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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초록 Sep 14. 2024

사랑이라 믿었던 것들은

우리는 시간을 더 해 깨진 것들을 이어 붙이려 애를 썼어

    "내 정실할래?"

    "그럼 측실도 있는 건가?"

  

가늘게 뜬 눈으로 유가 말했다. 명백히 나를 힐난하는 눈. 말문이 막혔지만 이제 와서 이 정도에 굴할 내가 아니다.


    "부인하라고 하면 싫어할 거잖아."

    "흐음..."

    "그럼, 내 거 할래?"

    "응."


우리는 그 반년의 공백을 덮고 다시 만나기로 했다. 최근에 왜 그러기로 한 거였냐고 물으니 그게 맞는 것 같았단다. 여전히 무드 없는 남자다. 아무튼 나는 우리 사이에 남은 감정의 잔여물이나 의혹을 전부 이야기하고 말끔하게 정리하고 싶었지만 유는 지독한 회피형 인간이었다.


인간의 방어기제에 3F가 있다. < Freeze, Fight, Flight >. 이 중에서 보통의 내가 싸우는 쪽을 선택한다면 그는 도망가기를 선택하는 사람인 것이다. 자신의 부끄러운 과오를 들추고 싶지 않고 현재 다시 만나기로 한 결과만을 가지고 없던 일로 하자고 말하며 감정 정리를 촉구하는 내 입을 틀어막았다. 당시엔 그를 다시 잃을까 두려워 나답지 않게 얼어버렸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다시 만나기로 한 그다음 날이 마침 한 달에 몇 번 없는 휴무였고 직장인인 내겐 일요일이어서 하루를 같이 보냈다. 새벽 늦게 잠들어서 느긋하게 늦잠을 자고 일어나 점심을 같이 자주 먹던 배달음식을 시켜 먹고 고양이와 함께 께느른한 시간을 보냈다.


모처럼 쉬는 날인데 영화라도 볼까 해서 잠시의 고민 끝에 한 편을 예매하고 저녁이 될 무렵 함께 나갔다. 상영시간까지 시간이 좀 비어서 새로 바꾼 폰의 케이스를 바꿔 커플 케이스를 맞추고 음료를 하나씩 사서 영화를 보러 갔다.


사극을 좋아하는 둘이서 고른 영화는 올빼미.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영화는 꽤 재미있었다. 시간대를 맞지 않아 변변찮은 데이트를 할 일이 거의 없었던 우리에게 영화란 비교적 손쉬운 데이트코스였다. 둘이서 도란도란 영화에 대한 감상을 나누며 불 꺼진 롯데시네마 건물을 천천히 내려왔다. 영등포역의 찬 공기가 훅 끼쳤다. 내 손이 차가워졌는지 그는 자신이 끼고 있던 장갑을 마주 잡고 있지 않던 나머지 손에 끼워주었다.


    "내가 정류장까지 데려다줄게."

    "기각."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 안 돼? 응?"

    "응. 안 돼. 시간이 늦었잖아. 자기도 집에 빨리 들어가야지.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


역시 감정에 호소하는 걸로는 넘어가주지 않는 유였다. 계속 조르는 내게 같은 대답을 하며 그는 나를 집에 가는 버스 정류장에 데려다주었다. 중앙 정류장에 서자 주변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귀갓길을 재촉하며 빼곡히 서있었다. 오랜만에 유와 꽉 채워 보낸 하루가 내 마음을 너무 벅차게 한 건지 버스를 기다리며 마주 보고 서서 이야기하는 동안 문득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훌쩍이다가 이내 코를 먹기 시작한 나를 보며 유가 말했다.


    "어디 가는 것도 아닌데 또 우네."

    "..."

    "이거 끼고 가. 나 일할 때 꼭 필요한 건데 주는 거야, 알지?"

    "자기는 뭐 쓰게..."

    "다음에 볼 때 돌려줘. 금방 갈게."


한 짝 밖에 남지 않았던 장갑을 벗어 쥐어주는 유를 보며 명치께에 꾹꾹 눌러 담았던 복잡하게 뒤섞인 감정이 터져버렸다.


    "사랑해."


그 반년 동안,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한 번도 할 수 없었던 말이었다. 나의 감정을 나타낸다는 말로 좋아한다는 말은 가끔 했었지만 사랑한다는 말로 그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늘 보고 싶다는 말로 치환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눌러 담았다가 눈물과 함께 터져버린 고백을 들은 유는 곤란하다는 듯 웃으며 나도 라고 답했다.


