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호선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다.
새벽 다섯 시 반, 울릴 리 없는 알림 소리에 잠을 깼다.
고마웠다고 남겨두고 잔 그 메시지가 원인이었다. 금방 잠에서 깬 건지 시간도 인지 못한 채 횡설수설 너무 피곤해서 대화하다 말고 잠들었다며 죄송하다며 음절 단위로 끊어진 메시지가 실시간으로 여러 개 왔다. 사실 약간 귀여웠다. 차분하게 대답을 했다.
'잠든 것 같은데 혹시나 대화가 불편했나 해서 대화의 종료나 지속 여부를 넘겨드리고 싶어서 그렇게 남긴 건데 많이 놀라셨어요?'
'네... 일어나자마자 미리 보기에 고마웠어요.라는 말이 보여서 마음이 철렁했어요.'
잠은 정말 깨버렸고 어제 새로 시작한 업무는 데드라인이 조금 타이트해서 나는 조기출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야근보다는 이 편이 편했다. 서늘한 겨울 아침의 새벽 공기도 나쁘지 않았고 텅 빈 사무실에서 혼자 차분히 내 페이스대로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지하철은 첫차 운행을 시작했겠지만 생각보다는 피곤했기에 카카오 택시를 불렀다. 기사분에겐 내릴 때 안 일어나면 깨워달라는 말을 남긴 채로 약 30분 동안 택시 안에서 완전 잠이 들었다.
불 꺼진 사무실을 열고 들어가 차가운 물을 한 잔 마시고 업무 시작과 함께 대화도 다시 시작되었다. 퇴근할 때까지도 집중하다 조금 틈이 나면 메시지를 남겨두고 답을 읽고 또 답장을 남겨두고.
'저는 원래 낯을 가리지 않아서요, 성별을 가리지 않고 친해지고 싶은 분이 있다면 시간이 맞으면 차나 한잔 하자는 말을 참 잘하는데 어쩐지 지금은 그런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왜 그런 생각이 드세요?'
'음, 어쩐지 신중하실 것 같은 분이라?'
'2주 뒤면 시간이 조금 날 것 같은데 그때 뵐까요? 그리고 내일은 회식이 있어 저녁 이후론 연락이 어려울 듯한데 괜찮으신가요?'
'(동의를 구할 정도의 사이는 아니지 않나?)네, 저도 내일 약속이 있어서 괜찮아요.'
그렇게 잠들기까지 대화를 하고 다음 날도 흐트러진 일정으로 새벽에 깨어 조기출근을 했더니 컨디션은 엉망이었다.
들뜨는 마음. 마치 구름을 밟는 듯한 감촉.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부유하는 감각. 카페인 하이가 온 순간처럼 심장은 부자연스레 뛰었다. 사실 알고 있다. 이 모든 감각은 머릿속의 호르몬들이 뒤섞이는 감각일 것을.
더군다나 잠이 부족한 상태에서 오전 내내 두통이 일어 진통제를 꺼내 먹고 점심을 먹지 않고 눈을 붙이려는데 조심스레 메시지가 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퇴근길에라도 잠시 뵐 걸 그랬다길래 빨리 쉬고 싶은 마음에 네네 그러셨군요 의외네요 하며 건성으로 대답을 하고 잠시 눈을 붙였다. 두근거림을 억누른 채.
한숨 잔 덕분인지 그나마 조금 더 나은 컨디션으로 퇴근을 두 시간쯤 앞두고 있던 그때.
'퇴근 후, 잠시만 뵐 수 있을까요?'
'아? 저 퇴근하고 약속이 있는데요? 녹사평 역으로 가야 해서요. 이동시간만 30분이라 시간이...'
'그럼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
여전히 어딘가를 부유하는 듯한 내 기분이야 어떻든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 퇴근 시간이 되었다. 다크서클이 가득한 얼굴을 거울 속에서 확인하고 옷매무새라도 다듬고 회사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기로 했는데 두 사람 다 자기주장이 강해서인지 서로 그쪽으로 가겠다며 20분쯤 엇갈려 헤매다가 횡단보도 너머에 그로 추정되는 사람이 보였다.
낯을 가리지 않기로 유명한 나지만 이상하리만치 정말 어색했다. 3일간 밤낮없이 대화한 사람이 맞나 싶게 서로 딱딱하게 인사를 하고 곧장 상수역으로 걸어 녹사평역에 도착했다. 며칠간 대화를 하는 동안 손 잡는 것에 큰 의미를 두는 편이라고 대화했던 게 떠올라서 손을 달라고 했다가 이상한 여자를 보는 눈으로 슬금 뒷걸음질 치는 그를 보며 망신살이 제대로 뻗었구나 생각했던 건 작은 에피소드.
내 약속이란 게 사실은 한 달 전부터 예약해 놓은 카페에서 별자리점을 보는 일이었기에 30분 정도 남는 시간에 마침 나의 예약이 밀려 30분 정도 더 대기해 달라는 말을 듣고 차라도 마시는 게 맞을 것 같아 함께 자리에 앉았다.
