한 취미와 같은 공감대를 가진 열명 가량의 커뮤니티에선 그마저도 즐거운 기억이었다.


나와 원이 친해지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당시 극외향형의 성격으로 동아리의 아버지 같은 존재였고 반대로 조용하고 자상한 성격인 원은 동아리의 엄마(?)로 자리매김했다. 회지를 위해 공유하게 된 MSN 메신저로 우리는 종종 이야길 나누게 되었다. 


처음엔 동아리 이야기였던 것이 이야기가 길어지게 되며 이런저런 사담으로 번지는 건 금방이었고 둘 다 밤잠이 없는 야행성 인간이어서 그랬던 것일까. 나는 내 불안정한 연애사를 원에게 이야기했고 원은 새벽이 깊어지도록 찬찬히 들어주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시간이 지나고 비록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내적 친밀감은 쌓여갔다. 스무 살은 그런 나이니까. 


반년 가량의 시간이 지나 첫 번째 회지를 완성해 계획대로 서울 코믹에 부스를 내고 그동안 카페에서 글로만 소통하던 동아리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양재 AT센터에서 행사에 참가하고 신촌까지 가서 회지를 판매한 비용으로 뒤풀이도 했지만 원은 시간이 맞지 않아 참가하진 않았다. 내심 궁금했지만 각자의 삶이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동아리를 만든 지도 1년을 넘겼다. 7월에 만들었던 동아리가 해를 넘겨 벌써 9월. 나는 팬이었던 해외 밴드의 내한을 위해 서울에 왔다. 미리 표를 예매해 두었지만 현장에서 더 좋은 취소표를 발견하고 대책 없이 결제해 버렸다. 표가 하나 남게 되었고 10만 원은 넘는 거금의 표라 어쩔까 고민하다가 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 무슨 일이신가요?

    "음, 1시간 반 안에 올림픽 경기장 오실 수 있어요?"

    -... 네? 가능하긴 한데...

    "저 콘서트 보러 왔는데 표가 남거든요? 지금 바로 오세요!"

    - 네? 일단 나갈게요.


자다 받은 건지 부스스한 목소리의 원은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신림에서 올림픽 경기장까지 끌려 나왔고 자다 나온 사람이나 콘서트 하나 보겠다고 매우 편한 차림새로 상경한 나나 사실 꼴이 말은 아니었다. 서로 좋은 첫인상을 주기엔 조금 어려운 상황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만나자마자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내가 가지고 있던 표를 나눠주었다.


    "그럼 끝나고 봐요!"

    "네네, 음 이걸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고마워요?"


새로 예매한 곳은 아레나 석이었고 원래 예매한 곳은 R석의 측면이라 내 자리에서 원의 자리를 보면 깨알처럼 보일만큼 거리는 멀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나의 종교나 다름없었던 밴드의 내한인데 그런 건 다 사소한 일. 2시간가량 소리를 지르고 방방 뛰면서 나는 내내 심장이 뛰었다. 묵직하게 땅과 하늘을 울리는 락 사운드. 일렉 기타와 베이스, 그리고 드럼. 가장 좋아하는 보컬의 몽환적인 목소리. 그 모든 게 나에게는 꿈같은 경험이었다. 여러 트랙을 지나 앙코르 트랙이 끝날 즈음에는 이유를 모를 눈물이 쏟아졌다.


콘서트를 보고 정말 도취된 상태로 원과 다시 만났다. 나만큼은 아니지만 원도 꽤 상기된 얼굴. 콘서트에 대한 이야길 나누다가 역으로 간다는 게 잘못 걸어서 몽촌토성역까지 긴 거리를 돌아가게 되었다.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9월의 밤, 낯선 산책로를 둘이서 걸었다. 나는 끊임없이 재잘거렸고 원 역시 평소처럼 차분하기만 한 게 아니라 들떠있었다. 몽촌토성역에 도착할 즈음 이 들뜬 마음을 더 지속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음 무렵 원이 말했다.


    "자리 옮겨서 조금 더 이야기할까요?"

    "네! 좋아요."

    "그럼 좀 멀어도 괜찮아요?"

    "다른 약속은 없어서 상관없어요!"

    "신촌으로 가요, 그럼."


잘 아는 작은 펍이 있다며 원은 나를 그곳으로 데려갔다. 어둡고 아담한 공간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서 맥주를 마시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미 잘 아는 곳들이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원에게 인사를 하는 많은 사람들. 그곳에서 다른 지인을 소개받기도 하고 잘 못하는 술이지만 맥주를 조금씩 홀짝 거렸다. 마침 그날은 펍의 3주년 기념이라 작은 이벤트 중이었다고 한다.


