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보면 가슴을 찢어지게 하는데 하필 전부 명장면이네
안전고리 틈 사이로 마치 다른 공간인 것만 같았다. 우리 관계의 역학은 크게 기울어진 지 오래라서 그는 황당함과 분노가 뒤섞여 온도가 한껏 내려간 상태였다.
"뭐 하자는 거야?"
"뭘 것 같아?"
"하... 내 짐 다 가져갈 거니까 내다 놔."
"싫다면?"
문 근처에 걸려있던 키홀더를 집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공격적인 말투를 듣다 보니 나 역시 억지를 부리고 싶었다.. 곤란할 걸 알았고 대책이 없는 걸 알면서도 우호적으로 대할 수 없었다. 깊이 상처받은 쪽은 내 쪽이니까. 생각보다 완강하게 나오자 한 풀 꺾인 듯이 그가 다시 말했다.
"... 일은 해야 하니까. 가방이랑 열쇠라도 주면 안 될까?"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 알았어, 그럼..."
힘이 빠진 듯한 모습으로 뒤돌아서려는 그를 보니 또 순간적으로 마음이 약해졌다. 항상 그렇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약자 아니더냐. 그가 틈 사이로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나는 다급하지만 그렇지 않은 척 말했다.
"할 이야기가 있으면 들어 올 생각을 하지 말고 나보고 나와달라고 부탁을 해."
발걸음을 멈춘 그가 한껏 작아진 목소리로 답했다.
"열쇠만이라도 부탁해. 밖에 잠시 나와서 이야기해도 괜찮아?"
"기다려."
나와 그는 집 앞의 천으로 나왔다. 내가 이곳으로 이사 와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계단에 나란히 앉아서 느린 유속으로 흐르는 물을 보았다. 한참이나 입을 열지 않다가 어렵사리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입을 여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나는 완전히 지쳐있었다. 회상해 보면 그를 만나는 동안 3개월 이상 평온한 적이 없었다. 그저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 게 행복이나 기쁨이 아닐지언정 평온이라면, 패턴이라도 있는 듯 우리 사이의 불화는 그렇게나 주기가 짧았다.
나는 큰 행복을 바란 적이 없었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서로 배려하고 맞추면서 지내면 그래도 살아갈 수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물론 그런 내가 바라는 것들도 상대에게 버거운 것이었을 수 있다. 각자의 삶을 어떻게든 책임지며 살아온 만큼 누군가가 옆에 있는 것이 오히려 버거웠던 걸지도.
"내가 누나를 여기로 부른 것에 나도 책임이란 걸 느끼긴 해. 나도 아무런 각오 없이 오라고 한 건 아냐. 내가 지금 힘들어하면서도 왜 버티는데? 누나가 있기 때문이야."
누나라는 호칭은 처음이었다. 그와 나는 시작부터 누구님과 누구 씨를 거쳐 짧은 시간에 서로에게 자기가 되었다. 나를 위해 버틴다는 말은 그렇게 달콤하게 들리진 않았다. 내가 없다면 견딜 필요가 없는 더부살이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더 이상은 못할 것 같아. 우리 사이에 믿음은 서로 깨진 지 오래잖아? 내가 먼저 깼고 너도 나를 산산조각 냈잖아. 나는 솔직히 이제 널 믿을 수가 없어. 우리에게 답이 있어? 우리 사이에는 결과란 게 없잖아. 과정뿐인 거잖아. 어느 한쪽만 애쓴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
"믿지 않아도 돼. 그런데 누나가 나를 믿을 수 있도록 노력할 시간을 줘. 그것도 어려울까?"
2시간의 토해냄과 설득 사이에서 나는 일단 그를 용서하기로 했다. 그의 직주근접을 위해서 전혀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를 온 지 겨우 한 달이 지난 일이었다.
편도 1시간 반이 넘게 걸리는 이곳까지 여러 번 집을 보러 다녔고 계약을 하고 이사를 준비했었다. 이사하기 며칠 전에도 사소한 뉘앙스 차이로 냉전을 하다가 3일 만에 다시 대충 무마시키고 폭우가 내리던 날에 감행한 이사였다. 나에게는 그 모든 과정이 나 자신보다 그를 우선으로 했었다. 같이 잘 지내고 싶다는 마음이었지만 우리 관계의 역학은 그에게서 나에게로 흐른다는 것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애써 온 결과였다.
소금기가 가득한 얼굴을 대충 팔로 훔치며 이야기를 끝내고 밥을 먹으러 가는 길에 만개한 여러 종의 장미가 가득했다. 그는 노란 장미의 사진을 하나 찍어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 조금 서글픈 얼굴이었다.
"어떻게든 사느라 이거 하나 같이 못 보면서 살았네. 이렇게 예쁘게 피었는데."
이 일이 있고 이틀 뒤, 문제는 다시 터졌다. 회식을 하러 간 그와 마침 그 근처에서 친구를 만나러 간 내가 서로 짬을 내서 애틋하게 얼굴을 본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날 밤도 그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휴대폰의 전원도 꺼져있었다. 나는 또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 5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들었다가 3시간 만에 일어나 다시 도어록을 다 리셋하려다가 그러진 않았다. 그럴 가치도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안전고리만 걸어놓고 조금 더 잠을 청하려 했지만 이미 다시 자기엔 제정신이 들어버린 뒤였다. 몸을 일으켜 집을 치우기 시작했다. 어차피 혼자 지내게 된다면 전부 내가 해야 할 일들이었다.
