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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초록 Jun 15. 2024

잠만 자는 사이

사랑은 동반수면의 욕구

두 번에 걸쳐 유의 통보로 시간을 가졌던 우리가 정말로 헤어진 것은 연애를 시작한 지 2년 반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언제나 이별의 형태는 비슷했다. 아주 사소한 일을 불씨로 그는 연애를 지속하는 것을 견딜 수 없다고 했다. 이젠 제발 놔달라고. 더 이상은 못하겠다고, 이제는 정말 그만하자고.


우리 사이엔 각자 말하지 않고 쌓여있는 분진들이 있었다. 분진폭발을 일으키듯 유는 내게 또 이별을 통보했고 언제나 그랬듯이 내 의견을 물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의견이 정말 중요하냐고 내가 싫다고 하면 하지 않을 거였냐고 말했다. 연애와 이별은 그런 것이다. 시작은 두 사람의 협의로 시작이 되더라도 끝은 한 사람의 일방적인 종료선언으로 끝이 난다.


이별할 당시에는 유와 편도 1시간 거리에 떨어져 살던 중이었고 나는 첫 번째와 두 번째를 거치며 조금 무뎌진 마음으로 슬픔을 견디려 애를 썼다. 낮이면 소위 갓생을 살고 친구를 만나고 바쁘게 살다가도 밤이 오면 늘 그 노력이 무색할 만큼 무너졌다. 이사를 나가떨어져 지낸 지 10개월이 지났음에도 같이 보낸 무수한 밤의 기억들과 유가 누워있던 그 자리가 비워진 침대가 가장 힘들었다.


사랑은 동반 수면의 욕구라고 한다. 장기 연애를 해본 분들이라면 아마 공감할 것이다. 같이 있으면 이완되어서인지 잠이 잘 온다는 것을. 서로 무방비해지더라도 안전할 거라는 동물적인 감일지도 모른다.  연애 초기부터 같이 지냈기 때문에 내가 처음 유에게 제안했던 것도 그랬다. 우리가 싸우더라도 가능하면 하루 안에 풀도록 하고 같은 이불은 덮자고. 둘의 성격을 보아 그러지 않으면 장기간의 냉전으로 이어지기 쉬우니 잠은 같이 자야 한다고.


잘려나간 마음으로 먹먹한 기간을 지나 이제는 정말 끝이라는 마음이 찾아오니 그 뒤늦게 찾아온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유튜브를 뒤적여 온갖 이별과 재회 관련 콘텐츠를 찾아보며 혼자 희미한 희망을 가지다가 더 깊은 절망에 빠지는 나날이었다.



그렇게 3주가 지났고 아마도 나와 유의 한계는 한 달가량인 게 분명하다. 앞서 두 번을 그랬듯이 참다못한 내가 어렵사리 마음을 꾹꾹 눌러 보낸 보고 싶어라는 톡을 보내면 며칠 간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알 수 없는 유의 연락이 왔다. 오늘 가도 되겠냐고.


처음 온 날처럼 유는 일을 끝마치고 밤을 달려 내게 왔다. 우리는 말없이 현관에서 한참을 서있다가 누가 먼저인지 알 수 없이 서로 깊이 끌어안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유는 길고 깊은숨을 쉬었다. 마치 물 안에 있다 수면 위로 올라온 사람처럼. 그는 자연스레 내 방의 의자에 앉았다. 조금 긴 침묵 이후 유가 말했다.


    "꼭 얼굴 보고 직접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어."

    "응응."

    "정말... 사랑했었어."


목이 메인 목소리로 말을 하는 유의 얼굴을 일그러졌고 이내 눈물이 맺혔다. 2년 반 동안 그가 우는 걸 본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보통 우리 사이에 우는 건 잘 울지 않는다고 주변에 정평이 나있던 나였으니까.  


    "그런데 왜 그랬어? 내가 싫다고 한 것들을 왜 했어?"

    "미안. 내가 미안해."


나는 유의 머리카락을 쓸며 떨리는 어깨를 안았다. 잘잘못을 떠나 늘 더 많은 상처를 받는 건 그였기에 나는 유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우리는 그간의 이야기를 드문드문 나누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나란히 누워 이마를 맞대고 잠이 들었다. 3주 만에 편안히 잘 수 있었다.


늦은 아침이 되자 출근을 위해 유가 바삐 채비를 하고 있었고  또 올게 라는 말과 함께 집을 나섰다. 나는 그런 그를 배웅했다. 하지만 이것은 재회가 아니었다. 앞서 두 번을 그랬듯이 재회일 거라 생각했던 게 무색하게 유로부터 우리는 다시 만나는 게 아니란 말을 들었다. 그럼 우리 사인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 말만큼 미련한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이미 충분히 그럴만한 나이였다.


