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너와 나 사이엔 무엇이 있었을까?
또 한 해가 지났다. 나는 원을 대신해 만났던 남자친구의 군생활을 기다려주었다. 하지만 700일의 기다림이 무색하게도 전역한 지 채 2개월이 지나지 않은 크리스마스 날 별 것 아닌 다툼으로 남자친구는 잠수를 타버렸다. 2010년 1월 1일이 천일이었던 만남이었다. 이미 한번 헤어졌다가 재회하면서 나는 많은 후회를 했었다. 몸은 내 옆에 있어도 그 눈 속에는 내가 없었다.
한 때 우리는 서로의 정답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때는 맞고 지금은 다른 것이 연애니까. 그래서 이번엔 정말로 이별이겠구나 하면서도 내심 연락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언제나 비슷한 패턴으로 크리스마스와 새해 인사를 하며 오랜만에 연락을 주고받은 나와 원. 새해부터 내가 우울해 보였는지 원은 일단 나오라며 내게 기분전환을 하자고 했다. 누굴 만날 기분은 아니었지만 원과의 만남은 항상 좋은 기억뿐이라 나는 그러겠다고 답했다.
이틀 뒤, 원과 인사동에서 만났다. 눈이 꽤 많이 내린 이후라 따듯한 걸 먹이겠다며 데려가 준 명동 칼국수에서 만두와 칼국수를 나눠먹고 옛날 물건들이 가득한 골동품 가게에 들러 그걸 구경하기도 했다. 눈이 내린 뒤라 쌀쌀하긴 했지만 바람조차 완전히 그친 초저녁이라 발 밑만 조심한다면 걸을만했다.
"쌈지길 가본 적 있어?"
"아니? 이야기만 들어보고 이 쪽은 거의 와본 적이 없어서."
"그럼 가자. 특별한 게 있는 건 아닌데 구조가 좀 특이해서 한 번쯤은 가볼 만 해."
"응."
기분 좋은 저녁이었다. 천천히 걸으며 스몰톡을 하며 걸었다. 나는 재잘거리고 언제나처럼 원은 나직하게 그런 내 이야기를 받아주었다. 쌈지길에 도착해서 올라가려는 순간 갑자기 발이 미끌려서 넘어지려는 순간, 원이 내 손을 잡았다.
"아얏!"
"괜찮아?"
"아, 응. 덕분에! 넘어지지 않아서. 앗! 미안."
친구끼리는 손도 잡으면 안 된다는 말이 생각나서 퍼뜩 사과를 하고 원의 손을 놓으려고 하자 원이 힘을 주어 내 손을 더 꽉 잡으며 말했다.
"그냥 잡고 있어."
처음 보는 모습. 원은 카멜색 코트 주머니 속으로 깍지를 낀 내 손을 집어넣었다. 원은 손은 부드럽지만 필기구로 인한 옅은 굳은살이 있었고 따듯했다.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우스운 건 손 잡는 걸 좋아하는 내게 원의 손을 잡았다는 사실 자체가 행운이라며, 계 탔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점. 우리는 그렇게 손을 잡고 쌈지길을 한 바퀴 걸어 올랐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누나가 있어. 두세 살 정도 차이인데. 잘 안되네."
"어? 정말? 네가 그런 이야기하는 거 처음 들어. 왜 잘 안 되는 거야? 너 좋은 사람인데."
"글쎄... 잘 전해지지 않나 봐. 그래서 마음을 정리해야 하나 싶어."
"힘 내. 너는 내가 아는 남자 중에 제일 좋은 남자야. 정말이야. 그 사람에게 꼭 너의 마음이 전해지길 바랄게."
"고마워."
원은 해사하게 웃었다. 서늘한 겨울밤의 온도에도 뺨은 붉어졌다. 쌈지길을 한 바퀴 모두 돌고 북촌한옥마을까지 우리는 세 시간 넘게 걸었다. 여전히 원의 코트 속에서 손을 잡은 채로. 나는 잠수를 탄 남자친구의 험담을 하기에 바빴고 원은 언제나처럼 내 편을 들어주었다. 코트 속의 몸이 차가워질 무렵 우리는 스타벅스에 들어갔고 뜨거운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졌다. 서로의 사랑과 안녕을 응원하며.
