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해 주던 너의 행복과 안녕을 기원하며
19년의 늦봄, 14년 만에 예전에 부동아리장이었던 문과 연락이 되었다. 본명이 조금 특이한 편이었고 예전에 등단을 했다는 것은 알고 있어서 가끔씩 책을 사보곤 했었는데 SNS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DM를 보냈는데 고맙게도 나를 기억해주고 있었다. 마침 그녀가 원을 기억하기도 할 뿐만이 아니라 우연히 일로도 엮인 적이 있었다는 알게 되어서 원까지 셋이서 만나기로 했다.
홍대역 7번 출구. 오랜만에 만나게 된 원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조금 살이 오르고 여유로운 느낌이었다. 약간의 일렁임을 반가움으로 누르고 우리는 카페로 이동했다. 곧 문이 도착했고 각자 음료를 마시며 우리가 20대 초반이었고 문이 고등학생이었던 그 과거의 시간들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내가 죽은 지 알았다고 말했다. 모든 일의 화근이던 전 남자 친구이라는 인간이 SNS에 내가 실종되었다고 글을 올렸던 탓이었다. 우리는 무사히 살아서 다시 만났다며 웃었다.
그 와중에 원피스에 음료를 쏟으니 넌 여전하구나 하면서 웃는 원. 사실 그런 것들을 기억하는 게 더 신기했지만. 그런 우리를 보던 문은 가늘게 뜬 눈으로 웃으며 말했다.
"연님과 원님은 여전하시네요. 분명 대화 내용을 들으면 아주 오랜만에 만나신 것 같은데... 또 분위기나 그런 걸 보면 자주 연락하고 지내신 것 같기도 하고. 예전에도 두 분이 친하셨었죠."
2시간쯤, 온갖 과거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동안 문의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지는 게 보여서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14년 만의 만남은 그렇게 2시간가량이었다. 이별하며 문이 나를 안았다. 다음에 다시 보자며. 내 기억 속 병약 미소녀는 전보다 조금 시니컬 해졌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따스했다.
그녀를 보내고 잠시 둘이 남게 되었지만 원의 다음 스케줄까지 어중간하게 뜨는 시간이 30분가량 생겼다. 이미 음료를 마시고 나오는 길이지만 원은 흑당 버블티를 마시고 싶다고 했고 한참 유명하던 프랜차이즈는 웨이팅 하는 사람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어서 우리는 다른 작은 가게를 검색해서 찾아갔다.
기본 밀크티를 한 잔씩 앞에 두고 셋이 있을 때보다 미묘하게 더 가까운 느낌의 원과의 담소. 원은 테이블 앞쪽으로 몸을 당겨 나를 보며 이런저런 이야길 했다.
"전에 선물해 준 로마사 논고 아직도 잘 가지고 있어."
"그래? 양장본이라 꽤 무서웠을 텐데 이사 다니는 동안에도 살아남았네."
"응. 여러 번 읽고 나서 최근엔 잘 읽진 않았지만 읽는 동안에 좋았어."
내가 원을 좋아했던 순간의 이야기 속에 사실은 아직도 말할 수 없는 말랑한 마음이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올해 네 생일에 연락을 안 한 게, 아무래도 신경 쓰였거든. 네가 전에 그랬잖아. 친구 사이엔 선이 있어야 해서 손도 잡으면 안 되고 어느 한쪽이라도 가정을 가지게 되면 그 선은 더더욱 중요하다고. 그래서 연락 못했어."
"내가 너무 무심했네. 결혼 이야기 늦게 해서 미안해. 그런데 친구 사이에 선이 있어서 손도 잡으면 안 된다는 말을 내가 했다고?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그거 미친놈이 한 소리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
"무심한 거 알면 가끔은 놀아줘. 너랑 노는 게 참 좋았거든. 가끔은 보자, 우리."
"그래. 아무래도 자주는 못 만나겠지만 알았어."
30분 만에 가겠다던 원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계를 가끔씩 들여다보면서도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은 눈치였다.
"너한테 차인 거만 생각하면 아직도 슬프거든?"
"그런 거 아니야. 정말 이건 알아줘."
"아니! 남자도 뻥- 차보라며 날 걷어찼으면서? 나에겐 네가 첫사랑 같은 거였다고."
"찬 적 없어. 정말이야."
