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사이에 사랑은 없었을지라도
20대 초반에 정말 다정다감 속의 이야기와 비슷한 상황이었던 날도 있었다. 지나고 보니 첫사랑이었던 남자아이와 내가 가장 친했던 친구, 제일 좋아하는 언니가 모였던 날. 셋 다 서로 잘 모르는 사이였지만 나의 친구라는 점 덕에 넷이서 모여 오후부터 밤늦게까지 같이 놀다가 헤어지기 아쉬워하며 돌아섰던 날. 모두 나를 위한 종합선물세트 같다며 모두에게 말했다. 행복한 기억이었다. 10년이 지난 후 언니에게 그날을 기억하냐고 하니 정말 좋았었다며 나만의 기억이 아니었다는 걸 확인받은 적도 있었다.
10화 - 예외종합선물세트
원이 이 모임에 합류하게 된 건 우연이었다. 같이 살던 친구와 친한 언니를 만나서 놀러 나가려고 한 날이었다. 연락이 닿았는데 마침 강남역과 가깝다고 해서 선약인 두 사람의 동의를 구했던 것이었다. 물론 친구와 언니는 내가 원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원이 어떤 사람인지 많이 궁금했던 것 같다.
우리 셋은 먼저 모였고 생각보다 늦어지는 바람에 지각을 한 한 원이 다소 후줄근한 상태로 나타났다. 전역한 지 채 세 달도 지나지 않아 밤송이 같은 머리로 비니를 푹 눌러쓴 채였다. 겨울이라 모두가 두꺼운 코트나 패딩인걸 감안해도 사실 너무 꾸며지지 않은 자연 상태였다. 전보다 많이 타고 거칠거칠한 피부와 피로감이 역력한 상태. 오기 쉬운 상황은 아니었을 텐데도 나는 그저 반가웠다. 2년 몇 개월 만에 보는 원의 얼굴이었다.
그렇게 넷이서 모여 저녁을 먹고 카페에 가서 한참 수다를 떨다가도 모두 집에 가기 아쉬워서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는 네 사람이 나란히 노래방에 가서 두 시간 반 가까이를 열창을 하고 가장 집이 먼 원의 막차가 끊길 때쯤에야 그날의 모임은 마무리되었다. 그날도 원은 델리스파이스의 항상 엔진을 켜둘께를 불렀다. 나는 그 옆모습을 보았다. 시간은 흘렀고 나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으니 전과 같은 마음일 수야 없었지만 남녀 사이가 아니라도 나에게 원은 소중하고 특별한 사람이었다.
전역 후, 원은 복학을 해서 학사 과정을 마무리 지으려고 바빠졌고 나 또한 여러 가지 알바를 하며 바쁘게 지냈다. 그러다 4학년 1학기를 마친 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 나 홍대 부근에서 주말마다 일을 하게 되었는데 친구랑 놀러 올래?
"술 못 마셔도 괜찮은 데야? 바 같은 데 가본 적이 별로 없어서."
- 응. 주로 외국 손님들이 와서 칵테일 마시고 춤추는 그런 웨스턴 클럽이야. 오면 칵테일 만들어주고 싶어서.
"오늘 가도 돼?"
- 주말 저녁은 조금 바쁘긴 하지만 응 괜찮아.
나는 친구와 함께 뭔가 새로운 상황에 들떠서 새로 산 원피스로 갈아입고 저녁이 되자마자 홍대로 갔다. 금요일 밤이라 그런지 외국인이 북적이는 클럽의 바에 원이 서 있었다. 그새 머리가 정말 많이 자라 내가 알던 모습과 가까워진 원은 한참 접객을 하다 나를 바라보고는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여기 앉아 있어. 친구 분은 칵테일 고르실 거죠?"
"네, 저는 블랙러시안으로 주세요."
"연이는 마시고 싶은 게 있어?"
"아니이, 나 아는 게 없어서 잘 모르겠어!"
"그럼 내가 알아서 가져올게."
