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우린 뭐였을까?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라는 영화를 나는 참 좋아했다. 개봉한 지 3일 만에 부산의 한 극장에서 당시 첫 연애라 생각했던 남자친구와 보았던 영화. 겨우 고등학생이었던 내게 모든 게 와닿을 수는 없는 난해한 내용이었지만 첫 남자친구를 만나기 이전 내 나름의 풋사랑을 겪은 다음이라 그랬을까 상우에게 쉬이 이입했다.
가장 좋아하는 남자 배우인 유지태와 가장 사랑하는 뮤지션인 김윤아의 목소리가 좋았던 OST도 그랬고 사운드 엔지니어인 상우가 소리 속의 배경이 되는 모든 장면이 그저 좋았다.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나도 보리밭 한가운데 선 상우가 되어 같이 눈을 감았다. 사랑의 시작부터 열병과 끝에 다다랐다가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지는 100분가량의 영화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같이 영화를 본 남자친구의 얼굴이 매우 지루하고 떨떠름했던 것 따윈 지금 겨우 기억해 내야 할 정도로.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나는 상우의 나이가 되었다. 치기와 푸른 봄을 주체할 수 없이 밤을 지새우곤 하는 20대가 되었다. 별 것 아닌 몸만 큰 어린애 같던 나와 똑같이 치기 어린 그 남자애들을 뭣도 모르고 좋아하곤 했다. 그러다 그 순간엔 단 하나밖에 없는 그런 사랑도 했다. 더 나이가 들어 30대, 은수의 나이가 되고서도 나는 은수보다 상우의 마음에 더 가까웠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며 울먹임을 삼키는 순간들.
개인의 비극처럼 만남과 이별 그리고 사랑을 반복하고 아주 오래 쉬는 시간을 보낸 후 상우와 은수를 모두 이해하게 된 지금의 나에게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상우가 술에 취해 강릉까지 택시를 타고 달려가는 장면이었다.
그건 분명 사랑이었을 거라고. 시간이 지나 사랑이 아니게 되더라도 그 순간은 사랑뿐이었을 거라고.
이태원에서 두 번을 환승해 1시간 반 가까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조금 멍한 기분이었다. 나를 바라보고 있던 눈, 뜨겁게 그러쥐었던 손의 떨림. 며칠간 수면부족이어서 그런 걸까. 아직도 마음이 일렁였다. 어디 안 가니까 라는 말이 아직은 낯선 그 목소리가 자꾸 맴돌았다. 집에 도착해 간단하게 씻고 침대에 누워 그동안 주고받았던 메시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3일간 약 32시간가량의 대화는 제법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물론 새로운 낯선 이와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내가 보이고 싶은 이미지들을 보이게 되기도 하지만 오고 간 이야기를 천천히 읽어 내렸다.
그와 닮은 점은 닮아서 신기해하고 다른 점은 다르기에 새로운 세상을 본 듯 흥미로운 것이야 말로 우리 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다. 고작 3일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렇게 한참 대화를 들여다보니 시간은 자정을 넘어 1시가 되고 그에게 처음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회식을 끝내고 취기가 감도는 목소리, 피곤해서인지 목 뒤가 살짝 눌린듯한 목소리였다. 일요일의 만남에 대하여 상의를 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길 하다 보니 2시간이 훌쩍 지났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느낌.
"벌써 3시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마치고 다시 볼 걸 그랬나 봐요."
"ㅎㅎ 그럼 저는 새벽 1시까지 바깥을 배회했어야 했어요? 우리 일요일에 만나기로 했잖아요."
"아, 제 생각이 짧았어요. 그런 건 아니지만 사실 지금이라도 뵙고 싶어요. 일요일까지 길게 느껴져서요."
나는 그 순간 봄날은 간다를 떠올렸던걸 지도 모른다. 평소에도 장난기 넘치는 사람이어서였을지도. 혹은 그가 술에 취했듯 나도 그가 나직하게 속살거리는 한 밤의 속삭임에 취했던걸 지도.