    "이제 연애하는 건 아니니까 매일 연락하는 건 자제해 줬으면 해. 호칭은 전처럼 해도 좋아. 그리고 시간이 나면 올게. 나도 오고 싶으니까."

    "그럼 연락은 어떤 주기로 하는 게 맞아?"

    "하지 말라곤 안 할게. 다만 내가 답이 늦거나 그럴 수는 있어."

    "응, 알았어. 그런데 그건 알았으면 좋겠어. 연애는 아니라고 해도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건 어쩔 수 없어. 나를 좋아해 달라고 강요할 수 없는 것처럼 나도 내 마음은 어쩔 수 없으니까. 대신 부담 주지 않으려고 노력은 해볼게."


기묘한 관계의 시작이었다.



1년에 3천 번을 넘기던 통화수가 무색하게 빈도가 시간이 줄긴 했지만 유가 오지 않는 날은 마감 시간에 가까워지면 톡을 하나 남겨두고 그걸 본 유는 시간이 괜찮으면 전화를 해주었다. 연락이 오지 않으면 불안해할 걸 알았기 때문이겠지. 보통은 짧은 시간 동안 어서 자라고 잔소리를 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유는 1~2주에 한두 번 정도 금요일이나 토요일쯤 일이 끝나면 나를 만나러 왔다. 그때마다 우리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연애할 때처럼 끌어안으며 서로의 안녕을 확인했다. 그가 집에 도착하면 보통 자정이나 이른 새벽이었고 저녁 이후로 한참 공복인 유를 위해 함께 간단한 야식을 먹고 옥상에 올라가 달을 보거나 함께 방에 앉아 이야기를 하다가 내 고양이와 함께 셋이서 잠이 들었다. 그렇게 자고 일어나면 다시 출근을 위해 분주히 준비를 한 뒤, 갈게 라는 말과 함께 휙 가버리곤 했다.


 이전의 크고 작은 연애사에서 나는 헤어진 사람에게 연락을 해 본 일이 별로 없었다. 20대 극초반까지는 내 마음을 주체 못 해 그랬던 경험도 있었지만 늘 잔인한 실패가 뒤따랐다. 어차피 관계를 지속하지 못할 만한 서유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고 내 쪽에서 먼저 이별을 고할 정도면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관계가 단절되는 것을 매우 싫어한 만큼 정말 끝을 낼 생각이 아니면 헤어지자는 말을 입에 담지 않는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짝사랑을 할 때야 집념 그 자체라는 말을 들었어도 연애에서는 꽤나 깔끔한 사람이라고 정평이 나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 관계에는 혼란이 왔다. 나로서는 연애가 끝이 났어도 유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안에서 당위성이 충족된 상태였다. 하지만 유의 마음은 알 길이 없다. 인간은 각자 하나하나의 소우주니까. 같이 보낸 시간으로도 그 우주의 작은 은하계 하나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헤어진 사람들 연락처는 다 차단했었지.'

    "응, 그랬구나. 나는 차단하진 않았어. 차단하지 않아도 연락 안 했고 그 사람들도 딱히 연락이 오진 않을 거라 생각했었거든. 그리고 내 생각이 맞았고. 자기가 내게 예외였을 뿐이야. 예외인 게 너무 많아서 예외 종합선물세트 같은 사람이지 자긴."


    '나도 남이 되는 건 좀 그래. 그래서 친구로 지내고 싶어.'

    "친구? 자기가 생가하는 친구가 어떤 건데?"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거나 싫은 건 그렇다고 할게.'


유의 말에 차마 하지 못하고 삼킨 말이 있었다. 어떻게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내가 생을 걸어 사랑한 너를. 말 한마디로 나를 기쁨에 가득 차게 하고 나락까지도 떨어트리던 너를. 지금 이 순간에도 너에게 나는 뭐였어?


그럼에도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이기에. 나는 이 애매모호한 관계를 끊지 못했다. 나에게 그는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가끔씩 내 옆에 와서 편한 숨을 쉬며 잠드는 유를 보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따스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감당하기 힘든 상처들을 주고받았다 해도 내 안에서는 변함없이 사랑스러웠기에.


물론 내 주변 친구들이나 엄마는 이 기묘한 관계에 대해 강력한 의견들을 피력했다. 차라리 잠자리를 하고 싶어서 찾아오는 게 더 아귀가 맞다며 대체 왜 찾아오는지 모르겠다고. 나도 알고 싶지만 알 수 없는 부분이라 그냥 어색하게 웃으며 결국 둘만의 서사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일축하곤 했다. 내 찻잔 안에서 불안의 폭풍이 몰아친다 해도 찻잔을 깨고 싶진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나에겐 친구도, 그에겐 연인도 아닌 사이로 반년 가까이 잠만 자는 사이였다. 나는 여전히 유와 잠들고 싶었다. 바로 옆에 있는데 닿지 못하더라도 그랬다. 깊은 동반수면의 욕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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