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목소리가 들려
'너는 참 손을 좋아하는구나.'
'아, 그런가 봐.'
가끔씩 일기를 올리던 블로그의 상단 배너엔 인터넷에서 가져온 서로 마주 잡은 손 사진이 걸려있었다. 원은 그걸 본 모양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내 무의식을 깨달았던 것 같다.
사실 내게 손을 잡는다는 행위는 깊은 트라우마의 흔적이었다. 원에게도 에둘러 상담을 요청했었던, 좋아했지만 상처만 받고 끝난 사람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요즘 말로 바꿔본다면 릴레이션쉽이라고 말할 법한 그 관계를 내 의사와 상관없이 반년 가량 겪었다. 스스럼없이 내게 입을 맞추고 더한 것을 하고 주위엔 여자친구라고 소개하면서도 결국 아무 사이도 아니었던 그런. 나는 그저 손을 잡는 정도를 바랐을 뿐인데 그조차도 늘 차갑게 뿌려 쳤던 사람. 그 후로 내가 용기 내어 내민 손을 누군가 뿌리치는 것은 나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 같은 고통과 링크되었다.
'처음 손 잡는 순간이라는 건 설레는 일이잖아. 그래서 좋아.'
나와 원은 이따금 만났다. 정확히 말하면 수도권으로 놀러 오길 좋아하는 내가 1년에 3~4회쯤 서울로 오면 두어 번에 한번 꼴로 둘이서든 동아리 정모든 만나서 놀았다. 보통 밥을 같이 먹고 보드카페를 간다거나 코인 노래방을 간다거나 카페를 가는 정도였다. 당시에 내겐 꽤 친한 남자 지인이 둘 정도 있었는데 한 명은 재미있는 사람이었고 원은 즐거운 사람이었다.
재미와 즐거움의 차이라면 같이 있으면 웃긴 감정이 전신을 지배하고 다소 엉뚱하지만 폭소를 하게 되는 쪽이 재미, 유익하고 편안한 마음이 든다면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 원은 명백히 두 번째였다. 원은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재미있는 타입은 아니었다. 다정하고 모두에 원만하게 지내는 편이었지만 이미지 상으로는 소위 먹물 든 타입이었다. 매사에 대부분 진지하고 정치나 경제적인 이야기, 학문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루기도 했다.
원의 글도 그랬다. 온라인 MMORPG의 2차 창작물이라고 보기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였다. 나는 원의 그런 점이 좋았다. 실제로 나보다 나이가 많기도 했지만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럽고 사려 깊지만 적당히 장난스럽고 소년다운 부분을 좋아했다. 물론 여기 좋아한다는 것은 이성적인 감성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좋은 사람이었다.
아마 네 번째 만났을 때였을까? 갑자기 전날에 잡힌 약속 시간에 두 시간이나 늦은 원을 타박하며 저녁을 먹고 시간을 보내다 같이 2호선을 탔다. 원은 신림 쪽에 있는 집에 가는 길, 나는 같이 지내기로 한 동생의 집인 인천 쪽으로 가고 있었다. 밥을 먹고 나서 맥주를 한잔 정도 했던 게 조금 취기가 오른 건지 홍익인간이 된 나와 그런 나를 불안한 눈으로 보는 원.
"인천까지 괜찮겠어?"
"아아~ 문제없어 괜찮아~ 잘 갈 수 있어~"
나는 손사래를 치며 히죽히죽 거렸다. 그럴수록 원의 얼굴은 근심이 깊어졌다. 마침 신도림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오길래 나는 벌떡 일어나다가 잠깐 비틀거리곤 문쪽으로 걸어갔다.
"어? 신도림 다 왔다~ 환승해야지 힛~ 연락할게~~"
"연아 잠깐만!"
원의 팔이 내 팔을 붙들었다? 안 그래도 취기가 조금 있었던 건 사실이라 어어 하고 잡힌 동안 지하철역 문이 닫혔다. 황당한 얼굴로 원을 바라보니 강아지 같은 눈망울. 어리둥절하는 내 팔에 자기 팔을 걸어 고정시킨 원은 약간 안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집에 가서 자고 가."