다시 바로 돌아간 원이 조금 후에 돌아왔다. 친구가 시킨 블랙러시안과 함께 온 것은 깔루아 밀크였다. 바쁜 날이라 옆에 있어줄 수 없어서 미안하다던 원은 일하다 가끔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싱긋 웃어주었다. 나와 친구는 칵테일을 마시며 가지고 온 타로 카드를 펼치면서 수다를 떨다가 외국 여성분들이 기웃거려서 친구의 짤막한 즉석통역 아래 타로점을 봐주는 흔치 않은 경험을 했다. 우리는 점을 봐주었던 분들과 함께 프리스타일 춤을 추며 밤을 보냈다. 원이 한 잔 더 가져다준 논알코올 칵테일과 함께.
도파민이 넘치는 밤을 보내고 밖이 어슴푸레 해진 새벽이 되자 가게 마감 시간이 되었다. 원이 정리를 끝내고 마감을 할 동안 근처의 카페에 가있으라길래 친구와 바를 나왔다. 오랜만에 밤을 새우고 옷이나 신발이 그렇게 편했던 게 아니라서 카페에서 30분쯤 꾸벅꾸벅 졸고 있자 어쩐지 후련한 표정의 원이 왔다.
우리는 음료와 간단한 프레즐을 시켜서 그걸 먹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 대화 중 대부분은 내 남자친구의 이야기. 물론 내가 투덜거리는 이야기를 두 사람이 맞장구를 치거나 저런 저런 하며 들어주는 이야기였다. 문예창작과 정치외교학과를 다니는 두 사람은 유려한 언어들로 남자친구를 같이 성토해 주었다. 무려 세 시간 동안. 원래 첫 지하철을 기다린 것인데 어느덧 아침이 되었다.
"... 그래서 내가 얼마나 어이없었다고."
"그 사람이 예전부터 발상이 남다르게 독특한 분이긴 했지."
"세 시간을 이야기해도 끊임이 없는 게 마치 화수분 같아~"
"응! 게다가 그거 알아? 내 남자 친구는 원이 너 만나는 걸 제일 싫어하는 것 같더라."
"나를 왜?"
"흐음, 그건 지하 씨 입장에선 원이 씨를 이길 수가 없으니까요? 여러 의미로?"
"당연히 남자 친구의 영역이 있고 친구의 영역이 있는 건데 말이야. 그렇지? 지도 여자사람 친구가 한 트럭이면서. 난 하나뿐인데."
대화를 마치고 우리는 홍대역으로 같이 걸어가고 있었다. 월정기 행사처럼 발목을 접질렸다. 상습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에서조차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 휘청하는 나를 원이 잡아주더니 푸근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연이 넌 참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인 것 같아. 항상 누가 옆에서 챙겨줘야 할 것 같이. 천천히 걷자. 꼭 잡아."
조금 창피해하며 원의 팔뚝을 집게손으로 살짝 잡고 걸었다. 어쩐지 그날은 집에 가서도 그 웃는 얼굴이 생각났다.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라는 말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원이 무사히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하고 나도 일거리가 늘면서 또 한동안 볼 수 없었다. 나와 원의 관계란 그런 것이었다. 각자의 삶을 살다가 간혹 연락을 하면 반가운 사람. 그렇게 더 가끔 만나면 어제 만난 것 같은 사람.
- 주말에 시간 괜찮아? 을지로에 우동 맛집이 있는데 같이 갈래?
"응! 좋아. 그럼 주말에 봐."
마침 밸런타인 시즌이었기 때문에 나는 초콜릿을 하나 준비했다. 해마다 수제 초콜릿을 만들곤 했지만 원에게는 그런 게 오히려 부담이 될 것 같아서 공정무역 초콜릿 세트를 샀다. 2월의 을지로에서 원을 만났다. 검은 코트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원과 꽤나 오래 자리를 지킨듯한 우동집에 들어가서 카레와 우동을 주문해 나란히 앉아 나눠먹었다. 원과의 만남은 늘 그랬다. 평범하지만 흔하지 않은 느낌. 밥을 먹고 나와서 명동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아, 혹시 명동성당 가본 적 있어?"