조명에 있는 곳에서 마주 본 그는 마르고 완고한 인상이었다. 꾹 다문 입과 안경 너머의 약간 가느다란 눈매. 작고 나직한 목소리. 금요일 퇴근 후의 노동자들이 그렇듯이 다소 피곤함이 서려있는 얼굴. 조용하고 정적인 인상.
혹시 취향이냐고 하면 아니었다. 아직 무엇도 아닌 사이의 사람을 평가의 기준에 올려놓는 건 실례되는 일이지만 처음에 그에게 말을 걸었을 때 그랬듯이 그는 나에게 남자이기보다는 낯선 '사람'이었다. 어쩌면 특별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가진.
차를 마시며 이야길 이어가다 보니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았다. 1시간은 금방 지나고 별자리 점을 볼 시간. 사람을 불러다 놓고 그냥 가보라고 하기에 미안해서 같이 들어가시겠냐고 물었다. 그는 동의했고 나는 처음 만난 지 1시간 즈음 지난 사람에게 내 신상이나 성격을 아주 많이 공개하게 되었다. 점성술사가 궁금한 게 있냐 물을 때 아이스 브레이킹을 하겠답시고 내가 무리수를 둔 말은 아직도 기억에 남을 수밖에. 정말이지 망신살이 가득한 날임에 분명했다.
"저 이 분이랑 연애나 해보려고요."
그릇된 아이스 브레이킹 시도에 어이없어하는 점성술사와 어쩐지 초점이 많이 흐려진 그.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서 물으니 미친 여자인 줄 알았다며 꽤나 크게 웃으며 말했다.
"뭐, 연애하시려거든 그러세요. 못할 것 없지요."
그렇게 민망함 속에 시작된 리딩은 개인적인 방향성이나 직업에 대한 이야기들을 주고받다가 서로 잘 맞는지 봐준다는 점성술사의 배려로 컬러 카드를 고르는 시간까지 이어졌다. 나는 다크 블루, 그는 블루를 골랐다.
"좀 특이하네요. 비슷한 색이 나왔다는 건 좋은 신호죠. 여자분이 조금 어둡긴 하고요. 그리고 블루 컬러는 보통 비즈니스 관계의 느낌이라... 그래도 두 분이 대화가 잘 통할 수 있겠다.라고 말씀 드릴 수 있겠네요."
30분가량의 점술이 끝나고 카페를 나와 이태원역으로 함께 걸으며 한껏 어색해진 분위기에서 나는 어쩐지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 사람과 연애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닌데 고작 3일의 대화로 내가 그에게 끌리고 있다는 것이 조금 창피하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아직 아무런 사이도 아니니 마무리라도 잘 지어야겠다고.
"오늘 시간은 짧았지만 저 만나서 어떠셨어요?"
갑자기 걷던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선 그가 나를 마주 보고 서서 조용하게 말했다.
"저는 연님이 괜찮으시다면, 더 알아가보고 싶어요."
"아? 네. 저도 그런 것 같아요."
이틀 뒤에 다시 보자는 약속을 하고 어쩐지 조금 전보단 가까워진 기분으로 이태원역이 가까워질 때 그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얼마 전에 지음으로부터 신기한 이야길 들었다고. 곧 연상의 누군가를 만나게 될 텐데 그 사람이 나인 것 같다며.
이태원역에 도착해 개찰구 앞에서 그와 나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아쉬움이었을까.
"이후 일정이 중요한 일이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 발걸음이 안 떨어지네요."
"그래도 이틀 뒤에 다시 볼 거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 답했지만 속에선 순간 난리가 나버렸다. 이 남자 뭐지? 이런 말을 어떻게 눈을 똑바로 보면서 할 수가 있지? 하지만 난 산전수전 다 겪은 30대 중반의 날긋하게 닳은 여자라고요. 눈앞의 남자는 깊은 숨을 한번 쉬고는 내게 다시 말했다.
"손을 주시겠어요?"
내가 얼떨결에 손을 내밀자 뜨겁고 조금 거친 손이 내 손을 꽈악 잡았다. 그리고 그 손은 떨리고 있었다. 빠른 리듬의 박동이 전해졌다. 올곧게 나를 응시하는 눈은 간절함마저 느껴졌다.
"어디 안 가니까, 언제든 연락해요."
어디 안 가니까.라는 말이 나를 관통했다. 더 이상 헤어지지 않을 누군가를 바라던 내게 고작 안 지 100시간도 지나지 않은 그 사람의 말이 마음속으로 큰 소릴 내며 떨어졌다. 친구들에게 평생 연애를 안 하겠다며 선언한 지 1년 뒤의 일이었다.
있잖아, 그럼 그때 어느 순간부터 고백이었어? 이태원역에서 마주 봤을 때?
- 아니, 더 알아가보고 싶다고 말했을 때부터. 사실 머릿속이 하얘져서 그 말 밖엔 생각이 안 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