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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초록 Sep 28. 2024

"그 누나랑 아무 일도 없었어."

중요한 건 관계의 유무가 아닌 걸 왜 모를까?

두괄식으로 시작해 보자. 그가 이미 찢겨 너덜너덜한 내 마음을 찢어버린 두 번째 일이었다. 여사친과의 하룻밤. 인수인계 잔혹사보다는 버틸만한(?) 일이었지만 내가 모든 기대를 버렸던 그 일.


남자들의 카르텔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편인 그에게는 여자사람친구가 많았었다. 처음 연애를 시작할 당시에 들은 시누이 리스트는 다섯 명가량. 나는 그녀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인간관계가 적은 편인 그에게 어떤 점으로든 외로운 시간들을 곁에 있어 준 사람들이기에 인사를 보내기도 하고 가장 친하다는 친구에게는 연인과 좋은 시간 보내시라며 러시 배스밤 세트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남녀 관계의 친구라는 건 순수한 관계를 찾기가 더 드물다. 각자 다른 목적으로 관계에 임하기 마련이다. 그중에 가장 담백하게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 지내던 사람과는 내가 친구가 되어 막상 두 사람이 남이 된 지금에도 베스트 프렌드로 지내고 있다.


위에 언급한 러시 세트를 선물한 사람과도 가까이 지내려고 했지만 결국 사소한 말들로 틀어졌고 그녀는 간혹 나와 그의 사이에 균열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는 친구의 편을 들었다. 나보다 오래 알고 지냈었기 때문이었는지, 몇 안 되는 친구가 지나치게 소중했던 탓인지.



좋지 않은 감정이 남았지만 사실 배척하고 싶진 않았다. 나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서 둘의 관계를 내가 터치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방에 사는 그녀가 서울에 올라올 때마다 그를 불러내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딱 두 가지를 당부했다. 


    1. 만나게 되면 일자와 일정을 미리 이야기하기.

    2. 너무 늦은 시간까지 밤에 술을 마시는 건 자제하기.


이미 그와 내가 만난 지도 2년이 넘었고 인수인계 잔혹사를 알게 된 계기도 둘이서 만나서 마시던 칵테일 사진이었다. 그러렇게 그를 찾아냈던 것이라 오히려 조금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너그럽게 굴고 싶었던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무슨 일이 일어나려면 일어나는 것이라 5월의 마지막 주 옆에서 모니터를 보고 있던 그의 화면에 언뜻 그녀의 톡이 보였다. 경복궁에 가자는 내용이었다. 종종 나를 알기도 전부터 경복궁에 어울리던 사람들과 함께 가서 출사를 하던걸 알고 있어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경복궁 가게?"

    "응? 어, 내가 가자고 한 건 아니고 누나가 가고 싶다고 한 거야."

    "그래~ 잘 다녀와. 둘이서 너무 늦게까지 술 마시지 말고."

    "내가 누나랑 단둘이 술을 왜 마셔?"

    "화내지 마, 이전에 그 사진 기억하고 있으니까. 이번엔 그러지 말라는 거야."

    "아, 안 만나."


만날 걸 알았기 때문에 적당히 좋게 넘길 생각이었는데 안 만난다고 엄포를 놓더니 막상 약속했던 날짜가 다가오니 급한 약속이 생겼단다. 중학교 때 어울리던 친구 무리가 서울에서 모인다며. 수원에서 단체로 오는 거라 빠질 수 없다고.


    "약속이 두 개나 있어서 바쁘겠네. 잘 보내고 와."

    "두 개라니? 친구들만 만나는 건데."

    "그래, 미안해. 좋은 시간 보내."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정말 너그럽게 있을 수 있었겠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저녁에 들어가 본 그녀의 SNS에 남대문 시장에 가서 술을 샀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저녁이 되고서는 칵테일 바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대목을 봤기 때문에.


나는 그의 컴퓨터를 켜서 구글에 접속했다. 자동 로그인이 되어 있지만 우리 사이의 최대 금기가 이것이었다. 내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나쁜 짓을 저지르는 일이 반복되면서 나는 그의 사적 정보를 열람하는 버릇이 있었다. 첫 번째 이별의 사유도 이와 관련된 부분이었다.



