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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초록 Jun 22. 2024

예외종합선물세트

너는 나를 파괴하러 온 나의 구원자

다정다감이라는 만화가 있었다. 읽은 지 오래되어 잊힌 내용이 많지만 그 만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 좋아하는 남자아이와 제일 친한 친구와 시간을 보내며 행복해하는 그 말이 나는 너무 좋았다.


'종합선물세트 같아.'


아주 어렸던 때, 우리 집이 꽤 부유하던 시절에 엄마아빠는 가끔 슈퍼에서 커다란 상자를 사서 집에 왔다. 알록달록한 색깔에 리본이 그려진 종이상자 속에는 여러 가지 과자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그 속에 들어있는 모든 과자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 커다란 상자가 온전히 내 것이라는 게, 그 상자가 표현에 서투른 엄마아빠의 애정표현이라는 게 좋았다. 레고를 제외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던 선물이었다.


20대 초반에 정말 다정다감 속의 이야기와 비슷한 상황이었던 날도 있었다. 지나고 보니 첫사랑이었던 남자아이와 내가 가장 친했던 친구, 제일 좋아하는 언니가 모였던 날. 셋 다 서로 잘 모르는 사이였지만 나의 친구라는 점 덕에 넷이서 모여 오후부터 밤늦게까지 같이 놀다가 헤어지기 아쉬워하며 돌아섰던 날. 모두 나를 위한 종합선물세트 같다며 모두에게 말했다. 행복한 기억이었다. 10년이 지난 후 언니에게 그날을 기억하냐고 하니 정말 좋았었다며 나만의 기억이 아니었다는 걸 확인받은 적도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유는 내게 종합선물세트 같았다. 사랑에 빠져 본 사람이라면 아마 공감할지도 모른다. 마치 이 사람이 나를 위해 태어난 것만 같다는, 아무런 근거는 없지만 신비로운 감각. 마치 그동안 내가 겪은 많은 연애의 비극들이 이 사랑을 만나기 위한 준비단계였던 게 아닌가 싶은 그런 마음. 


모든 점이 좋을 리가 없는데도 오롯이 나를 위해 준비된 것처럼 그는 내 안에서 다채롭게 반짝였다. 나를 보며 웃을 때 호를 그리며 휘어지는 눈꼬리나 물먹은 별처럼 일렁이는 눈 속에 눈부처로 담긴 나를 보는 게 좋았다. 속닥이듯 나직한 목소리로 다정한 단어를 골라 말하는 점, 함께 있으면 금방 푹 잠이 드는 것조차 유는 나를 위한 사람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사람이란 관계의 역동을 바라고 새로움 속에 도파민이었던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익숙한 것이 된다. 우리가 서로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을 유지하는 기간을 지나 일상의 모습을 하나씩 알아가게 되고 급기야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의 지하실을 들키는 시점이 오고야 말았다. 연애의 환상이 깨어지는 시기.


유는 더 이상 처음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따로 묻진 않았지만 그 역시 나를 보며 인내하고 참아 넘기는 말들이 많았을 것이다. 대화를 하려 노력하지만 각자의 일과 인간관계로 인해 우리가 주고받는 말은 터무니없이 가벼웠다.


헤어짐들이 있었고 다시 만났다. 깨어진 것을 붙이는 일은 새것을 만들어가는 일보다 배로 힘든 일인데 나와 유는 그 과정을 여러 번 겪었다. 사실 세상 사람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 사실이 위안이 되거나 덜 아픈 게 되진 않는다. 개인의 비극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이 역시 흔한 일이다. 


1. 집에 남자를 들이지 않는다.
2. 적당량의 음주는 이해하지만 흡연은 이해할 수 없다.
3. 여자사람친구가 지나치게 많고 그 사이가 친한 사람은 거른다.
4. 나의 우선순위가 낮은 사람은 피한다.
5. 헤어진 사람과는 다시 만나지 않는다.


이 항목 외에도 아주 사소한 룰도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던 대전제도 유의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내 안의 금기를 하나씩 깨부수고 예외처리 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한다는 것은 세계가 넓어지는 경험이니까. 하지만 그 과정이 역시 그렇게 간단하고 긍정적인 일로만 구성되지는 않는다. 아직 글에서 밝힐 수 없는 사건으로 인해 힘든 시간을 겪고 엄마와 그런 대화를 했었다.


    "엄마, 내가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아봐서 사실 아직도 엄마 마음은 잘 이해할 수가 없어. 나는 평생 딸의 입장으로만 살았잖아.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었어."

    - 뭔 생각이고?

    "물론 똑같진 않겠지만 얠 보고 있으면 평생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던 일도 다 용서가 돼. 그냥 좀 모르는 척해주고 좀 져주고 싶어 져. 엄마도 나한테 그랬을까? 이게 엄마들의 마음일까?"


무뚝뚝하기로 정평이 나있는 나의 엄마는 이야기를 들으며 옅게 웃다가 나를 달래듯이 말했다.


    - 그기 사랑이다. 그놈아한테 주기는 아깝지만은.


사랑한다는 건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일들을 그 사람이기에 이해하려 무던히 노력을 하고 생각을 하는 끝에 수용하게 되는 일이다. 사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 세상엔 나와 다른 무수한 사람들이 있고 서로 다른 우리가 만나 하나의 이야기를 써내려 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과정이다. 결과나 결말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과 방법이 더 중요한 일일 것이다. 연애나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유지하는 것이 어렵고 중요한 것이듯.



나의 종합선물세트 상자 속에는 더 이상 달콤한 향을 풍기며 찬란하게 빛나서 나를 부자가 된 기분으로 만들어주는 과자들은 없다. 대신 유리 조각들이 가득하다. 깨진 채로 해안가에 버려져 파도에 쓸려 흐린 빛을 내는 유리들은 이제 유리가 아닌 보석 같은 바다유리가 되었다. 예리한 빛과 견고한 모양새는 사라졌지만 만져도 다치지 않는 다양한 색의 유리 같은 기억들이 잘그락 거린다.


유가 나를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 아닌 것은 나 역시 그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기적인 환상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전에도 스스로를 위해 태어났고 앞으로도 자신을 위해 살아가겠지만 서로 부딪히고 깨어지고 풍화되면서 조금 더 다듬어졌다.


미래가 어떤 모습이든 나와 그는 전보다 더 사랑을 '잘' 할 수 있게 될 거라 믿는다. 우리가 만나기 전에 내가 무수히 많은 일들로 다듬어져 모난 유를 어렵게나마 수용할 수 있었듯이 유 역시도 사랑을 받는 법과 주는 법을 조금 더 배웠을 거라고. 우리가 누구와 함께 생을 같이 하게 될지라도 서로의 세계가 넓어지는 그 경험은 둘이서 함께 한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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