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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초록 Aug 31. 2024

인수인계 잔혹사

두 사람의 사랑을 받으면서 누구의 남자도 아니었던 너에게

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일은 사실 무척 어려웠다. 1년가량을 나는 어느 겨울밤의 길거리 속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없었던 일이 되진 않았지만 멈춰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고 11월의 밤에서 걸어 나왔기에 그 겨울의 잔혹사를 기록하기로 한다.


헤어진 지도 반년 남짓. 나와 그의 기묘한 관계는 계속되었다. 적어도 2~3주의 한 번은 같은 침대에서 잠이 들고 이슈가 생기면 조금 더 자주 빈번히 얼굴을 보았다. 달리 하는 건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일이 끝난 그가 찾아오고 너무 늦은 새벽이 되기 전에 같이 누웠다. 가끔은 옥상으로 올라가 덧없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더 가끔은 잠든 그의 손아귀 사이에 내 손을 살며시 쥐어놓고 잠에 들었다. 그리고 더욱 자주 일이 끝난 그와 통화를 했다.


우리는 통화를 참 많이 하던 연인이었다. 일하는 시간대가 달랐던 만큼 틈만 나면 잠시라도 목소리를 듣고 그 틈이 여유로울 땐 몇 시간씩 통화를 했었다. 뭔가 긴 대화가 이어지기도 하고 때론 각자 다른 것을 하면서도 ASMR처럼 시간을 보냈었다.


그래 12월 8일에서 9일로 넘어가던 그 새벽, 그날은 통화가 길어진 날이었다. 일이 끝나고 퇴근한 그와 통화를 하며 조금은 우리가 연인이었던 그 순간 같은 이야기 중이었다. 내가 우연히 어떤 SNS를 보기 전까지는.



어쩌다가 알고리즘에 배치된 것인지 그의 여자사람 친구의 SNS가 보였다. 나와 사이가 좋지 않았음에도 그가 애지중지하던 그런 여자애였다. 생각 없이 피드를 찬찬히 내려보다가 나는 칵테일잔이 놓인 사진들을 보게 되었다. 그 사진 속에는 누구도 등장하지 않고 두 개의 잔이 보일 뿐이었지만 나는 글 속의 낯선 닉네임에서 어쩐지 폐부를 찌르는 통증을 느꼈다. 마음이 철렁했다. SNS의 팔로우 리스트를 급하게 스캔했다. 그리고 같은 닉네임을 발견했다.


내 계정은 차단되어 있었다. 불안은 확신이 되었다. 나는 비어있는 다른 계정으로 접속해 그 계정에 다시 들어갔다. 사진 한 장, 글 한 조각만 보아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당연했다. 나는 그림자 하나만으로도 너를 알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 계정의 바이오에는 낯익은 다른 계정명이 쓰여있었다. 맥이 탁 풀렸지만 링크를 클릭했다.


얼굴은 나오지 않았지만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한 남녀가 커플 잠옷을 입은 채 침구 위에 누워서 찍었을 두 손이 보였다. 그리고 그 침구는 나와 내 고양이와 그가 함께 뒹굴다 잠들던, 그 곰인형 같아 그가 가장 좋아하던, 그의 생일에 내가 한 품에 안아 들고 찾아가 내 손으로 직접 깔아놓고 온 그 침구였다. 머릿속으로는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진을 보는 순간 견딜 수가 없었다.


    "...? 자?"

    "아니."

    "말이 없길래 갑자기."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잔잔한 행복을 느끼던 나를 지옥으로 떨어트려놓고도 천연한 그 목소리. 나는 나를 제어할 수가 없었다.


    "너, 연애하니?"

    "무슨 소리야 그게?"

    "네 계정을 봤어. 날 차단해 놓은 그 계정."


나는 피드 속의 글을 하나씩 내려보며 담담히 그걸 읽었고 그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이 계정의 주인이 너라는 증거. 그럴 때마다 그는 언성을 높였다.


    "책임질 수 있어? 후회 안 해?"

    "책임 질 일도 아니고 후회할 일도 아닌 것 같아."