구글 타임라인을 켜니 하루의 행적이 보였다. 남대문시장과 경복궁 뒤 편의 동네를 들려 영등포의 바로 이어지는 경로. 프라이빗한 예약제 바였기 때문에 도무지 좋은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딱 두 개를 부탁했는데 그조차 들어주지 않은 그에게 원망이 앞섰다. 오래지 않아 전화가 왔고 이미 경직된 목소리로 받자 그는 꽤나 불안한 목소리였다.


    "지금 어딘데."

    "강남에 친구들 만나러 갔다가 잠시 누나가 보자고 해서 가는 길이야."

    "아 그래? 결국엔 만나나 보네. 내 부탁은 기억해?"

    "진짜 잠깐 보는 건데... 자기 지금 기분 안 좋아 보인다."

    "왜 거짓말했어."

    "무슨 거짓말?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다는 건데?!"


금방 언성이 높아지는 그와 그럴수록 온도가 내려가는 나. 그는 연락을 기다리지 말라는 말로 전화를 끊어버렸고 내가 다시 걸어도 받지 않았다. 예상한 수순이었다. 의심받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는 그였으니. 하지만 이게 과연 < 의심 >이었던 걸까?


나는 바에 자주 다니던 친구에게 연락해 상황을 설명하고 그곳을 찾아갈까 했지만 친구가 말렸다. 가면 더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며 예약까지 했다가 다시 취소했다.


9시, 10시, 11시. 연락은 오지 않았다. 시간이 꽤 늦어졌기 때문에 다시 행적을 보자 택시로 이동 중인지 경로가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11시 반쯤, 경로는 경복궁 뒤편에 정지했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자정인 12시, 1시, 2시. 잠들 수가 없었다. 객관적으로 어떤 사이인지, 서로가 얼마나 막역한 친구인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의 행동들이 자신을 사랑하는 나를 벌주기 위한 행동이라는 점이 나를 점점 목졸랐다.



나는 내 컴퓨터를 켜서 주소를 특정하기 시작했고 1시간쯤 구글링을 한 후에 해당 주소가 에어비앤비에 등록이 되어있는 것을 보았다. 같은 주소의 건물에 에어비앤비는 세 곳이 있었다. 맥이 탁 풀렸다. 역시 숙소였구나. 애초에 처음부터 들려 짐을 푸는 걸 도와주고 밤에 다시 갈 생각이었구나.


그의 컴도 폴더를 열기 시작했다. 그가 소중히 보관해 놓은 핸드폰 사진의 백업 폴더를 열었다. 수년치 사진이 있었다. 그는 사진을 보면 그 당시의 상황을 아주 상세히 기억할 수 있는 조금 독특한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풍경이 찍힌 사진부터 음식사진이며 온갖 사진들이 있었다.


나 역시 그와는 다르지만 비슷한 색인 작업을 하는 편이어서 사진을 하나씩 넘겨보았다. 3시간 가까이 사진을 보면서 삶의 궤적을 훑었다. 참을 수 없이 화나는 사진이나 인간 대 인간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진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사진을 보고 난 나의 감상은 안타깝다였다.


20대 초반부터 거의 일만 하고 살아온 그의 궤적은 단조로웠다. 일상이 없다시피 일을 하다가 가끔 혼자서 밥을 먹고, 또 가끔씩 사람들을 만나 시간을 보내고, 가끔씩은 평범한 20대 남자답게 일탈을 했을 것이다. 그 삶이 요약된 사진들을 보는 일은 괴롭기도 했고 측은했다.



5시가 넘어 주위가 온통 파랗게 물들어 서서히 밝아질 때쯤 나는 잠시라도 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몸은 이미 한계, 정신력도 한계였다. 누워서도 한동안 잠들지 못했다가 1시간가량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눈을 뜨자마자 연락처를 뒤져 2년도 전에 받아놓은 연락처를 찾았다. 신호가 길게 가다가 그녀가 받았다.


    '여보세요.'

    "같이 있지? 바꿔."

    '아뇨? 저 혼잔데요?'

    "장난하지 말고 바꿔. 찾아가기 전에."

    '와보시던가요? ㅎㅎ.'

    "너 딱 기다려."


나는 바로 옷을 대충 입으며 새벽에 찾아놓은 주소로 카카오택시를 불렀다. 기분은 매우 비참했다.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 걸까. 20분가량 택시를 탄 끝에 낯선 동네의 낯선 골목길에 도착했다. 경사도 있고 좁은 편의 길이라 건물 앞은 아니었다. 나는 5분 정도를 걸어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10분쯤 기다리며 할 말을 고르다가 내 처지가 너무 우스워서 폰을 들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상외로 빠르게 받는 그. 수화기 너머로 길거리의 소음이 들렸다. 이미 자리를 피한 뒤인 것 같았다. 역시 2년 동안 내 남자친구였기 때문인지 내가 지금 찾아간다 라는 말이 농담이 아니란 걸 알아챈 모양이다.