인사동에서 만난 이후로 원을 다시 만난 것은 3년이 훌쩍 지난 후였다. 누가 먼저 연락했던 건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원이 내 쪽으로 와주었다. 몇 년 만의 만남에도 여전히 어제 본 것처럼 나와 원은 편안했다. 3년 치 생일선물 대신 기초화장품 세트를 건넸다. 원은 고맙게 받으며 밥을 사겠다고 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으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답하는 시간을 지나 원이 말했다.
"결혼을 해야 하나 싶어."
"여자친구 분이랑?"
"응. 사귄 지 얼마 안 되어서 어쩌다 보니 같이 지내게 되었고 그게 벌써 3년이 지나서 가끔 이야기가 나와. 사실 나는 결혼에 뜻이 없었거든. 그래서 고민이야. 넌?"
"나도 만나는 사람이 있어. 그냥저냥 지내."
나는 이 말을 평생을 두고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 채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원의 말에 마음이 철렁했던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더 활짝 웃었다. 내게 그런 사람은 없었다.
"그렇구나. 이대로 여자친구를 기다리게 하는 게 맞는 건지. 아직 난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그래도 너는 좋은 남편이 될 거라고 생각해. 잘 생각해 봐. 그분 많이 좋아하는 거 아냐? 전에 말했던 그 사람이야?"
"아니, 그 사람은 아냐."
원은 좋아하는 게 아니냐는 내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조금 서글프게 웃었다. 마치 말려달라는 것만 같았지만 나는 오히려 결혼을 망설이는 원에게 격려를 잔뜩 주었다. 다시 한번 내 마음을 들키게 되면 친구로도 있을 수 없을 테니까. 밥을 먹은 뒤 차를 마시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또 묻다가 헤어졌다. 다음번 만남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들었다.
시간이 흘러 그로부터 다시 3년. 1월은 새해인사와 함께 몇 년 만의 원의 생일 안부를 물었다. 이제 어느 정도 일에서 자리를 잡아 잘 지내고 있다던 원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아 참, 나 1년 반 전에 결혼했어.'
'아, 그래? 축하해. 그래도 그때 이야기 해주지. 참석은 못해도 축하해 줬을 텐데 서운하다.'
'그냥 가족들끼리 조용히 식 올린 거라 고향 친구 몇몇에게만 이야기했어. 미안.'
'아냐, 미안한 일은 아니지. 그래도 좋은 일인데 축하를 못해줬다는 게 아쉬워서 그래.'
'지금 축하해 줬잖아. 고마워.'
그 후의 이야기들은 사실 정신이 없어서 적당히 리액션을 하다가 끝이 났다. 이제 원이 기혼자가 되었으니 우리 사이가 어떻든 간에 연락을 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친구라고 해도 부인의 입장에서는 좋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10년도 넘은 친구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원의 결혼 소식을 축하하면서도 마음이 먹먹해져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는 새벽 3시까지 잠 못 이루다가 종이를 꺼내 글을 써 내렸다.
지금 바로 이런 날들에는 내가 비혼주의자라는 것이 내게 역설적으로 위로가 된다.
한 때, 고작 손을 잡은 것에 기뻐하며 내 마음속에서 10년쯤 친구와 이성을 오가던 그가 사실은 한 2년 전쯤 결혼을 했었다는 소식에도 하하 웃으며 넘길 수 있는 것이.
이제 우리 나이가 그쯤 되었으니 그 역시 누군가의 남편이 되어 나를 반하게 한 아이같이 웃는 그 얼굴로 솜털도 채 마르지 않은 어린아이를 안아 올리는 상상을 한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게 되면 나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기로 했으니 그의 삶이 나와 분리되는 것이 당연해지고 안도하고 마는 것이다. 내가 비혼이라는 것이.
누군가의 아내와 엄마이기 이전에 나는 죽을 때까지 나로 살 것이다. 앞으로 그래왔던 것처럼. 다행이다, 다행이다.
역설적이게도 그 순간, 아주 오랫동안 정의 내릴 수 없었던 내 마음을 알 수가 있었다. 그가 나의 첫사랑이라는 것을. 그렇다고 한 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그럼에도 다행이라며 울음을 삼킬 수가 있었다. 원이 원하는 것은 만약 나에게 왔더라도 내가 줄 수 없었던 것이니까. 나는 나로 살아가기로 했으니까.
(길었던 외전의 마지막 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