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마세요, 하늘에서라도 뚝! 떨어질 테니까요.
2020년 11월 11일, 그날은 참 이상한 날이었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30분은 가뿐히 일어난 날, 11월 중순이라 생각하면 포근한 날씨였지만 롱패딩을 둘러쓰고 평소보다 조금 여유롭게 집을 나와서 지하철에 교통카드를 태그 할 때 미묘한 이물감이 들었다. 그래도 비교적 활기 찬 하루의 시작이라 신도림에서 환승을 하고 꽉 찬 2호선을 탔는데 잠시 밀리는 사이에 패딩 지퍼가 문 사이에 낀 것은 나를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무리 당겨봐도 패딩이 찢어졌으면 찢어졌지 꼭 다물린 지하철의 문이 열릴리는 없었다. 운전석으로 연락을 넣어야 하나 고민했지만 출퇴근 시간의 2호선이라 그런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호흡을 가다듬고 2호선 문 열리는 방향을 검색하니 불행히도 내가 내릴 곳인 합정을 지나치지만 다행히 다음 역인 홍대 입구에서 지금 이 굳게 닫힌 문이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홍대에 도착하자마자 건너편에 보이는 신도림행 열차를 타기 위해 뛰었다. 아슬아슬하게 세이프하고 합정역에서 내려서 카드를 태그 하는데 아, 왜 불길한 느낌은 이다지도 정확한 걸까.
"승차처리가 안 된 승차권입니다."
비상벨로 역무원 분을 불러 개찰구를 나와서 시간을 보니 30분 일찍 일어났지만 늘 도착하는 그 시간이었다. 여러 가지로 운이 나빴던 아침이지만 억지텐션으로 이 기분을 끌어올리고 싶었다. 마침 빼빼로 데이라 사무실 분들에게 나눠 드릴 빼빼로 10통을 사서 회사로 향했다.
역시 사람은 이럴 때 안 하던 일들을 한다. 다운로드만 하여두고 잘 들여다보지 않던 운세앱을 켜서 오늘의 연애운을 점쳤다. 11년 차 무연애자인 나에게 주어진 카드는 Ace of cup.
오늘 당신의 연애운은 최고조! 새로운 사랑의 예감이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만한 일이 없으시다고요? 걱정 마세요, 하늘에서라도 뚝! 떨어질 테니까요.
그럴 리가. 피식 웃으며 앱을 끈 건 당연한 일이었다. 회사에 도착해서 빼빼로를 한통씩 자리에 두고 남은 두통은 내 자리에 두고 조금씩 꺼내 먹으며 업무를 볼 때만 해도 하늘은 잠잠했으니까.
오전 동안 당분보충으로 집중해서 업무를 보고 나니 조금 한가해져서 나는 두 번째 안 하던 짓을 시작했다. 새로 sns의 상호 팔로워가 된 사람과 DM을 나누는 일이었다.
'사진을 참 잘 찍으시네요.'
이 한마디로 시작된 나이도 성별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익명에 가까운 사람과의 대화. 공통 관심사가 있었기에 대화는 의외로 스무스하게 흘러갔고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큰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기에 이 사람에게도 빼빼로 데이의 선물을 나누고 싶었다.
대화 도중에 상대방이 남성분인걸 알게 되어 다 큰 성인남성에게 초콜릿 과자보다 조금 더 편안한 걸 선물하고 싶어서 스타벅스의 자바칩 프라푸치노를 선물했다. 한 컵의 초콜릿맛 커피.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고마워하던 상대방과의 대화는 여섯 시간이 넘도록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8시 반쯤 대화는 끊어졌다. 무언가를 기대하고 시작한 대화가 아니었기에 무어라 인사를 해야 할지 어려워 한동안 고민을 하다 11시쯤 한마디를 보내두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 고마웠어요.'
서로 가까워진다는 마음만으로 이대로 머무르면 안 될까?
- 작자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