    '왜?'

    "어딘데?"

    '그냥 길. 친구들이랑 만났다가 싸움 나고 밤새 길거리 배회했어.'

    "아직도 그 콘셉트이야? 지금 어딨 냐고."

    '못 믿는 거야? 정 그러면 또 어딨는지 찾아보던가.'

    "응, 지금은 못 봐. 지금 어딨는지 말해 봐. 그 년 머리채라도 잡을라니까."


전혀 기쁘지 않은 상태로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는 내 말에 트리거가 눌린 건지 갑자기 버럭 화를 냈다.


    '누나한테 손 하나라도 댔다면 가만 안 둬.'

    "거 봐~ 같이 있잖아, 지금도."

    '스토커야? 누나 전화받아서 욕이라도 해. 이 미친 스토커년한테. 누나랑 내가 잤을 거라잖아. 어이없어.'


대체 이게 무슨 경우인지 알 수가 없었다. 중요한 건 관계의 유무가 아니다. 우선순위다. 내게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일어난 무수한 일과 거짓말. 그리고 이 순간에도 여자친구이며 함께 살고 있는 식구인 내가 아니라 만난 지 3년이 넘은 남자가 있는 자신의 여사친을 편든다.


맷돌 손잡이를 분실한 나는 텍스트로 옮길 수 없는 상스러운 욕을 내게 퍼붓는 그와 싸우다가 한번 전화를 끊겼다.



나는 상처를 받았다. 심리학적으로 상처라는 것은 1차적 감정이다. 너무나도 무력하고 슬픈 감정. 사람들은 자신이 피해자가 된 이 감정을 인정할 수 없어 2차적 감정을 갑옷처럼 몸에 두른다. 그것은 분노. 화를 내는 것만으로도 무력한 피해자에서 강력한 복수자가 된다. 그래, 나는 화가 났다.


연락처를 다시 뒤져 그녀가 몇 년 간 만나고 있는 남자에게 전화를 했다. 둘 다 내 번호를 지우진 않았던지 무던한 목소리로 받는 남자. 둘이 같이 있었는데 알고 있었냐 하니 그럴 수도 있지 않냐고 했다. 어차피 서로가 만나기 전부터 친구였는데 그렇게 본인 남자친구를 못 믿냐며 오히려 내가 이상하다 했다. 친구들끼리 밤새 술 먹고 놀다가 같이 있을 수도 있지.라는 그에게 전의를 상실했다.


어딘지도 모르는 동네를 터벅터벅 걷는 동안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용건은 간단했다. 왜 저 남자에게 전화를 했냐는 거였다. 어제부터 지금까지의 나도 잘한 짓은 아니어서 별로 할 말은 없었지만 그런다고 상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미친 XXX이라는 말을 말을 퍼붓던 그가 전화를 끊자 내가 다시 걸었다.


    '아직도 내 목소리가 그렇게 듣고 싶어?'

    "응~ 듣고 싶지. 미친 XXX이니까?"

    '차단하기 전에 다시 연락하지 마.'



날씨는 눈물이 날 정도로 화창했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나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익숙한 길이 아니라서 내리막길을 한참 내려오고 돌담길을 한참 지나고서야 집에 가는 버스가 서는 정류장을 찾을 수 있었다. 버스가 오자마자 탄 뒤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눈을 감았다. 집에 와서는 바로 도어록의 지문을 초기화하고 비밀번호를 바꾸었다. 오늘을 잊지 않기 위해서 오늘의 날짜로 비밀번호를 정했다. 집에 들어올 때마다 오늘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 후 곧바로 죽은 듯이 잠들었다가 3시간 뒤에 일어났다.


아직 연락은 없었다. 1시간이 더 지나고서야 도어록 지문인식이 실패하는 소리에 눈을 떴다. 그였다. 세 번쯤 실패하더니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 나는 가서 문고리를 걸고 문을 열었다. 문틈 새로 냉정한 표정의 그가 보였다. 나는 그 모습마저도 보고 싶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프게도, 비참하게도.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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