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은 너와 나에게도 잔인하고 두려운 곳이니까
"선을 넘어도 한참을 넘었어."
"응, 알아. 그리고 이 장면은 네가 만든 거고."
"둘 다 나더러 다른 사람 만나라고 했잖아? 여자친구도 아니었고."
"그래. 그건 진심이었어. 내가 못해주는 걸 이루어 줄 사람 만나길 바란거지."
"그런데 정말 이딴 식으로 행동했어야 했나?"
"그러게 최소한 내가 미친 짓 하게 만들진 말았어야지."
그의 계속되는 비난도 내게는 그다지 타격이 없었다. 사랑하니까, 잃지 않기 위해서 눈치를 보고 맞춰왔었고 더 사랑하는 자가 약자이기 때문에 져왔을 뿐 나는 더 이상 질 생각이 없었다. 사랑이란 게 이기고 지는 전쟁이나 게임이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유야, 나 만나면 하고 싶은 말 많았다며? 지금 해 줘."
"..."
"이야기 안 해 줄 거야? 말해 봐. 다 들어줄게."
그녀는 부드럽게 그를 채근했다. 원래 이 자리는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어서 사랑의 밀어라도 속삭일 예정이었는지 채근은 이어졌다. 나는 이 어이없는 장면에 앉아있는 나 자신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나를 만나면서 뭘 배운 거야? 최소한 나를 만나는 동안에 뭐라도 배웠어야지. 내가 널 이렇게 가르치던? 한 사람도 제대로 건사 못하면서 둘이나...? 하."
한 마디쯤 반박할 줄 알았지만 그는 답이 없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은 건지 몸을 가늘게 떨었다. 떠는 그를 보고 그녀가 다가가 괜찮으냐며 팔을 감싸 쥐었다.
"만지지 말고 그냥 두세요. 공황 전조 증상이니까 만지지 마요."
물론 그녀는 나의 충고를 듣지 않았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어차피 여기까지 와서 내가 못 할 말은 없었다. 나는 그간 마음에 담아 둔 말을 조금씩 토해냈다. 너를 좋아한다는 그 감정 하나로 너는 나를 이렇게까지 막대해선 안 되는 거였다고. 그 감정이 사라지면 우리를 가르는 우열관계 같은 건 없는 거라고. 너는 이토록 나를 존중하지 않았다고.
거의 1시간 반이 지날 동안 그는 말이 없었다. 그녀도 어느샌가부터 말이 없었고 이내 가방을 둘러메고 일어섰다.
"이제 전 가볼게요."
"가려면 불청객인 제가 가야죠. 왜 일어서세요?"
"이 정도면 충분히 대답을 들은 것 같아요. 그리고 정리하려고 온 거예요. 유를 부탁해요."
"그건 제가 드리려던 말이었어요."
그토록 만지고 싶었던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하라고 잡으라고 했지만 그는 내 손길을 피하지도 그녀를 잡지도 않았다.
"ㅎㅎ... 가는 길에 둘이서만 이야기해도 괜찮으실까요?"
"네. 그러세요."
나는 두 사람이 일어나서 나간 후에도 매트리스에 여전히 걸터앉아 있었다. 친구에게 톡을 했더니 친구는 길길이 화를 내며 왜 언니가 거기 있어야 하냐며 당장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가라고 했다. 그것도 맞는 말이라 15분 정도 힘들 게 이어왔을 일상의 흔적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다가 슬픈 마음이 들 때쯤 일어섰다.
집 앞 골목의 의류 수거함에 내팽개치듯 버려진 문제의 잠옷이 보였다. 내가 그의 잠옷을 끌어안고 울던 시간들이 생각나서 잠옷을 주워 그의 방에 다시 가져다 놓고 허한 마음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다소 외진 동네였고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 그랬던지 택시가 잡히지 않아 기다리고 있던 두 사람과 마주쳤다. 그렇게 민망할 수가 없었다.
"아, 전 가볼게요. 잘 지내요."