"아? 아니야. 어... 여자친구분 계시지 않아?"
"응. 잠시 통화할 테니까 여기 앉아있어. 일어서면 안 돼."
"... 응?"
나를 빈자리에 앉혀놓고 원은 정말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고 뭔가 이야기하더니 한결 밝아진 얼굴이었다. 나는 얼마 먹지도 않은 술이 확 깨는 경험을 했다. 잠시 몇 분 사이에 일어난 일을 이해할 새도 없이 안심한 표정의 원에게 반쯤 부축당하듯 안내를 받았고 어두운 서울의 낯선 골목을 이리저리 걸어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작은 개방형 원룸의 현관이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집이 좁지만 편히 있다 가세요."
별안간 남자사람친구의 여자친구과 이렇게 대면하게 될 줄이야. 두 사람과 두 마리의 고양이가 지내는 그 원룸은 꽤 좁았다. 나까지 눕는다 치면 대부분 꽉 찰 것 같은 그런 사이즈. 내 입장의 난처함은 모른 채 싱글벙글한 원과 선선히 방을 내어 준 여자친구분에게 뭐라고 할 말도 없는지라 정말 얌전히 앉아서 가끔 내게 질문이나 권유가 있을 때마다 정신줄을 간신히 붙들고 대답을 하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심지어 새벽에 셋이서 사이좋게(?) 라면까지 끓여 먹고 잠에 들었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자고 있는 사람과 고양이들이 깨지 않게 살금살금 짐을 챙겼다. 애초에 블랙아웃이 올 정도로 먹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반잔만 술을 먹어도 빨개지는 특성상 한 캔 정도의 맥주가 들어갔으니 만취처럼 보였을지라도 맨 정신이었는데.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어서 자고 있는 원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원이 눈을 떴다.
"데려다줄게. 여기 역도 멀고 버스정류장 가는 길도 복잡해서."
"아니야 아냐. 피곤해 보이는데 좀 더 자. 그래도 길은 그럭저럭 잘 찾아."
"그래도 데려다주고 싶어서."
평소엔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원인데도 보면 자기 고집이 세다. 물러 설 기미가 안 보이길래 나는 또 백기를 들었다. 가방을 챙겨 나와서 고불고불한 골목길을 한참 돌아나가자 작은 버스정류장이 있었다.
"여기에서 OOOO번 버스를 타고 O정거장쯤 가면 역에 가니까 환승해서 가면 돼."
"응. 데려다줘서 고마워. 좀 놀라긴 했지만 재워준 것도."
원은 나를 향후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임수를 완수한 느낌인 걸까? 어떤 생각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더니 한쪽 손을 내밀었다.
"어?"
"손."
"... 친구 사이엔 손도 잡으면 안 된다면서 요."
"곧 군대 가면 제법 오래 못 볼 테니까. 이미 한번 건강 상태로 연기되었던 거라, 이번엔 입대하게 될 것 같아. 그리고 악수는 친구 끼리 해도 돼."
나는 내게 내밀어진 그 하얀 손을 보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살며시 악수를 했다.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랬던 건지 부드러운 손바닥 곳곳에 작은 굳은살이 있었다. 마주 잡은 손을 휘휘 몇 번 흔들었다.
"그럼 조심해서 가고 내려가서 연락해."
"응. 너도 연락해."
마침 버스가 와서 급하게 올라탔다.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원은 그 자리에서 내게 손을 흔들었다. 자다 깨서 부스스했지만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항상 원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엔 마음이 묘하게 일렁였다. 가벼운 멀미 같기도 하고 열병의 전조와도 같던 어지러움.