놀리느라 텐션이 올라 짓궂게 구는 나에게 그는 정말로 서글픈 얼굴을 했다. 몇 번이고 그런 게 아니라며 그래도 상처가 되었다면 미안하다며. 그런 반응에 나는 아차 싶어서 빠르게 수습을 했다. 원을 정말 보내야 할 시간이 되었다. 같이 천천히 지하철역까지 걸어가서 서로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다음 날, 문에게서 연락이 왔다. 짧은 만남의 아쉬움을 서로 전하다가 의외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원이 나를 좋아했었다는 것. 아주 오래 지난 일이고 지금은 어떠한 의미도 없지만 나를 기다렸고 그 기다림을 끝냈었다는 거였다. 이미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과거의 한 부분이 아릿했다.
'왜 요새는 연애 안 해? 공백기 꽤 길지 않았어?'
'음... 누굴 만날 상황이 아닌 것 같아서.'
'그래도 헤어진 지 3년이나 되었잖아.'
"사실 내가 좋아하는 누나가 있어. 두세 살 정도 차이인데. 잘 안되네."
"어? 정말? 네가 그런 이야기하는 거 처음 들어. 왜 잘 안 되는 거야? 너 좋은 사람인데."
"글쎄... 잘 전해지지 않나 봐. 그래서 마음을 정리해야 하나 싶어."
"힘 내. 너는 내가 아는 남자 중에 제일 좋은 남자야. 정말이야. 그 사람에게 꼭 너의 마음이 전해지길 바랄게."
"고마워."
그 누나는 나였다. 내가 누나라는 말에 마음 저릿한 걸 스스로 아니라고 다독이는 동안 그 쌈지길 위에서 원은 깍지 낀 손으로 내게 그토록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던 것이다. 내가 잠수이별을 당하고 또 다른 사람과 만나게 될 즈음 3년의 공백을 끝내고 지금의 아내와 연애를 하게 되었던 것. 물론 나 하나만의 이유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다만 과거의 내가 어느 밤을 지새운 것처럼 원도 그랬을 거라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우리가 어쩌면 같은 아픔을 공유했을 거라는 것이. 추억은 힘이 없고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었다. 한때 아주 좁은 거리를 두고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평행선이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비스듬한 둔각을 이루어 우리가 한 때 서로 닿아있었고 스쳐 지나갔다는 걸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았을 뿐. 사랑이 타이밍이라고 누가 말했다. 나와 원은 이미 다른 시간선을 택했고 살아온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엄마의 아들은 내게 한심한 표정으로 핀잔을 주었다. 누나는 남의 연애사로 돈도 벌고 있는 사람이면서 왜 그걸 모르냐고. 군 복무 중인 정상적인 남자라면 당연히 누나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을 거라고 그래서 나가서 얼굴 보자고 한 것이었을 텐데 그것도 못 알아채냐고. 그랬다. 나는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한 사람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 해 생일엔 원을 만났다. 마침 토요일이라 내가 원을 살짝 졸랐다. 조금 의아해하면서도 흔쾌히 수락하는 원. 홍대역에서 내리자 먼저 도착한 원에게서 연락이 왔다. 역에서 조금 벗어나자 시원한 차림의 원이 웃으며 인사했다.
"일찍 왔네?"
"응. 나는 집이 가까우니까. 일찍 와서 주변에 뭐가 있는지랑 역에서부터 식당까지 경로 보고 있었어. 날이 더우니까 편한 길로 같이 와야겠다 하면서."
"여전히 세심한 사람 같으니라고."
"하하."
식당으로 가 음식을 시키고 잠깐 이야기를 나누자 원은 어깨에 메고 왔던 에코백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교보문고 띠지로 묶인 책이 살짝 볼록한 것이 원답게 편지 같은 걸 넣은 모양이었다.
"무슨 선물을 할까 하다가 역시 책인 것 같아서. 잘 읽었으면 좋겠어. 생일 축하해."
"선물까지 바란 건 아닌데 늘 고마워."
최근의 관심사나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식사를 마치고 식당 밖으로 나오니 꽤 햇빛이 뜨거웠다. 원은 책이 여러 권 들어있는 에코백에서 짙은 색의 양산을 꺼내 펼쳤다.
"날이 뜨거우니까 이거 쓰고 가자."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미리 봐둔 것인지 한 번도 망설이거나 고민하는 기색 없이 원이 이끄는 대로 카페에 들어갔다. 좁은 테이블에 마실 것 두 잔을 올려두고 계속되는 이야기.