한껏 산뜻한 얼굴로 그녀는 나를 보고 팔을 휘두르며 인사를 하고 마침 도착한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이 수척해진 그만이 택시가 떠난 자리에 힘없이 서 있었다. 그 꼴이 꼭 바람 빠진 풍선인형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의 앞에 정면으로 섰다. 바라본 그의 눈빛은 세차게 떨리고 있었다.
"가게...?"
"갈까?"
길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나와 그 사이엔 뜻이 통했다. 이대로면 나와도 더 이상 만나게 될 일이 없을 것이다. 고개를 숙인 채 잘게 떠는 몸. 나는 그 침묵을 느긋하게 기다려주었다. 12월의 추위 속에서 부르튼 입술이 달싹거리다가 기어들어간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들어가자..."
우리는 천천히 걸어 다시 그 방으로 돌아왔다. 거리를 두어 옆에 앉은 채로 1시간가량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보통 답답함을 가져온다고 해도 그 순간은 침묵 자체가 대화였다.
한참의 침묵 이후에 그는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정말 미친 게 아닐까 혼자 생각하던 중에 그가 말했다.
"정말, 연 너다워. 정말."
"무슨 의민데 그거?"
"방법은 한참이나 잘못되긴 했는데, 그게 잘했다는 건 아닌데, 마음이 편해졌어, 가벼워졌어."
"지금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오는구나."
정말 시원하게 웃는 그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나는 사실 그때까지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두 사람은 서로 좋아하는 눈치였고 나는 전 여자 친구일 뿐이었다. 어쩌다 보니 깽판을 놓은 꼴이었고 믿어주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인수인계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마치 왁스의 노래 부탁해요 처럼. 다만 내 방식이 너무 날 것으로 나긋하고 우아하지 못했던 것뿐이다.
"집에 가자. 오늘은 여기 있고 싶지 않아."
"그래."
택시를 부르고 한참을 기다려 나와 그는 내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한참 늦은 새벽이어서 옷을 갈아입고 간단하게 씻고 금방 잠에 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나의 것이 아닌 톡 알림음이 울렸다. 감전당한 사람 마냥 벌떡 일어난 그는 내용을 확인하더니 다급하게 옷을 챙겨 입었다. 영문을 알 도리가 없이 그 모양을 지켜보고 있자니 무엇엔가 쫓기듯 나중에 연락할게 하며 나가버렸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었지만 잠이 깬 김에 집안일을 돌보는 동안 나에게도 톡이 왔다. 그녀였다.
- 잠시 유 좀 빌려갈게요. 괜찮죠?
스스로도 그렇게 말했고 뻔히 같이 있었을 것을 알면서도 이런 행동을 했다는 것이 자명했다. 그땐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기엔 나는 너무 무딘 상태였고 피로했다. 1시간 반의 침묵이 암묵적으로 그녀가 아닌 나를 택한 것이었듯이.
그의 출근 시간이 지나서야 두 사람 모두에게 연락이 왔다. 만남이 끝난 모양이었다. 그녀는 내게 크리스마스를 셋이 함께 보낼 것을 제안했다. 자신과 둘만 있을 때의 그가 아닌 다른 여자 앞에서의 그를 보고 싶다며. 굉장히 이질적인 이야기였지만 연달아 격정적인 나날들이어서 그랬는지 나는 쉬이 수용했다.
단 한 번도 1대 1 관계가 아닌 관계를 바란 적은 없었지만 최소한 그녀는 진심으로 그를 좋아하고 있었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잘 알아보지 못하는 그의 사랑스러운 점을 공통으로 알고 있었다. 그 기묘한 연대감으로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다자관계를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 후엔 그의 연락이었다.
- 제안을 수락했다고 들었어.
- 응. 당신이 먼저 그렇게 했다길래 원하는 걸 해주고 싶어서? 너 그 사람 좋아하잖아. 사랑하는 사람이 하고 싶은 걸 해주고 싶은 마음?
- 그걸 말이라고. 혹시 그 여자에게 협박이라도 당했어?