평소에도 대부분 내가 해왔지만 나 역시 그와 보내는 것이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 마음 아렸다. 욕실 청소를 하다가 에픽하이의 노래가 머릿속을 스쳤다. 비누에 붙은 너의 머리카락을 뗀다는 가사였다. 헤어짐을 한 줄로 그렇게 지독하고 현실적으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다 기억나 네가 없는 첫 아침도 잘 참다 끝내 무너진 그 순간을
한참 울었거든 샤워실에서 비누에 붙은 너의 머리카락을 떼며
가진 게 없던 내게 네가 준 상처 덕분에 나도 주인공이 돼보네 In a sad love story
별 볼 일 없던 내게 네가 준 이별 덕분에 나도 주인공이 돼보네 In a sad love story
연애소설 - 에픽하이
끊임없이 청소를 하다 보니 어느새 11시가 되었다. 한참 들여다보지 않았던 폰을 들여다보자 부재중 통화가 4통이 남아있었다. 모르는 번호인데도 무언가 눈에 익은 번호였다. 다시 걸기는 애매해서 카톡에 추가해 보니 친구 추가가 되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전화를 걸어보니 통화 중이라는 메시지가 들렸다. 어쩐지 서로 걸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다시 걸었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그가 받았다.
지난밤의 술이 덜 깬 건지 잔뜩 새는 발음으로 미안하다고 거듭 말하지만 내 마음은 더 이상 상할 것도 없을 지경이었다. 잘 숙성되다 못해 쉬어버린 식초처럼 내 마음은 코를 찌르는 냄새와 함께 산성을 띄고 있었다. 그가 늘어놓는 횡설수설한 상황 설명과 변명을 들어주다가 배터리가 다 한 건지 전화는 갑자기 끊어졌다. 대략 1시간 내로 오겠구나. 하는 추측이 가능했다. 그래, 와서 무슨 변명을 대는지나 들어보자.
1시간이 거진 지났을 때쯤 그가 올 시간이 되어 나는 안전고리를 풀어두었다. 10분이 지나지 않아 문을 열고 들어 온 그는 현관 앞에 서서 꽤 오랜 시간 내 눈치를 보고 서 있었다. 그 모양새가 처량해서 꼴도 보기 싫게도.
"뭐 하는데?"
"... 들어가도..."
"일단 들어와서 이야기해."
들어가도 되냐는 말도 채 다 맺지 못하길래 들어와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어렵사리 두 걸음을 뻗으며 비틀거리더니 내 앞에 서서 움직이지 못하고 여전히 눈치 보는 눈. 내키진 않았지만 그를 안아주었다. 우리가 늘 그랬던 것처럼. 내가 끌어안으니 처음엔 고장 난 사람처럼 있다가 나를 꾹 끌어안으며 엷게 떨었다. 깊은숨을 내쉬는 그를 더 꼭 끌어안아주었다. 한참을 그렇게 안고 있었다.
손발을 씻으라고 말하고 의자를 하나 꺼내 앉히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담담하게 이런저런 안 좋은 생각을 했던 것도 이야기했다. 그는 여전히 불안하게 내 눈치를 보면서도 본인이 억울한 부분이 나오면 정직하게 억울해했다. 덮어두려 했지만 내게 거짓말을 한 것들에 대해서 지적을 했다.
"어제도 네 로그를 봤어. 안 볼 수가 없더라고. 싫어할 거 알면서도 내가 미칠 것 같아서."
"오죽하면 그랬겠어..."
"너도 내가 끔찍해서 나가고 싶지 않겠어? 그래도 두 사람 다 상황이 좋지 않으니까 지내는 만큼은 버텨봐야겠지만 말이야."
"자기가 쫓아낸다면 쫓겨나야겠지만 나가고 싶지는 않아."
"그러면 어떻게 하고 싶어?"
"엊그제 말한 것처럼 잘해보고 싶어. 잘 지내고 싶은데 내가 너무 모자라서 그게 잘 안되나 봐. 진짜 잘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돼."
손을 떨며 불안해하는 그의 손을 잡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도 모르겠다. 그에게는 약해지는 마음을. 이미 그에 대한 마음은 단순한 로맨스 감정과는 다르게 된 지 오래였다. 너무 아픈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데 로맨스도 사랑도 아닌 것을 하고 있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 사이에서는 관계 역학이라는 것이 있고 우리는 모두 관계의 역동을 바란다. 아는 사람에서 관심 있는 사람으로, 관심 있는 사람에서 좋아하는 사람으로, 연애로 결혼으로 점차 관계의 뎁스를 만들어 나간다. 같은 레벨의 관계 안에서도 변화를 바란다.
변화를 바라는 사람과 바라지 않는 사람 사이에서 균형이 깨져버리는 순간 관계는 깨진다. 나는 그 시작과 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눈을 감지 않고 생생하게 내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사랑의 모든 것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사랑이 끝날 때까지 일몰록을 작성하는 수밖에.
오늘의 이야기로부터 15개월, 브런치 연재시점으로부터 약 반년인 현재. 우리는 아직도 함께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