대화는 겉돌았다. 나는 거침없이 계속 피드를 읽어 내려갔고 나에게 위협을 하듯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말하면서도 전화를 끊지 못하는 그가 우스웠다. 통화는 네 시간이 넘어가고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점점 마음이 차갑게 얼어붙을 뿐이었다. 그가 나의 남자친구가 아니니까 내가 무어라 말을 할 수 없는 상황만이 비참할 따름이었다.


결국 둘 다 완전히 지쳐버렸고 약 1시간가량은 힘없는 말만 되풀이할 뿐 제대로 된 대화는 되지 않았다. 시간은 금요일 새벽, 두 사람 다 출근을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일어나야 할 시간으로부터 1시간 남짓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심장이 정말 미친 듯이 뛰었다. 하지만 나는 사회생활 중인 직장인이었고 입사한 지 두 달도 되지 않은 회사에 지장을 없었다. 억지로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았다. 30분 정도 눈을 감고 있다가 그대로 출근을 했다.



2시간가량 조기출근을 해서 일을 하는 동안 심박은 계속해서 올라갔고 체온도 함께 올랐다. 점심쯤엔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아 밥을 먹으러 가지 않고 엎드려서 나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 그 여자의 계정은 잠겨 있었기 때문에 나와 공통의 팔로워를 찾아 디엠을 보냈고 잠시라도 좋으니 디엠을 전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부탁받은 사람은 많이 어려워했지만 내가 간절해 보인 탓인지 연락이 닿도록 도와주었다.


오후 4시가량, 더 이상 업무를 진행하기 어려운 컨디션이 되고 공황의 전조가 보일 때쯤 낯선 톡이 왔다. 그녀였다.


    '안녕하세요, 유의 여자친구 분이신가요? 저는 전 여자친구입니다.'


나는 그녀에게 인사했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우리가 1년 반 가까이 만나왔다는 것부터 두 사람을 훼방 놓고 싶어서가 아니라는 진심과 함께 그럼에도 당신이 알아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을. 나와 그의 관계가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았고 그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모르지만 알고는 계셔야 할 것 같았다는 말을 전했다. 내가 어떤 식으로 매너 있게 이야기하고 진심만을 말한다 한들 곱게 들릴 리 없는 그 이야기를 그녀는 제법 침착하게 들었고 가끔씩 질문을 하거나 그와의 일화를 이야기했다.


    '저는 늘 유에게 흘러가라고 말했어요. 고이지 말고 흘러가라고. 너를 사랑해 주는 여잘 만나라고.'

    '저와 비슷한 말을 하셨군요. 저도 제가 해줄 수 없는 걸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길 바란다고 했었어요.'

    '귀엽지 않아요? 그런 말 들을 때마다 질색하면서 부정하는 거.'

    '저는 마음이 아팠는걸요.'


그녀는 몹시 특이한 사람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그를 부서트리고 다시 고쳐놓고 싶어 했다. 손대면 깨어질세라 그를 품에 안아온 나와는 다른 사람이었지만 사실 우리는 본질적으로 같았다. 그의 무구한 점을 기꺼워했으며 서투르고 어설픈 점을 사랑했다.


만약 이렇게 얽히지 않았으면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동의했다. 우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그의 숨겨진 애틋하고 아름다운 면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한들 현재의 모습은 두 사람을 두고 저울질을 한 나쁜 자식에 불과했지만.



대화가 1시간쯤 이어지자 사실 그렇다한들 자신이 만나는 사람보다 나를 더 믿을 수는 없으니 이 톡에 그를 초대하자고 말했고 나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수긍했다. 그는 이런 일을 몹시 싫어할만한 사람이었지만 자초한 일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퇴근 시간쯤 되었을 때 둘만 있던 톡에 그가 초대되었다. 나는 잠시 말을 골랐다. 사실 이런 상황을 바라진 않았으니까.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무슨 일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는 건가?'

    '어서 와, 유.'



그가 참여하기 전 1시간의 대화 동안 그녀에게 전해 받았던 사진 속의 그는 정말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나는 저 얼굴을 너무도 잘 안다. 사랑에 빠진 너의 얼굴. 좋아 보였다. 비슷한 또래에 서로 닮은 정서의 결의 가졌을 것이 분명한 두 사람.


