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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초록 Jun 29. 2024

사랑하지만, 자고 싶진 않아

섹슈얼 보다 센슈얼, 혹은 이모셔널

나는 반성애자, 데미섹슈얼이다.


이 개념에 대해서는 아주 많은 담론과 각자의 의견이 있기에 이 글에서 말하는 데미섹슈얼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성적 이끌림을 느끼는 사람>으로 임시 정의하기로 한다.


(성적인 담론이나 성소수자에 대해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은 열람을 중단하셔도 좋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유성애자의 입장에선 당연한 게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역시 유성애자를 전부 이해할 수는 없다. 성적 욕구가 들면 어떻게든 해소를 해야 해소가 되는 극단적인 유성애자와 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니까. 좋아하니까 상대방과 피지컬적인 욕구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니까. 유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몇 년 간의 고민과 서사 끝에 나라는 사람이 무성애자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20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성적지향이 조금 다르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한국여성에게 어린 나이부터 주입되는 성을 금기시하는 교육으로 인해 여자는 남자보다 선천적으로 성욕이 낮고 에로틱보다는 로맨스가 중요하다고 배웠으니까. 나 자신이 남자에게 성적인 욕구를 거의 느끼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첫 연애를 한 것은 10대 후반이었지만 20대의 연애부터는 내게 늘 불편한 옷 같았다. 상대방을 좋아하니까 손을 잡거나 안는 걸 무척 좋아했지만 키스부터는 약간 부담스러웠다. 관계는 말할 것도 없었다. 왜 한국의 성인 연애는 성적인 것이 필수냐며 한탄한 날도 적지 않았다. 나는 관계가 전혀 즐겁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 또래의 20대 남자들은 여성의 몸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편이었고 나이상으로도 자신의 욕구가 앞섰으며 상대방을 배려해야 한다는 점을 아직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이 모든 원인의 결과는 대부분 긴장과 불편함으로 인한 통증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차라리 관계 이후 서로 안겨있는 시간이 좋았다. 좋아하는 사람과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원하는 것은 좋았지만 그 시간들은 상대방의 만족을 위해 소극적으로 애쓰는 시간이었다. 그 짧고 긴 몇 번의 연애와 주변 친구들과의 사적 대화로 나는 비슷한 나이대의 여자들과 비교해도 욕구가 현저히 낮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6개월~1년에 한 번 정도 구체적이지 않은 욕구가 올라온다고 해도 그냥 잠시 생각하지 않으면 어떠한 액션도 해소도 없이 조용히 지나가는 수준이었다.



이런 무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제대로 된(?) 사람을 못 만나봐서 그렇다는 식의 반응도 심심치 않게 듣게 된다. 무성애도 그런데 하물며 반성애처럼 경계선에 안착하게 되면 인식은 더욱 처참할 수밖에. 약 10년의 공백기 동안에 누군가를 좋아한 적은 종종 있었지만 성사된 사이는 없었기 때문에 성적 접촉도 없었다. 관심 있는 남자와 손을 잡는 정도가 가장 에로틱한 스킨십이었다. 그렇게 지내도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물론 누군가에게 로맨틱한 감정을 느끼고 짝사랑이었지만 깊은 마음을 가지기도 했다. 나는 무로맨틱은 아니었다. 그리고 물리적인 자극에 정상적인 기능은 가능했다. 신체적 성기능 장애도 아니라는 이야기다. 다만 성적 끌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내겐 이런 내가 자연스러웠다. 나의 세계에서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유를 만난 초반에는 드물지만 피지컬적인 관계를 가지기도 했다. 서로 리뷰를 해보니 우리가 잘 맞는 것 같다는 상호 동의도 있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에로틱한 시간을 보내는데 처음으로 복잡 다양한 기쁨을 느꼈다. 신체적으로 완벽한 절정은 아니었지만 내 몸을 보이는 것이 불편하거나 어색하지 않았고 그와 닿고 싶은 욕망을 자주 느꼈다.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텀은 점점 길어져서 내 욕구 주기 이상으로 길어졌다. 처음에는 하고 있는 일이 너무 어렵게 돌아가서 스트레스를 받은 그를 기다렸다. 누구나 생계에 위협을 받으면 그럴만하니까. 그 시간은 점점 길어졌고 달 단위를 넘어 년 단위를 바라보게 되었다. 이 점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관계가 없는 우리 사이에 편안함을 느끼기도 한다는 점이었다.


잠시 참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을 욕구에 신경 쓰이는 것이 싫었다. 여태의 연애경험으로 미루어보면 육체적으로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는 견고한 편견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들처럼 유난히 뜨거운 기간도 없이 우리는 리스로 지냈고 나는 그 원인을 내게서 찾으려고 했다. 내가 예쁘지 않아서, 몸집이 커서, 서툴러서, 나이가 많아서.


이야기를 하다 격해서 운 적도 있었고 씁쓸하게 웃음을 담아 자존심이 상한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애정을 구걸하는 느낌이었다. 그럴 때마다 유는 그런 게 아니라고, 싫은 게 아니라고 말할 뿐 길게 말을 잇진 않았다. 여러 번의 갈등이 있었고 비슷한 패턴이었다. 더군다나 유는 애정표현에 서투르고 인색한 편이라 나는 그의 마음을 알 수 없어 불안해하고 그는 이런 나를 회피했다.


이 모든 갈등은 앞서 말했듯 남자는 육체적으로 표현해야만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무수히 주입받은 탓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육체적으로도 원하길 바랐던 것 같다. 내게도 스킨십이 그리 중대한 척도가 아니면서.



물론 유와 가끔은 야한 짓을 하고 싶다. 욕구에 강하게 지배당하지 않을 뿐이지만. 평소에도 빠른 그의 심박이 점차 빨라지고 뜨거워지는 살갗의 온도와 감기듯 안겨오는 느낌. 밭은 숨과 몸에서 배어 나오는 땀의 촉감이 좋다. 허벅지 근육에서 느껴지는 긴장이나 치밀어 오르는 감각으로 살짝 찌푸려지는 미간이 내겐 퍽 관능적이다.


하지만 가장 좋은 건 모든 과정이 끝나고 느껴지는 상쾌한 느낌. 대부분이 불편함이나 고통으로 귀결되던 것과 달리 신기한 느낌이었다. 각자 몸을 닦고 나면 물을 나눠마시고 나란히 누워 간단히 오늘에 대해 피드백을 나누고 평소에 서로 예민할까 피해 온 주제에 대해서도 대화를 해보는 점도 좋은 점.



사랑의 삼각형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열정이 다소 낮고 헌신과 친밀감이 높은 <우애적 사랑>에 해당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서도 열정이 스킨십 관련에 많은 부분을 할당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우리도 20대 초반의 첫사랑처럼 밤을 달려오던 처음이 있었고, 헤어졌다 다시 만났을 땐 마음이 무너져 부둥켜 끌어안고 눈물범벅이 된 적도 있었다. 치열하게 일상을 유지했고 많은 밤을 옆에서 잠들었다. 어쩌면 그 많은 열정의 순간들보다 지금 우리는 서로의 삶에 밀착되어 있다. 그 모든 디테일도 열정부족이라고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이런 관계도 있는 것이다. 부부나 연인은 각자의 서사가 있고 둘만의 이야기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까.


소중한 사이일수록 적당한 거리감이 중요하고 몸속으로 파고들어야만 진정한 사랑은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이 적당한 것이 이상적이겠지. 한번 달성한다고 끝인 게 아닌 만나는 동안 유지하는 것이 관건인. 소유가 아닌 존재로 그를 받아들이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듯이. 사랑하지만, 역시 섹스하고 싶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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