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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초록 Sep 21. 2024

너는 날 원하는구나

우리는 소망한다, 누군가에게 간절함이 되기를

오늘은 12월의 그녀가 남기고 간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두 사람이 관계가 정리수순을 밟은 후에도 나는 습관처럼 그녀의 SNS를 들어갔다. 이렇게 얽히지 않았다면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던 내 마음은 진심이었다. 감정적이고 뜨거운 나에 비해서 조금 더 서늘하고 처연한 그녀의 글을 나는 꽤 좋아했다.


물론 그녀의 피드에 올라오는 글들은 그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세 사람 모두에게 어떤 의미로든 상처가 되었던 사건이 있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온갖 혼란스러움과 아픔으로 짓이겨진 글들이 올라왔다. 죄책감을 느끼진 않았지만 민의 문장 곳곳에는 유에 대한 원망이나 상처가 있었고 그 첨예한 감정들은 나까지 찔러들어왔다.


어느 날은 토해내야 될 감정들을 그녀답게 정제하고 절제해서 올렸고 또 어느 날엔 좋았던 날들을 회상하는 듯했다. 무얼 보든 나에겐 상처였지만 나는 그 자해적 행동을 멈출 수가 없었다. 우리는 같은 상처를 공유하고 있었으니까.


    - 너는 날 원하는구나.


그 말 한마디가 목구멍을 틀어막듯이 내게 와서 박혔다. 그와 보냈던 밀월의 시간에 베갯머리의 속살거림을 떠올리며 쓴 글인 듯했다. 서너 줄의 글이지만 알 수 있었다. 조용히 화면을 끄고 폰을 던지듯 옆에 내려놓았다. 불 꺼진 침대 위에 누워 숨을 몇 번 쉬다 보니 눈물이 나왔다. 


나를 원하지 않던 그가 그녀를 원했을 모습이 그려졌다. 고요하고 간절하게 들끓었을 그 눈을 나라고 모를 리가 없다. 여러 번의 이별을 말하며 점점 빛이 흐려지던 눈동자 이전에 날 보던 눈과 다를 리 없었으니까. 그가 최선을 다하면 얼마나 예쁜 낱말들을 엮어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인지도 나는 알고 있었다.


내 이름은 김삼순의 한 대목이 생각났다. 지금은 반짝반짝하겠지만 시간이 가면 다 똑같아지는 지금의 우리처럼 민과의 시간도 그랬을 것이다. 나와 유에게도 그런 반짝이는 나날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두 사람의 한 달 반 가량의 반짝이는 시간에 무참하게 먹물을 부어버린 건 나였다.



다시 만나기로 한 이후에도 사이가 틀어질 때마다 나는 그 순간을 후회했다. 함께 서 있으면 같은 화가가 그린 그림처럼 어울리는 두 남녀의 모습. 그리고 그 남자가 지금의 남자친구라는 괴리감이. 내가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자리에 있는 느낌이었다.


갈등이 깊어져 서로 선을 넘어서까지 서로를 비난하게 되면 그가 질색하고 화낼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꺼냈다. 나를 원하지 않았던 네가 원했을 그녀를. 막상 1년이 넘게 지나고 나서는 그의 기억에서는 스쳐 간 사람일 뿐이었던 그녀가 내 마음속에서는 1년이 넘는 시간 동안에도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그녀가 SNS를 그만두고 계정을 삭제한 뒤 사라진 이후에도.



너는 날 원하는구나


우리는 어쩌면 모두 누군가에게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이길 바라는 것일지 모른다. 그것이 몸이든, 마음이든, 아무것도 더해지지 않은 나의 존재 자체든 수용받고 이해받길 바라며 사랑받기를 원한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


우리는 아니, 나는 그랬다. 내 존재 자체를 감싸 안아 줄 사람을 바랐다. 사람은 자기가 바라는 것을 타인에게 자연스레 하게 된다. 받고 싶기에 주게 된다. 나는 그 무조건적인 수용과 사랑을 바라는 자신을 깨닫고 내가 먼저 해보려고 애썼다. 그 결론에 도달했을 때 내가 만난 사람이 그였다.



내 주변에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사랑받길 원하지만 상처받는 것이나 상대방에게 무언갈 주었다가 손해 보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회피형이라는 말은 도처에 흔하게 접할 수 있다. 상처받을 것을 알기에 시작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본다. 나는 그저 모든 순간을 피하지 않고 깨어지면 깨어지는 대로 산산조각 나길 택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인터넷에서 흔히 파트너에게 감정이 생겨서 힘들다는 여자들의 글을 보면 나는 저 문장을 떠올리고 만다. 처음에는 감정을 가지지 않고 리스크와 책임감을 지지 않고 싶은 마음이었겠지. 하지만 사람이 말을 섞고, 몸을 섞고, 감정을 섞는데 마음이 생기지 않을 리가 없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끌리고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게 것을 부정하고 상대방이 나를 원하길 바라는 마음과 상대가 나를 좋아하길 바라는 마음이 활자가 된 것이 그녀가 쓴 문장이겠지.


나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그와 헤어지고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는 동안 상대방이 나를 한 사람의 인간이 아닌 여자로서 원하는 순간에 싫지 않은 마음이었던 적도 있다. 나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여자인 나를 수용해주지 않았던 그에 대한 반발심이었을 것이다.


실컷 무너져버린 여성성을 어루만져주는 상대에게 호감을 가진 적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작은 베네핏만큼이나 한계점도 명확히 알고 있었다. 30대 중반을 넘긴 여자라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살아온 존재이기 때문에. 그럴수록 내가 정말 간절히 원하는 것이 그였다는 것을 재확인받고 쓸모없는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내가 그러는 동안 그는 나와 그녀를 오가며 두 여자가 자신을 원하는 그 순간을 통해 자신의 남성성이나 자존감을 채우려고 했던 걸지도 모른다. 나와 그는 서로 너무 다르면서도 소름 끼치도록 닮았음을 알기에.



주고받는 마음에 서투르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쏟아내거나, 자신이 그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받는 사랑을 착취하는 일만 해보았다면 그것 또한 연애의 한 모습이라 할 수 있지만 사랑이라 하기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사랑이란 게 대단히 숭고하고 무결하고 완벽해서가 아니다. 서로 다른 환경과 인격을 가지고 살아온 두 사람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조건 없이 수용하고 이해하며 세계를 넓혀가는 과정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은 타인의 감정이나 마음, 주변 상황이나 이 세상이 아니라 오로지 내 마음과 내 행동 밖에 없으니까. 나는 그녀가 주고 문장을 고친 뒤, 마음 안에서 조용히 되뇌곤 한다. 


나는 너를 간절히 원해. 그리고 너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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