    "이 쪽은 제 친구예요. 서로 인사해요."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좋은 시간 보내세요."


짧은 단발머리의 여성분은 밝게 인사하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길 하러 가고 나는 친구라는 말에 마음이 살짝 간지러웠다. 알고 지낸 지도, 대부분의 밤마다 이야기를 나눈 지도 1년이 넘었는데 뭔가 정확히 관계를 형성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친구예요? 나이 차이도 있는데."

    "아까 저 친구도 저보다 세 살 어려요. 친구에 나이는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해서. 그럼 이제부터라도 친구 할까요?"

    "어, 저 오빠라고 부를 자신은 없어요. 1년 넘게 원 씨라고 불러서요!"

    "... 제발 그렇게 부르지 마요. 이상해. 그냥 이름 불러줘요."

    "아하~ 원 오빠~~~"

    "하지 마;;"


우리는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기쁜 날이었다. 평생 기억에 남을 콘서트를 보았고 해묵은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 시답잖은 농담이나 공연 감상 포인트와 좋아하는 노래들에 대해 이야길 나누다 보니 어느새 새벽 3시. 원은 밤을 새울 생각이었던 것 같지만 내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자 옆으로 와서 작은 목소리로 귓속말을 했다.


    "많이 졸려?"

    "아, 응. 버스 오래 타서 피곤한가 봐. 괜찮아. 아침 차로 내려갈 거라."

    "일단 나가자."


밖으로 나와 차가운 공기를 쏘이니 정신이 약간 돌아왔다. 원은 나를 이끌어 근처의 숙박업소를 찾아보았고 토요일 밤이라 그런지 방은 없었고 두세 곳을 돌고 나서야 아주 작은 방을 하나 받을 수 있었다. 사실 누군가의 자취방 같았던 더블싱글 침대가 하나 있던 방으로 배정받았다.


    "일단 시간이 늦었으니까 자야겠다. 그럼 난 바닥에서 잘 거니까 넌 침대에서 자."

    "어, 그래도 그건 좀 미안한데? 그럼 이불이라도 깔고 자."


침대에 있던 베개 하나와 이불을 모두 내려주고 누웠다. 9월이었고 옷을 다 입고 있어서 그런지 이불이 없어도 그리 춥진 않았다. 불을 끄고 각자의 자리에 누워 우린 한동안 이야길 했다. 


    "바닥 안 차가워?"

    "괜찮아. 이불도 있고."

    "그래도 걱정되는데."

    "나도 남자야."


나는 원의 그 말이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순간 당황했다. 사실 이런 상황은 어쩌면 제법 위험한 상황일 수도 있었던 것이라는 걸. 다만 원이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 뿐.

    

    "남자와 여자가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사람들은 말하더라. 우린 친구 하기로 했잖아."

    "어렵지. 하지만 서로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럼 안심이다. 우리는 친구 할 수 있겠다."

    "다만 친구 사이엔 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친구 사이엔 손도 잡으면 안 돼. 그러니 여기서 잘게."


그때 처음 알았다. 원에겐 사귄 지 3년이 넘었고 1년 반 넘게 같이 지내는 여자친구가 있다는 이야기. 한때 서로 너무 사랑했지만 같이 있는 동안 점차 멀어지고 있다는 것도. 나는 그렇게 오래 누굴 만나 본 적도 없었고 같이 살아본 적도 없어서 원의 이야기들이 다 이해 가지는 않았지만 그렇구나 하며 조용히 이야기를 들었다. 밖이 살짝 밝아올 때쯤 나와 원은 잠이 들었다. 침대 매트리스의 높이 딱 그만큼 우리는 선을 지켰다.


다음 날, 원은 나를 터미널까지 배웅해 줬고 나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우리에겐 아무 일도 없었지만 남들에겐 말하지 못한 비밀이 생긴 것 같았다. 그것은 아주 생경한 경험이었다.


많은 시간을 지나 생각해 보면 내가 남자에 대해서 완전한 믿음을 잃지 않은 것은 원과의 에피소드가 주요했던 같다. 남자와 여자도 친구가 있다고 말해주었던 사람. 물론 첫사랑이니만큼 결국 나도 원을 남자로 보았던 적도 있었지만 우리는 기어코 친구로 남았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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