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의 이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지금은 비혼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지만 예전에는 독신이라는 말이 있었다. 사전적 의미로 여러 가지 뜻이 있으나 배우자가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미혼이라는 말이 Unmarried person과 대응이 되듯, 최근에는 비혼주의에 대응되는 Non-maritalism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나는 한 자리 대 나이였을 때부터 독신주의자였다. 슬프게도 나의 가족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다. 기억해 낼 수 있는 최초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엄마랑 살래? 아빠랑 살래?'라는 질문에 화를 터트리며 '그런 말 할 거면 고아원에 보내라며 자식을 고아원에 보내고 얼마나 잘 사는지 보자'라고 말했던 너무 어린 내가 애달프게 느껴진다. 아이가 아이답게 자라지 못하면 삶의 난도가 상승한다는 것을 안 것은 고등학교 이후였지만 유년시절 동안 켜켜이 쌓여 퇴적된 불행은 나에게 결혼이라는 것을 부정적인 의미로 각인시킬 수밖에 없었다.
결혼 자체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결혼은 도처에 널려있었다. 지방의 서민층이나 그 아래의 계층이라면 놀랍지도 않은 이야기다. 엄마의 고통을 답습하지 않겠다거나 미래의 내 아이에게 가난을 대물림 하지 않겠다는 것은 한국의 여자들이 결혼을 기피하게 하는 이유 중에 흔한 것이었다. 나 역시 처음 독신을 생각할 때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지금의 내가 비혼주의인 것은 그렇게 단순한 이유는 아니다. 앞서 말한 이유와 더불어 약 40년을 살아오면서 해온 선택들의 결과였다. 물론 기혼자 친구들은 내게 없는 안정적인 전세 및 자가의 집을 가지고 있고 법적으로 인정된 근사한 배우자, 때론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이들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의무를 지는 만큼 혜택과 온당한 권리를 누리면서 산다. 그 모든 것이 전혀 부럽지 않은가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태어나면서 주어진 혈연의 가족이 나를 가장 힘들게 했기 때문에 자기 주도적으로 만들어 나갈 가족을 가지고 싶었다. 실패한 결혼의 산출물이었던 만큼 절대 실패하지 않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결혼이 좀 어려운 일일까? 나의 니즈와 상대방의 니즈, 심지어는 그 가족의 니즈까지 맞아야만 하는 지난한 과정을 생각하면 늘 아찔했다.
그런 나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은 자유였다. 선택도 책임도 스스로 결정하고 짊어질 수 있는 자유. 망하더라도 혼자 망할 수 있는 자유. 좌우명인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살게 된다는 말처럼 제약이 많은 삶이라도 그 틀 안에서는 내 뜻대로 살기 위해서.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술을 습득해 직업을 가질 수 있었다. 뒤늦게나마 대학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고 지역을 옮겨 다녔으며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과 친구로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유와 만났다. 이제 두 번 다시는 이별하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정해 둔 금기를 깨고 내가 정한 마지막 사랑이었다.
원가족과 사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던 내게 유는 유일하고 특별했다. 그 역시 가족과 일찍 떨어져 살아왔다 했다. 같이 잠드는 것이나 함께 밥을 먹는 것, 눈을 뜨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행복이라던 기혼들의 말이 떠올랐다.
그 무수한 말에 생략된 의미를 전부 다 알 수는 없었지만 살면서 한 번도 가져보지 않은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이대로 지독히 얽혀서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 하고 싶다는 욕망. 절대 헤어지지 않도록 어떤 것으로든 유를 구속하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
"더 나이 들면 본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혼자 살 거야."
"혼자?"
"응. 난 혼자 지내야 하는 사람이거든."
나랑 같이 지내는데도 무심하게 말하는 유를 보면서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았다. 그 또한 나처럼 비혼주의자라는 걸 모르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100명의 비혼주의자가 있다면 그 디테일 케이스 역시 100가지인 것이다.
"있잖아, 나는 자기가 늙어가는 걸 보고 싶어."
"왜?"
"30대가 된 자기도 궁금하고 더 나이가 들어서 중년이 되고 노년이 된 자기를 쭉 지켜보고 싶으니까."
"그걸 꼭 바로 옆에서 지켜봐야 하나? 그리고 이대로 사는 것도 괜찮잖아."
"결혼을 바라냐고 하면 조금 달라. 나 역시 K-결혼에 대해선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내 어머니의 말도 잘 안 듣는 내가 다른 사람의 부모님을 모신다는 것도 이상하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기도 더 나이가 들 거고 자기 가족들은 이런 삶의 방식을 이해하기 어려울 거야. 내가 아니라도 결혼을 종용하실 수도 있지."
"내 가족은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그래. 이 주제는 다음에 더 이야기하자."
분위기가 더 과열되기 전에 나는 적당히 대화를 중단했다. 주변에 나이차이가 있는 동생들까지 결혼을 하다 못해 이미 학부형이 나오기 시작한 내 친구들과는 달리. 유는 이제 겨우 30대 초반의 남자. 주변의 여자들은 결혼한다고 해도 아직 동성 친구들조차 결혼한 케이스가 드물 것이고 자신의 삶을 경영하는 것조차 완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결혼에 대한 직접적인 화제가 아니라도 달갑지 않을 만했다.
연애의 끝은 이별 아니면 결혼이라는 말이 한 번씩 생각났다. 그리고 한번 헤어지고 다시 만났던 이후라 이미 이별하지 않는 관계란 없다는 걸 다시 깨달았던 때였다. 결혼을 해도 이혼이 있고 백년해로를 해도 한날한시에 가지 않는 한 우리는 필연적으로 이별을 겪게 되었다. 변하지 않는 절대 명제는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이기 때문에.
아버지를 갑자기 잃었던 것처럼 나는 항상 이별에 대비하며 살아왔던 거였고, 대비했음에도 넓어졌던 세계 한쪽이 없던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나 사랑할 때 많은 무수한 약속들이 덧없어지는 것을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다.
회사를 다닐 때 가슴속에 품고 다니는 사직서처럼 나는 언젠가의 연애결말을 두려워하면서도 무형의 편지를 항상 품고 있다. 그날이 내일이라도, 혹은 나의 평생이라도 상관없다. 나는 유와 함께 하는 현재를 언제나 긍정하기로 했다. 우리는 누군가의 반려가 아니라 각자의 이름으로 살아갈 것임에.
나와 그가 서로가 없는 30여 년 이상을 저 나름대로 살아왔고 함께 한 기간은 고작 몇 년에 불과하지만 헤어진다 해도 한동안 마음 아파하고 힘들어하더라도 또 앞으로의 삶을 살아갈 것을 알기에. 우리가 서로에게 누군가로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의미인 것조차 기억나지 않는 일이 된다 해도.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라고 생각하며.
결혼, 하지 않는다는 것은 현재의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