"아니! 그냥 어릴 적부터 치외법권이다 그런 것만 생각 나!"
"사실 우리 친척 분이 수녀님이셔. 그래서 나는 성당을 자주 갔었어. 마음이 소란스러울 때 가면 차분해지거든. 여기서 멀지 않으니까 같이 가볼래?"
"나 성당도 처음 가봐! 그래 가자!"
명보 아트홀에서 길을 건너 조금 걸으니 금방 명동성당이 보였다. 쌀쌀한 2월의 날씨지만 이른 오후의 볕이 따스했다. 성당 길을 걸으며 수녀님이시라는 친척분과 어릴 적의 에피소드에 대해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다 원이 이끄는 대로 작은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뭐든 좋으니까 눈을 감고 기도해 봐. 형식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마침 비어있었던 예배당에 나란히 앉아 속살거리는 원의 목소리에 눈을 감고 내 두 손을 마주 잡고 나는 잠시 기도를 했다. 별 다른 내용은 없었다. 아마 내게 찾아오는 고난들이 조금은 평온하길, 그리고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 건강하고 평화롭길 빌었던 것 같다. 원 역시 그 안에 있었다.
'다 빌었어?'
'응응. 내용은 비밀.'
'항상 힘들어했잖아. 그래서 네 마음이 좀 편안해졌으면 해서 같이 와보고 싶었어. 이렇게 와볼 줄은 몰랐지만.'
"이곳에서는 정숙해주세요."
둘이 속살거리는 동안 어느새 들어오신 다른 분에게 주의를 받았다. 우리는 빠르게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예배당에서 나왔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빠른 걸음으로 명동성당을 벗어나서 근처의 스타벅스로 갔다.
"밸런타인 시즌이라 우정 초콜릿을 가져왔습니다."
"아, 고마워. 공정무역 초콜릿이네? 잘 먹을게. 그리고 나도 줄 것이 있어. 별 건 아니지만."
원은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냈다. 교보문고 종이 포장지에 단단하게 밀봉되어 있는 책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집에 가서 찬찬히 살펴보라는 말에 고맙다는 말 외엔 할 수 없었다. 카페에 들어온 지 겨우 한 시간 만에 급히 일을 하러 가야 해서 먼저 일어서야 했다.
"오늘 재밌었어. 가락국수도 맛있었고 성당도 처음 가봤고. 그럼 또 만나. 집에 가서 책 꼭 읽어볼게."
"응, 우리 또 보자."
집에 와서 열어 본 원의 선물은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었다. 그리고 그 안엔 작은 곰인형이 그려진 카드도 들어 있었다. 10여 년이 넘게 소중히 보관해 왔지만 여러 번 이사를 하는 동안 결국은 잃어버린 카드의 내용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마지막 글귀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 언젠가 우리 어디서 또다시 만나.
5년 전, 원을 마지막으로 만났던 내 생일. 원이 주었던 편지는 잃어버리지 않아서 다행이다. 지금 맞춤법 검사를 켜도 고칠 곳이 한 군데도 없는 원의 편지. 그런 너를 정말 좋아했었어.
연에게
네게 편지를 쓰는 것도 오랜만이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였으니까 못해도 12~13년쯤 전이겠지. 그 사이에 많다면 많은 변화가 있었어.
오랜만에 연락하고 생일도 함께 보자는 말에 조금 놀라기도 했고. 내가 내 생일도 잘 안 챙겨서 그러는가 보다.
이젠 더 자유롭게 홀가분하면 좋겠어, 네가. 오랫동안 가족과 힘들어했던(또는 힘들어했을 거라고) 기억하고 있어서. 지난번에 보았을 때는 여전히 건강해 보여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생일 축하해! 대면해서 축하한다고 말하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그런데 편지 쓰는 내 손은 여전히 악필이고.
항상 건강하고 원하는 것 많이 이루며 살아가길 바라. 상투적인 기원이지만 너무 희귀하기 때문에 자꾸만 바라는가 봐.
너의 지금과 앞날에 항상 좋은 사람들이 함께 하기를.
2019.8.10 원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