- 아니.
- 그럼 왜...?
불가해하다는 듯 그가 물었다. 나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필터링 없이 대답했다.
- 나는 내 연인을 타인과 공유하는 걸 절대 할 수 없는 사람이야. 너도 잘 알겠지? 하지만...
- 알지.
- 넌 내 남자친구가 아니니까.
-... 그래. 알았어.
저녁쯤에 다시 연락이 와서 정말 정리했다고 했다. 마음이 복잡했지만 결과론적으로는 내가 이긴 셈인가... 상처뿐인 영광 아닌 영광. 물론 그 과정이 그다지 깔끔하지 않았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고 그녀의 SNS에는 관련된 긴 글 타래가 올라왔다. 결국 수용받지 못한 애정과 결핍으로 점철된 글이었다. 자신에게 애정이 남아있다면 처절하게 상처받길 바라는 마음을 절제된 글에 눌러 담은 내용이었다.
나와 대화할 때도 말했고 그에게도 직접 말했던 것과 같은 말이 쓰여 있었다. 자신에게 고이지 말고 흘러가라고. 고이면 썩어갈 뿐이니까, 스쳐서 흘러 흘러 바다로 가라며. 그리고 내게 당부했던 말들이 생각났다. 끝까지 책임지고 사랑해 주시라며. 축복인 듯 저주인 듯 나에게 내리는 미션처럼.
이 이야기를 들은 내 친구는 셋 중에 가장 미친 사람이 나였다고 말했다. 그는 나쁜 놈인 거고 나는 광인이라며. 나를 그의 집으로 불러 낸 순간에도, 다음날 나와 있을 그를 불러낸 순간에도 그녀는 그가 자신을 택하길 바란 거라고. 자신의 상처가 너무 커서 언니와 그에게 상처 주고 싶었던 거라고.
나와 그는 그날 이후로 1주일쯤 지나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을 감내할 만큼 그때는 내 마음이 너무 크고 벅찼다.
나는 이 이후로도 글의 서두에서 말했듯이 아주 오래 이 일을 잊지 못했다. 계절이 여러 번 바뀌는 동안에도 나를 수도 없이 괴롭혔다. 겨우 그 겨울에서 벗어난 지금에도 우리가 싸우게 되면 이 이야기를 입에 올리게 된다. 그만큼 치명적인 상처였으니까.
새로 시작된 애정이 듬뿍 담겨 있던 너의 눈빛. 서늘한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아 데우던 모습. 거칠게 너를 윽박지르던 나와 달리 나긋하게 너의 이야기를 들어주겠다며 말해보라던, 그렇게 감싸던 그 목소리. 다시 내 품에 안겼다 한들 우리 사이에 사랑조차 들어설 빈틈이 없었던 그 나날과는 달랐다.
이래서 이미 깨어진 것을 붙인다는 것은 새로운 걸 시작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라고. 아무리 붙여봐도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 마음을 누군가에게 이해해 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가장 개인적인 서사. 이 선택을 함으로써 오는 모든 슬픔이나 고통도 온전히 나의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집이 되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Going Home의 가사처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는 햇살에 마음을 맡기고
나는 너의 일을 떠올리며 수많은 생각에 슬퍼진다
우리는 단지 내일의 일도 지금은 알 수가 없으니까
그저 너의 등을 감싸 안으며 다 잘될 거라고 말할 수밖에
더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을 것만 같아 초조해져
무거운 너의 어깨와 기나긴 하루하루가 안타까워
내일은 정말 좋은 일이 너에게 생기면 좋겠어
너에겐 자격이 있으니까
이제 짐을 벗고 행복해지길 나는 간절하게 소원해 본다
이 세상은 너와 나에게도 잔인하고 두려운 곳이니까
언제라도 여기로 돌아와 집이 있잖아 내가 있잖아
내일은 정말 좋은 일이 우리를 기다려 주기를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기를
가장 간절하게 바라던 일이 이뤄지기를 난 기도 해 본다
Going Home - 김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