원은 그 후 바람이 차가워질 무렵 다시 되돌려 보내지는 일이 없이 무사히 입대했다. 무릎 부상 이슈로 1년 반 가까이 밀린 입대였다. 사실 동아리에 들어왔던 것도 입대를 앞두고 남은 몇 개월을 뭐라도 뜻깊게 보내고 싶었던 거라는 건 입대 후에 알게 되었다. 훈련소에서 온 편지를 여자친구분이 우리 카페에 게시했고 모두 소식을 반가워하며 각자 편지를 보냈고 그중엔 내 짧은 편지도 있었다.
나는 가끔 원을 생각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나 선생님처럼 굴다가도 이내 장난스러워지던 원의 모습을 떠올렸다. 웃을 때 살짝 주름지듯 접히는 눈꼬리와 말을 할 때마다 상냥한 단어를 고르는 모습들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함께 갔던 노래방에서 원이 부르던, 꼭 저와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몰래 플레이리스트에 담아두었던 노래를 듣곤 했다.
너와 만난 시간보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그 바닷가에 다시 또 찾아
만약 그때가 온다면 항상 듣던 스미스를 들으며 저 멀리로 떠나자
기다릴게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도록 항상 엔진을 켜둘께
델리스파이스 - 항상 엔진을 켜둘께
그제야 내 안에서 일렁거리던 아지랑이의 실체를 마주할 수 있었다. 나는 원을 좋아하고 있었다. 하지만 원에게는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있었고 나는 원과의 사이를 몹시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위병소 안의 세계가 어떠하든 외부 세상의 흐름은 빠른 법이다. 원이 입대한 지도 거의 1년이 가까운 때였다. 추석 연휴라 집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낯선 경기도 지역번호로 전화가 왔다. 생각지도 못했던 원의 전화였다.
'잘 지냈어?'
"경기도 번호길래 혹시 했어. 응응 그럭저럭 지냈어. 넌 잘 지냈어?"
'응.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그래도 꽤 잘 지내고 있어. 나이 많다고 배려받는 부분도 많기도 하고.'
우리는 제법 긴 시간 동안 통화를 했다. 경기도 안양에 있다는 것. 일반 병사 중에 최고령이라 모두의 형이 되었고 행정병으로 지내고 있어서 힘든 일이 많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잠이 부족한 상태라는 것. 조금 까칠해진 목소리가 원의 말을 곧바로 뒷받침해주었다.
'그리고 나 헤어졌어.'
"... 그래? 어쩌다가?"
'너도 알겠지만 우리 예전부터 문제가 있었잖아. 다시 붙여보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더라고. 입대까지 하고 나니 점점 사이가 멀어지는 것 같아서 나도 예감하긴 했어. 이제 때가 된 거구나. 그러다가 얼마 전에 통화했을 때 먼저 말하길래 알았다고 하고 정리하기로 했어.'
"너 마음 괜찮아? 어떡해. 오래 만났잖아."
'음, 안 힘들었다면 거짓말이지만 괜찮아. 조금 바쁘게 지내고 그러면 괜찮을 거야. 괜찮아.'
위로를 해야 한다는 마음과 함께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간 눌러온 희미한 기쁨 같은 감정이 새어 나왔다. 지금의 관계가 소중한데도 쓸쓸한 원의 목소리가 나에게 무용한 치기를 주었던걸 지도.
"지금 이야기하면 너무 이상해보일 건 알지만 사실, 나 널 좋아했어. 꽤 전부터. 지금 이야기하는 거 너무 치사한 거 알아. 뭔가 바라는 건 아니야. 그냥 좋아하게만 두었으면..."
'날 좋아해 줘서 고마워.'
마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원은 담담하게, 조금은 미소가 스민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그 대답에 내심 안심했다. 자칫하면 친구 사이가 끝나버릴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나야말로 원에게 감사할 지경이었다.
'이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가끔 시간 나면 전화할게.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어.'
"응. 나도 편지할게."
짝사랑이란 건 괴로울 수는 있는 일이지만 내게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상대방을 좋아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길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이기심인 걸 조금 어린 나이에 깨달았기 때문에 좋아하는 마음을 가져도 좋다고 말해준 것만으로도 벅찼다. 원을 소유하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내가 원을 좋아하고 그걸 원이 안다는 것으로도 기뻤다.
