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사랑 타령이 아니야
나와 유의 대화는 생각만큼 원활하지만은 않다. 보통은 내가 열심히 뭔가를 떠들고 유는 조용히 들으며 음, 응 하는 많은 것이 축약되어 있는 추임새를 넣거나 고개를 약간 까닥인다. 꽤나 오랜 시간 이런 응답 방법이 불만스러웠지만 지금은 '너의 말을 듣고 있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뇌내 협의가 될 만큼 이제는 유와 보낸 시간이 짧지 않다.
아마 2~3달 전쯤의 일. 유는 업무 특성상 잦은 저녁 술자리가 있었고 그날도 아마 그런 날이었다. 눈이 슬며시 풀려서 들어온 유를 맞이하자 언제나 그렇듯이 서로 꾹 끌어안고 만나면 반갑다고 뽀뽀뽀라는 가사처럼 세 번 입을 맞춘다. 슬슬 자야 할 시간이었지만 유와 짧은 대화를 했다. 대부분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그렇게 중요한 내용들은 아니었다. 서로 저녁은 뭘 먹었냐는 간단한 근황체크 이후에 나는 또 소소한 일들을 조잘거렸고 유는 피곤한지 알코올 때문인지 나른한 눈을 조금 껌뻑 거리며 내 이야길 듣고 있었다.
"... 그래서 말인데 나, 자길 좀 팔아먹어도 되려나?"
"응?"
3년 반의 시간 동안 나와 유는 여러 번의 이별이 있었고 서로 견딜 수 없을만한 갈등도 많았다. 사실 처음 유를 만나고 1년 간은 내 마음이 너무 벅차 어디에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기록을 하지 못했었다. 나는 내 감정들을 어디엔가 기록해두고 싶어서 정말 간략한 몇 줄의 문단으로 써서 저장해두고 있었다.
언젠가 이 사랑이 끝나더라도 잊고 싶지 않았던 마음과 유를 만나면서 깨달은 많은 것들, 그리고 함께 시간이 흐르면 내 머릿속에서 미화되는 대로 그 순간순간의 감정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남겨두고 싶었다.
"한 번만 말할게. 잘 들어. 내가 지금 술에 취해서 하는 말이 아냐. 진심이야. 대신 내가 한 말들을 믿고 재차 확인하지 마."
"아니, 그게 아니라!"
"나를 팔아도 돼. 자기에게 그게 그 무엇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그래도 좋아. 나를 팔아서 자기가 잘 지낼 수 있다면 몇 번이고 그렇게 해."
나는 그의 말에 뭐라도 반응을 해야 해서 고갤 끄덕일 뿐 쉬이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인터넷 어딘가에 나의 내밀한 이야기를 쓰는 것도 많은 용기가 필요하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나 하나가 아니다. 유 역시 내 이야기의 공동주연이기에.
이태원 역에서 보았던 그 어딘가 모르게 간절했던 눈처럼 유는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표현을 잘 못하는 사람이기에 연애 초기의 예쁜 말과 달콤한 표현과는 달리 인색해져서 속상한 날이 주말을 제외하고 주 5일제 정규직 마냥 1년에 250일쯤 있었지만 저 눈은 진심이라는 걸 내가 모를 리 없었다.
"마악 나쁘게 쓰지 않을게."
"그래. 그건 자기의 영역이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사실 정말 이렇게 불특정 다수가 보는 곳에 나의 내밀한 개인사를 풀어놓을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 이 이야길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 망설이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유의 투박하고 서투르지만 열기 가득했던 그날의 응원 때문이었다.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가 아니기에 나와 유의 실제 모습을 누군가 본다면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편집할 수 없는 삶의 모든 순간의 구질구질한 것들과 현실적인 것들이 우리를 가득 에워싸고 있기에. 그 숨 막히는 현실에 내가 유를 놓아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던 것도 최근. 그렇게 오랜 시간 힘을 주러 붙드느라 툭 불거졌던 손아귀에 힘을 풀던 나였다.
"나 예전에 친구에게 그런 악담을 들은 적이 있었어."
"어떤?"
"네가 지금 철없고 세상 물정을 모르니까 그러지. 너 나중에 아무런 스펙도 없이 공장 생산직이나 다니면서 하루에 12시간씩 일하거나 쪼들려서 길거리에 나앉을 정도가 되어도 사랑타령 할 수 있겠냐고. 그때 가서도 사랑타령 하나 보자고."
"그래서?"
"갑자기 그 말이 막 생각이 났어. 우리가 지금 서로 각자의 일로 너무 힘드니까 이게 맞는 건지, 내 감정들이 사치 같아서."
"사치... 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데도 같이 있잖아, 우리."
유는 내가 좋아하는 그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에 약간 힘을 주어 이어 말했다.
"그 모든 어려움이 와도, 상황이 안 따라줘도 어떻게든 같이 있으니까. 그거면 되는 거 아닐까?"
깨달음은 파랑새처럼 가까이 있었다. '어디 안 가니까'라는 말에 마음이 이끌려 먼저 놓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다짐과 함께 이 모든 시간을 감내했던 나였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했던 일들을 후회할 뻔했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기로 했다. 유를 팔아먹기 위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옆에 앉은 유가 물어온다.
"내 이야기라면서 난 안 보여줄 생각이야?"
"응. 다음에? 자기표현에 따르면 죽기 직전 언젠가인 그다음쯤에?"
"참..."
그와 함께 한다는 건 현재를 살아간다는 것. 과거로 달아나거나 미래로 도망치지 않고 지금 이 시간을 살아내는 것. 그래서 이건 사랑 타령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