"그럼 지금 올래요?"
"... 잠시 후에 걸게요. 기다려주세요."
갑자기 전화는 끊어지고 나는 영문 모를 상태로 폰을 바라볼 뿐이었다. 다행히도 5분쯤 지나자 다시 전화가 왔다. 숨을 몰아쉬며 그가 말했다.
"택시 탔어요. 기사분 바꿔드릴 테니 근처의 주소 말씀해 주실래요?"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택시기사가 주소를 물었고 나는 집 주소를 말했다. 그 짧은 순간에 다른 주소를 찾아서 말할 수는 없었다. 분명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우리는 언제나 그 순간에 가장 맞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선택하니까.
주소를 불러 준 그 순간부터 나는 어질러진 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코로나 시국이어서 24시간 오픈하는 카페는 대부분 사라진 뒤였다. 집으로 이 사람을 부르는 게 맞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할 수 있는 건 집을 치우는 것뿐이었다. 주중엔 엉망으로 두고 주말에나 겨우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루틴이라 어떻게든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 소음이 전해진 건지 전화 너머의 그가 웃었다.
"갑자기 바빠지신 것 같은데."
"집이 엉망이라..."
"그럼 제가 잠시 끊는 게 편하실까요? 금방 갈게요."
쓰레기가 널려있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고양이 두 마리와 혼자 사는 집이라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벤토나이트 모래를 쓸고 책상과 의자에 걸려있는 옷가지를 세탁기 속으로 집어넣었다. 정말 무슨 정신이었는지 모르게 1시간 가까이 집의 이곳저곳을 치웠다.
설거지를 마치고 먼지가 묻은 잠옷을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세수를 했다. 최선을 다했다며 잠시 숨을 돌릴 때쯤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새벽 4시.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백팩을 멘 채로 긴장한 얼굴의 그가 보였다. 사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고작 이태원역에서 헤어진 지 7시간이 지난, 밤보다 아침에 가까운 이 시간에 6층 같은 높이의 5층 계단을 뛰어올라온 건지 조금 상기된 얼굴.
"오라고는 했지만 사실 실감은 안 나네요! 일단 들어와요."
"저도 믿기지 않아요."
방으로 안내했는데도 백팩 끈에서 손을 놓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는 그가 우스워서 갈아입을 것이라도 주냐고 묻자 따로 챙겨 왔다며 메고 온 가방 안에서 작은 곰돌이가 그려진 네이비색 세트 잠옷이 나오자 정말 웃음이 나와버렸다.
"아니, 잠옷까지 가져왔어요? 본격적인데."
"막연히 만나 뵙고 나서는 저 혼자 어디 숙소라도 잡아서 잘 줄 알았어요..."
"알았어요~ 어서 갈아입고 자요. 늦었으니깐."
잠옷으로 갈아입은 그는 처음 본 인상보다 훨씬 앳되보였다. 사회인의 얼굴 아래엔 솜털 보송한 20대의 얼굴이 있었다. 침대 안쪽을 내어주고 베개를 반듯하게 다듬고 이불을 목까지 덮어주며 잘 자요 하고 인사를 했다. 열기가 느껴지는 마르고 뜨거운 몸이었다. 그렇게 통성명을 한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은 사람의 허리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며 눈을 감았다.
그날 우리에게 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1시간 가까이 밤을 달리는 택시 안에서 당신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때의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이 이후로도 우리는 가끔씩 밤을 달렸다. 다만 서로가 보고 싶어서. 가슴과 가슴을 맞대고 깊은숨을 내쉬기 위해서. 그 모든 시간의 시작은 그날 11월, 그 봄날 같던 밤이었다.
하루 뒤, 볕이 잘 드는 카페에서 마주 보고 있는 그에게 '내게 어떤 호칭이 되고 싶으냐'라고 물었다.
'남자친구'라는 답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