나는 너무 크고 무거워 네 품에 겨우 담기는데 그녀는 작고 마르고 어려서 너의 안에 가볍게 안기겠지. 직업도 집안도 나보다는 좋을 것이 분명했다. 가난한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마음 밖에 없었다. 그런 네가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후회를 했던 첫사랑의 기억처럼 나는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도 해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게 무력했다.


냉소적이고 차가운 말투로 나를 성토하는 그를 모르는 척하고 나는 그녀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조롱과 멸시와 어쩌다가 한 남자를 동시에 사랑하게 된 두 여자의 대화는 제법 신랄했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미묘한 신경전이 오가다가 적당히 중단되었다.



나는 푹 익어버린 파김치처럼 다 쉬어선 퇴근 버스에 올랐다. 몸을 가눌만한 힘조차 없어 집으로 가는 지선 버스의 창에 머릴 기대고 눈물도 메마른 채 그저 실려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겨우 패딩만 벗고 침대에 그대로 쓰러지듯 누웠다. 그대로 쓰러진 듯 자고 싶었다. 그때 바로 톡 알림음이 들렸다.


    '유의 집, 어딘지 알고 계시나요?'


그녀였다. 당연히 안다고 말했다.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멋대로 찾아가진 않더라도 나는 그 집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우리 만나요. 지금 출발하면 몇 시까지 올 수 있어요?'

    '... 1시간쯤 걸려요.'

    '저도 지금 출발할게요. 그럼 거기서 봐요.'


대체 무슨 이야길 하고 싶은 건지 사실 짐작조차 들지 않았다. 나는 거의 45시간째 깨어 있었고 한 번씩 공황의 증조와 함께 체온이 급상승해서 가쁜 숨을 쉬었다. 산소가 부족한 어항 밖의 금붕어처럼 밭은 숨을 내뱉으며 지선버스에서 영등포로 가 광역버스를 갈아타고 그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



12월의 밤, 그의 집에서 5분 거리의 인적이 드문 가로등 밑에 빈티지한 패턴의 니트 카디건을 입은 긴 머리의 여자가 보였다. 나보다 9살이나 어린 그녀는 고데기로 곱게 펴 찰랑이는 검고 긴 생머리와 눈 밑에 눈물처럼 반짝이는 글리터를 바르고 물기가 묻어 나올 것 같은 글로시한 립을 완벽하게 바른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오른쪽 어깨엔 명품을 잘 모르는 나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명징한 프라다의 장식이 달린 가방을 메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형편없이 퉁퉁 붓고 거무죽죽한 얼굴로 산 지 3년도 넘게 지나서 낡은 분홍색 패딩을 입고 한껏 지친 채 겨우 서 있을 뿐이었다. 이 것이 하나의 무대라면 누가 주인공인지는 분명했다. 우리는 가볍게 서로에게 목례를 하고 그의 집으로 걸어갔다.


찬 기가 도는 안방에 함께 들어와 매트리스에 조금 떨어져 걸터앉았다. 다소 엉망인 방에는 내가 사준 물건들이 절반도 넘게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집 구석구석이 나의 흔적들이었다. 심지어 그녀와 내가 앉아 있는 매트리스와 침구들 마저. 나는 침구를 손으로 쓸며 쓸쓸하게 말했다.


    "이 침구 꽤 폭신하죠?"

    "네, 맞아요. 생각보다 편안해서 꽤 잠을 잘 잤어요."

    "매트리스도 괜찮지 않았어요? 저희 집에 있는 거랑 같은 거로 샀거든요. 가끔 놀러 온 제 친구들도 좋다고들 말하던 침대예요."


책상 위에 있는 향수병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이 향수는 어땠어요? 마음에 들었어요? 제가 쓰던 건데 유에게 더 잘 어울려서 준거거든요. 어울렸죠?"

    "..."


그때 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들뜬 발걸음의 그가 방으로 들어서다 침대에 앉은 나를 보고 얼어붙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내 놀란 눈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네가 왜 여기 있냐는 힐난의 눈.


    "안녕, 자기."


-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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