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키스 자렛 유럽피언 쿼텟의 ‘Belonging’을 들으며
모든 행동이 낯선 풍경처럼 생경한 날이 있다. 그런 날의 순간순간을 기억해 내기란 어렵지 않다. 새로 산 셔츠를 입은 나는 거울 앞을 떠나지 못했다. 향수를 듬뿍 뿌리고, 몇 개 되지 않는 신발을 바꿔 신어보고, 내렸던 머리카락을 올려보기도 했다. 옆으로나 뒤로나 거울 속에는 똑같은 사람이 서 있을 뿐인데 나는 그렇게나 서성이고, 더듬거리고, 망설이고 있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 그녀를 옆자리에 태우기까지 나를 지배하는 이 기분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몰랐던 게 분명하다. 사소한 대화와 의미 없는 농담마저 하나의 징후인 양 나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는 한적한 바다에 차를 세우고 커피를 마셨다. 나는 새끼 거북이 두 마리가 바다를 향해 기어가는 사진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그녀에게 고백했다. 그녀를 쳐다보지는 못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난처하고, 당혹스럽고, 불안하고, 불쾌할 수도 있을 급작스러운 고백에 우리는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멈춰 있었다. 그 시간, 흐르면서도 멈춰있던 그 사적인 시간은 아마도 떨림의 시간이었다.
대학에서 수필론을 가르치던 한 교수님은 발표 때문에 긴장한 나에게 “떨림을 사랑하십시오.”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의아했고, 놀림감이 된 기분마저 들었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사회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고, 무슨 일에서건 능숙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무엇보다 급작스레 두방망이질하는 심장을 제어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로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세계를 여행하고, 미디어 매체에 정기적으로 출연하고, 대중 앞에서 강의를 진행할 기회들이 주어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 안의 떨림이 사라져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억척스러워졌고, 뻔뻔해졌고, 오만해졌으며, 그 모든 것들에 점점 무감각해지고 있었다. 변해가는 나의 모습이 싫지 않았다. 나는 내가 바라던 어른이 되어 가고 있었다.
다시 그날의 기억으로 돌아가 본다. 나는 그녀에게 고백의 대답을 듣지 못했고, 우리는 조금 어색해진 채 차로 돌아왔다. 해가 짙은 오후였다. 좀처럼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어색해진 시선들은 각자의 풍경을 헤매고 있었다. 나는 오디오를 재생했다. 어떤 앨범이 들어있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공기를 바꿔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카 오디오 속에는 키스 자렛이, 그 깐깐한 피아니스트가 납작한 채로 들어가 있었다. 그는 우리를 위해 간절한 숨소리와 기괴한 몸동작 소리를 고스란히 담아 'I loves you porgy'를 연주해주었다. 우리는 각자의 창밖을 살피고 있었지만 두 짝의 귀는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또한 나는 몹시 떨고 있었다. 조급했던 마음과 비스듬한 햇살과 어색한 공기와 고독한 피아니스트의 연주는 묘하게 어우러졌다. 우리는 그렇게 키스 자렛이 연주를 멈출 때까지 말없이 있었다.
LP숍에서 다시 만난 키스 자렛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Beloning’의 표지에는 네 가지 색의 돌(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지만)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유러피안 쿼텟(Jan Garbarek, Keith Jarrett, Palle Danielsson, Jon Christensen)의 주자 들일 것이었다. ECM 재즈 시리즈는 믿을 수 있는 앨범이었다. 무엇보다 마술 같은 그날의 순간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키스 자렛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굴었다. 피아노라는 바다에 뛰어든 개구쟁이가 신나게 물장구를 치고 있는 게 아닌가. 인상적인 멜로디나 규칙을 만들 작정은 없어 보였다. 악기와 악기들이 서로를 이끌거나 다독이지 않았다. 특정 악기가 도드라지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이 맥락 없는 악기의 향연은 어떤 때에는 불협화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들의 연주에는 무언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소리의 충돌에 나는 기분이 들떠버렸다. 마치 그들이 마련한 어떤 놀이의 한 부분을 공유하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 놀이하는 재즈 연주자들의 초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속에 편입하지 못해 주춤하는 나의 모습은. 이성적인 판단과 합리적인 사고에만 갇힌 어떠한 전형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나는 이제 떨리지 않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문득 극복하려 애썼던 그 떨림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떨림을, 떨림의 대상을, 떨림의 주체를 소환하고 싶었다. 나는 다시 미숙한 인간처럼 망설이고, 서성이고, 더듬거리기를 원했다. 떨림을 사랑하라. 그 말은 십수 년이 지나 이제야 나에게 도착했다.
다시 말하고 싶다. 고백의 그 시간, 흐르면서도 멈춰있던 그 사적인 시간은 떨림의 시간이었다. 그것은 초조하지만 진지한 시간이며, 음률이 담긴 즐거운 시간이며, 가혹하지만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어쩌면 그건 놀이의 시간이며, 재즈의 시간이라 해도 좋겠다. 그리고 그건 가장 사람다운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가끔 그 시간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