"조금 있다가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할 것 같네."
"응? 토요일인데 회사에?"
"일이 그렇게 됐어. 오래 걸리는 건 아니고 회사가 여기서 걸어서 한 15분 이내면 가니까 잠깐 들렀다가 집에 가게. 자전거를 타면 금방이긴 해도 걸을만한 거리들이야."
"그럼 지금 가봐야 하는 건 아냐?"
"이야기할 시간 정도는 있지."
14년이란 시간은 아주 긴 시간이어서인지 같이 웃을 수 있는 예전 이야기는 아직도 많았다. 한참 이야기를 하다 폰을 살피는 원을 빤히 바라보자 원이 말했다.
"아, 짝지한테 연락이 와서. 저녁에 간단하게 데이트하기로 했어."
"짝지라니 호칭이 너무 정겹고 귀여운데?"
"음... 사실 나는 파트너라고 부르는 게 편한데 사람들이 그 말을 들으면 이상한 방식으로 오해해서 공식적인 자리에선 와이프라든가, 사적으로는 지금처럼 짝지라고 불러."
"왜?"
"내가 그다지 결혼에 뜻이 없었잖아. 와이프가 밀어붙였지. 그런데 오래 만났고 같이 지내왔고 그러다 보니 해야겠구나 싶어서 결혼을 해서 잘 지내고 있지만 아무래도 그 모든 걸 답습하고 싶은 마음은 아닌 것 같아. 넌?"
"알잖아 너도. 콩가루 집안에서 태어나서 그런 걸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거."
"그래. 넌 항상 가족 때문에 힘들어했던 게 기억나."
"그럼 아이 계획은 있어?"
"아니."
원은 굉장히 단호하게 딱 잘라 말했다.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나는 누군가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될 생각이 전혀 없어."
"그럼 아내분과 합의한 거야?"
"응. 처음 결혼할 때 딩크로 합의했고 지금도 아이를 키울 정도의 환경은 아니라고 생각해. 물론 나는 그럴 생각이 없고. 이제 30대 중반이 넘어가다 보니 가끔 와이프가 아이 이야길 꺼내긴 하는데 그럴 때마다 부드럽게 설득해서 더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게 하고 있어."
"그렇다면 아내분은 원하시는 거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서로 합의한 거고 나는 이 부분은 고수하고 싶어."
나는 사실 소름이 끼쳤다. 결혼관이나 자녀관 같은 것이 내 생각과 너무 비슷해서. 그리고 원의 아내에게 조금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아는 남자 중에 가장 다정하고 상냥한 남편을 만나서 가정을 이루는 데는 성공했지만 세상은 다 가질 수는 없는지 그녀가 꿈꿨을 행복한 가정에는 둘을 닮은 아이가 있겠지만 원의 행복에는 그렇지가 않은 점이.
그것이 내가 바라던 이상적인 결혼이라고 해도, 그녀가 바라던 이상적인 결혼이 아니라도 원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고 다정한 사람이니 아마 앞으로도 꽤 화목하게 잘 지낼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원은 틀림없이 자신의 가정을 잘 지켜나갈 것이다.
그날의 만남 이후로 나는 살아생전엔 되도록 원을 만나지 않기로 했다. 뭔가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만으로 죄가 될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원은 저 나름의 행복을 누리며 살 것이라 생각하니 그것으로도 괜찮았다. 진심으로 원의 행복을 기원하고 있다.
의미 없는 가정이지만 사람은 이미 지난 일에 대해서 후회를 할 수밖에 없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선을 한 번도 넘어보지 못한 것. 그것이 후회로 남았다. 물론 내가 그랬다고 해도 나와 원이 어떤 사이가 되었을지 그건 모르는 일이다. 우리는 어렸고 서툴렀고 조심스러웠다. 친구가 아니었더라면 까마득한 예전에 이미 남이 되었을 수도 있었겠지.
다만 나는 다음에도 누군가를 만나 다시 한번 시간선을 가로지르는 순간이 온다면 다시는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무얼 해도 후회라면 하지 못한 후회가 아니라 행하였기 때문에 오는 후회를 선택하겠다고. 그게 얼마나 힘든 길이든 내 의지를 관철하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다짐은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스무 살의 여름, 첫사랑을 만났다.
서른다섯 하고도 11월, 너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