그동안 내가 무슨 감정표현을 하든 대답을 하지 않고 무응답이던 그였다. 반년만에 처음 들은 대답이 벅차고 지금 잡고 있는 손이 현실임을 깨닫게 해 주어 주변 시선을 신경 쓸 수도 없이 왈칵 눈물이 쏟아져서 마구 울었다.


    "버스 왔다. 어서 타."

    "갈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버스에 타서 자리에 앉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한 정거장을 채 지나기도 전이었다. 


    "지금이라도 내려서 뛰어가고 싶은 거 참고 있어."

    '나도 다음 버스 타고 따라갈까 했는데 참는 거야. 아까 말했잖아. 금방 내가 다시 갈게.'

    "응. 빨리 와."


버스에서 시작된 통화는 집으로 돌아와 서로가 잠들 무렵에나 끝이 났다. 이때의 우리에게는 다시 타오른 마음이 중요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새로이 시작되는 듯한 감각. 서로 잘 알지만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저물어버린 열정이 되살아나는 경험. 이 또한 다시 시간이 가면 금세 사그라들 것을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유를 사랑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는 이후로 더 자주 집에 왔고 그렇게 우리는 더 자주 시간을 보내고 입을 맞추고 서로를 끌어안고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각자의 삶을 살면서 자기 전이면 전화를 했다. 분리된 듯 밀착된 삶을 살면서 나는 깊게 파인 내 상처를 손으로 가렸지만 채 다 가려지지 않았다.


    "왜 또 지난 일을 꺼내는데?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잖아."

    "그때 잘 정리하고 넘어갔다면 나도 납득했을 거야, 그런데 아니잖아?"

    "지금 잘 지내면 되는 거 아냐?"


자신이 난처해지고 창피한 상황을 넘어가려고 하는 그 태도가 나에겐 트리거가 되었다. 우리가 헤어져 있을 때도 그랬다.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사실 서로에게 권한은 없었다. 도의적인 마음만 있을 뿐이다. 헤어짐이란 게 그런 거니까.


    "내가 그 일을 자기의 말대로 불문에 부치려고 노력해 온 건 나 역시 그 시간 동안 다른 사람을 만나보았기으니까! 물론 그래봤자 널 좋아한다는 것만 거 확연해졌어. 그러니 공백을 채우고 싶어서든, 외로워서든, 그게 아닌 이유라도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해. 그래서 이해 보려고 한 거지, 아무런 말 없이 없던 일로 덮을 순 없잖아."

    "다른... 사람을 만났었다... 그랬구나."


나의 말에 충격을 받은 것 같은 그의 얼굴. 이 사실을 밝힌 건 어느 정도 죄책감을 덜어주려는 시도였지만 내 의도가 어떠하든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관계의 진실이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다시 만난다는 건, 깨어진 걸 붙인다는 것은 어려운 것.


이 이후로도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우리는 대부분을 적당히 평온하게 보냈고 가끔 서로의 날카로운 말에 베였으며, 눈물이 없기로 정평이 나있는 나였지만 그의 앞에서는 울 일이 참으로 많았다. 나 자신의 아픔이나 고통보다는 그에 대한 연민으로 나오는 눈물이 대부분이었다.


헤어짐의 공백 같지 않은 공백 사이로 엉킨 섬유질들을 나는 다 긁어내지 못했고 그는 안에 무엇이 들어있든 그저 봉합해 버렸다. 나는 이럴 때마다 다시 12월의 어느 밤으로 돌아갔다. 앞이 보이지 않는 완벽한 어둠 속에 발치까지 쌓이는 하얀 눈에 얼어붙던 그 순간으로 몇 번이고 플래시 백을 경험하면서.


나는 가장 친한 친구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그의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건빵 속의 별사탕처럼 얼마 되지 않을 달디 단 부분을 살짝 내보이는 정도로 지내게 되었다. 더 이상 나와 유의 관계를 좋게 보는 사람은 없었고 나 역시도 내가 당사자가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임을 알기에 취한 행동이었다.


사랑이라 믿었던 것들은 어린 날의 미련일 뿐
미련이라 믿었던 것들은 피지 못한 필연일 뿐
필연이라 믿었던 것들은 지금 너와 나에 깃든
더 짙은 색으로 태어난 시련들의 시작일 뿐

시작이라 믿었던 것들은 끝의 예쁜 이름일 뿐
이름이라 믿었던 것들은 너의 작은 조각일 뿐
조각이라 믿었던 것들이 어쩌면 너의 전부
그 전부를 건넨 너를 사랑이라 믿었을 뿐

사랑이라 믿었던 것들은 - Big Naughty


작은 조각이라 믿었던 것들이 어쩌면 그의 전부라는 걸 알았기에, 그 전부를 건넌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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