나는 엄마의 도움을 받아 서툰 뜨개질로 장갑을 떴다. 이미 목도리는 해마다 겨울이면 줄 사람도 없으면서 습관적으로 뜨던 기묘한 습관이 있었기에 정말 어려운 부분을 빼고는 그럭저럭 술렁술렁 뜰 수 있었다. 손등에 작은 꽈배기 무늬가 있는 베이지색과 아이보리색이 섞인 실로 장갑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원과 손을 데어본 적은 없지만 나와 원의 키가 비슷했기 때문에 손가락 길이도 큰 차이가 없을 듯해서 내 손에 맞추어 두 달 반 가량 뜨개질을 계속했다.
그리고 일정기간 이상 글을 매일 쓰면 출판을 해주는 서비스를 채워나가고 있었다. 편지를 빙자한 일기와 적당히 듣기 좋은 글귀들을 써 내려갔다. 100페이지나 되는 작은 핸드북을 완성하고 직접 뜬 장갑과 양장본 책을 같이 포장했다. 통화를 하다가 꼭 읽고 싶은 책 리스트에 있던 로마사 논고였다. 문학을 좋아하는 나와는 달리 그조차 원 다웠다. 사실 이 모든 게 받는 사람에게는 부담일 수도 있지만 그땐 그런 걸 알기엔 너무 서투르고 나는 여전히 고작 22살이었다.
크리스마스 및 이른 원의 생일선물로 보냈던 그 택배의 답으로 1월 14일 자로 쓰인 편지가 도착했다. 정직한 규격봉투 속에 평범한 편선지 3장에 꽤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원의 편지. 첫 장에는 가장 최근의 일상과 보내준 로마사 논고에 대한 감사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두 번째 장은 근무를 서다 별똥별을 보게 되어 빌었던 개인적인 소원에 대한 이야기와 조금 오른 월급으로 작은 펀드를 들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장. 이번주 금요일에 쌍둥이 동생의 결혼식을 위해 외박을 나간다는 이야기와 함께 내 고백에 대한 대답이 쓰여있었다.
1월도 절반이 지나갔어. 시간이 참 빨리도 간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항상 건강하게 지내길 바라. 그리고 타인에 대한 배려도 중요하지만 자신에 대한
애정을 더 많이 키웠으면 좋겠다. 운동도 하고, 남자도 뻥- 차보고. ㅇ_ㅇa
단지 '좋은 사람'인 것만으로는 세상 살기가 참 녹록지 않은 것 같아.
남 말 할 처지는 아니다만!
무얼 하든 널 위해 살아. 그럼 나중에, 또.
차였구나. 나는 생각했다. 원은 원답게 나이스하게 나를 찬 거구나. 저에게 고백한 여자에게 남자도 뻥- 차 보라고 하는 원이 조금은 어이가 없었지만 괜찮았다. 그가 원하는 게 친구라면 나도 좋았다. 남자와 여자도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해줬던 사람이니까. 5월쯤 휴가를 나오면 그때 얼굴을 보자는 전화에 그러자고 대답을 했었지만 나와 원은 5월에 만나지 않았다.
"있잖아. 나 그 사람이랑 만나기로 했어."
'그래? 축하해.'
"응. 이 말이 맞는 건진 모르겠지만 미안해."
확실히 정해지진 않았지만 몇 달 전부터 정해진 약속을 한 달 앞둔 4월, 나는 위에서 언급한 재미있다고 생각해 온 사람과 연애를 하게 되었다. 사실 우리는 친구 사이였으니 미안하고 말고 할 일은 아니었고 그저 나의 짝사랑일 뿐이었지만 나는 어쩐지 나도 모르게 미안하다고 말을 하게 되었다. 원은 그때도 담담하게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나와 원이 다시 만난 것은 원이 전역을 하고 한 달쯤 지난 저녁의 강남역이었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