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초록 May 18. 2024

"다녀왔어." "어서 와."

밤의 기억이 더 많았던 우리는

누구와 같이 살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정돈되지 않은 삶이지만 나의 작은 집은 혼돈 속의 질서로 이루어진 하나의 테라리움이었다.


딱히 내향인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것이 인터넷으로 해결되는 현대사회에선 쓰레기를 버리는 날을 제외하고는 2~3달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잘 지낼 수 있는 게 자칭 집순이인 나였다. 가끔은 외로울 수도 있지만 대화를 있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컴퓨터나 폰만 던져주면 혼자서 노는 타입에다 박봉이긴 해도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내겐 돌보아야 고양이가 있었으니까.



그런 나의 일상 속으로 그가 들어왔다. 이제부터 편의상 그를 <유>라고 부르기로 한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땐 단 한시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다. 예전에 동생과 살았었기에 이미 두 명 이상 분의 세간살이는 늘 구비되어 있는 집이라 새 칫솔을 하나 더 꺼내는 걸로 우리는 함께 지내게 되었다.


나는 일정한 출퇴근 시간을 가진 소위 9-6 직장인이었지만 유는 조금 특이한 근무시간의 사람이라 서로 마주 볼 수 있는 시간이 아주 짧아서 눈을 뜨고 서로 보는 그 시간이 너무 소중했기에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다가 3일쯤 지나면 그제야 갈아입을 옷가지들을 가지러 하루쯤 떨어져 보냈다. 그 시간에도 잠들기 전까지 통화를 하면서. 그런 루틴이 세 번쯤 반복되었을 때쯤, 


   '지금 문자가 하나 갈 텐데, 혹시 봐줄 수 있어?'


긴 통화 중에 유가 말했다. 통화가 많은 만큼 통화를 할 수 없을 때를 제외하고는 톡도 처음만큼 자주 하진 않아서 작은 의문이 생기려던 그때, 바로 문자가 왔다.


발신처는 정부24, 전입신고 세대주 확인 서비스에 대한 내용이었다. 너무 어이가 없으면서도 나름 서프라이즈였는지 의기양양한 유의 목소리를 들으며 귀엽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내 동거인으로 유를 승인했다. 집에 돌아온 유의 손에는 캐리어가 들려 있었다.


    "다녀왔어."

    "어서 와!"

    "이젠 쭉 같이 있어도 될 것 같아."


나는 기쁘게 유를 끌어안았다. 이 허그는 우리 사이의 의식이 되었다. 그때로부터 3년도 넘게 지난 지금에도 우리는 집에 먼저 온 사람이 나중에 온 사람을 맞아주며 서로 끌어안고 깊은숨을 내쉰다.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올 곳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뒤섞인 작은 리추얼. 다투거나 불편할 땐 가끔 상대를 상처 주고자 스루 하지만 이제는 그 의식을 생략하는 걸 마음 쓰여할 정도로 긴 시간을 들여 쌓아 올린 룰이다. 언젠가의 내가 그토록 바라던 장면이기도 했다.



20대엔 일본 드라마를 참 많이도 보았다. 좋아하는 장르는 수사물이나 추리물이었지만 비슷한 듯 다른 문화권에서 잔잔하게 지나가는 삶의 흐름이 좋아서 로맨스나 일상물도 많이 보았는데 일본 콘텐츠에는 꼭 드라마가 아니라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중에서도 이런 장면이 제법 많았다.


밖에서 돌아온 사람과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늘 같은 인사로 맞아주는 장면. 근사한 외모와 성품을 갖춘 남자주인공의 사랑이나 화려한 이야기들보다 그런 일상이 부러웠다.



나와 유도 각자 10년 이상 자취해 왔기 때문에 텅 빈 집에 혼자 들어오는 마음을 잘 알고 있다. 아무렇지 않게 집이다! 하며 기분 좋게 들어오는 날도 있겠지만 이적의 노래 <달팽이>의 가사처럼 잔뜩 지쳐서 오는 날도 있는 법이다. 불 꺼진 현관에 멍하니 서서 느껴지는 한기에 울음을 삼키는 날도 있다. 내 몫의 삶을 살아간다는 건 그토록 외로운 일이니까.


처음 함께하는 크리스마스는 눈이 잔뜩 쌓여있었다. 나는 유의 자취방에 처음으로 가보게 되었다. 한 달 넘게 방치하던 이사를 위해서였다. 나의 집보다 훨씬 작은 방은 가구나 물건도 워낙 적었지만 비어있었는데도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오히려 그 생활감이 없는 방이 조금 서글펐다. 아마도 씻거나 잠을 자는 것이 전부일 그런 방. 이 차가운 방으로 돌아왔을 잔뜩 지친 유의 삶을 보듬고 싶었다.


벙커 침대를 낑낑대며 분리하고 챙겨야 할 짐들을 박스에 담고 밀봉했다. 작은 방이어도 이사란 건 늘 힘든 법이라 박스는 총 4개가 나왔다. 박스들을 도보 10분 거리의 편의점으로 가서 택배를 접수하고 다시 돌아와 분리한 벙커침대 부속품들과 방을 정리하며 나온 먼지와 쓰레기를 봉투에 담아 지정 장소에 버렸다.


택배로는 파손 위험이 있는 물건들과 당장 써야 할지도 모르는 컴퓨터와 모니터 외 몇 가지 물건들을 챙겨서 택시를 부르려니 크리스마스 오후라서 잡히지 않았다. 한창 실랑이하던 참에 온갖 택시 관련 앱을 보다가 타다 앱에서 신규회원 반값 쿠폰을 주길래 30분 만에 겨우 배차받을 수 있었다.


    "이런 크리스마스는 생전 처음이야, 나."

    "나도 처음이야."


차의 앞 뒤로 앉아서 짐에 둘러싸여 기사님에게 눈치가 보였지만 우리는 소리 내어 웃었다. 불과 한 달 전쯤 유가 새벽을 달려 내게 온 그 루트대로 우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5층을 올라 집 현관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내려놓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끌어안았다. 다녀왔어.



유와 함께 하며 외로운 날은 현저히 줄었다. 집에 가면 유가 있었다. 없더라도 내가 유를 맞아줄 수 있었다. 데이트를 한다거나 뭔가 대단한 걸 할 수 있는 시간적/금전적 여유는 없었지만 같이 온기가 가득한 밥을 해 먹고 의미 없는 이야기들도 조잘거리며 웃다가 잘 자라며 이불을 덮어줄 수 있었다.


어느 시간에 우리가 헤어진다고 해도 나는 유의 삶에 외롭지 않았던 어느 계절을 주고 싶었다. 나 역시 유로 인해 그 시간은 외롭지도 초라하지도 않았다고 말할 수 있도록 살아가고 싶었다.


비혼주의자인 두 사람의 연애결말이 결혼이 아니라 이별인 것은 이미 정해져 있다 하더라도 나는 조건 없는 사랑을 시작했다.

이전 04화 봄날은 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