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성은 Jan 05. 2019

어둠이 내리기 직전의 목소리

- 알 재로의 <Breakin' away>를 들으며

  목소리의 미소


  알 재로의 목소리는 교묘하지 않다. 아침을 깨우는 원시 부족장의 소리처럼 맑고 힘차다. 정직하고, 단단하고, 원형적이다. 입술은 타악기처럼 묵직하고, 그의 목젖은 관악기를 누르는 손가락처럼 재빠르게 움직인다. 아치형으로 굽은 입가의 주름(그것은 분명 미소다)은 현악기의 현과 닮았다. 자유롭고 매끄러운 악기들이 한 자리에 있다. 멜로디 속에 그의 입술이, 오물거리는 입모양이 보인다. 또 보이는 건 위아래로 움직이는 혀와 커다란 목젖, 숨을 빨아 당기는 콧구멍과 내뱉는 바람, 숨통, 그리고 역시나 미소. 이상하다, 마이너 키의 노래를 부르는 그에게 미소가 보인다. 그는 손뼉으로, 치아로, 미소로 노래를 한다. 그는 몰입하는 만큼은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심지어 그는 바닥 위로 슬쩍 떠올라 무대를 벗어나기도 한다.


어둠이 내리기 직전의 목소리


  팝과 재즈 R&B의 분야에서 그래미상을 수상한 전설 알 재로를 접한 건 낙동강 대로를 달리고 있을 때였다. 해는 서산으로 기울어 잔잔한 강의 표면에 윤슬이 내리고 있었다. 두꺼운 구름과 김해공항을 향해 날아가는 비행기와 흔들리는 갈대가 차창을 캔버스로 만들었다. 나는 창문을 반쯤 열어둔 채 라디오를 틀었다. 때마침 디스크자키는 한 가수를 소개하려던 참이었다. 그는 목소리의 기술로 보자면 알 재로를 따라올 자가 없다고 말하며 ‘Spain’이라는 노래를 틀어주었다. 목소리의 기술이라니. 나는 볼륨을 높였다. 왼쪽으로 강이 흐르고 있었고, 해가 저물고 있었다. 노을은 세상을 짙게 만들었다. 노래가 흘러나오는 동안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중인지 잠시 잊어버리고 말았다. 달리는 이 길이 스페인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나는 완벽하게 음악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알 재로의 목소리는 그윽한 하늘을 뚫고 나온 한 줄기의 빛처럼 영롱했다.


영원한 목소리


  2017년에 세상을 떠난 알 재로의 명반들을 살펴본다. 그중 그의 미소가 잘 드러난 사진을 커버로 쓴 ‘Breakin' away’를 재생시킨다. 곡이 멈추는 사이마다 조용히 그를 기려 본다. 그의 곡들은 대중적이며 안정적이다. 하지만 앨범의 제목처럼 분명한 탈주가 있다. 그건 목소리의 탈주다. 알 재로가 가진 음역대의 스펙트럼이 넓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건 심도다. 음절과 음절마다 깊은 우물 속에서 한 두레박씩 퍼 올리는 것 같은 귀한 맛이 있다. ‘Teach me tonight’은 그런 그의 소리를 잘 담아낸 곡 중 하나이다. 마지막 수록곡이기에 노래가 끝나면 자동으로 턴테이블이 재생을 멈춘다. 털컥하며 톤암이 올라가는 소리에 좀처럼 마음이 정리되지 않는다. 아직 그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은 건 나 혼자만의 염원은 아닐 것이다.


  ‘Teach me tonight’은 많은 가수를 거쳤다. 냇 킹콜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허스키한 소리를 통해 클래식한 재즈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에롤 가너의 피아노 연주 사이로 흘러나오는 허밍과 원곡을 부른 다이나 워싱턴도 좋다. 니콜 헨리도 애절하다. 롱드레스를 입고 ‘오늘 밤 날 가르쳐주세요.’라고 말하는 그녀는 뇌쇄적이다. 알 재로 버전은 뭐라고 하면 좋을까. 그의 목소리는 목에 갇혀있지 않다. 육체를 벗어나 있다. 그는 이제 세상에 없지만, 사실, 이미, 그는 없었다. 그가 살아있던 시절에도 목소리는 몸을 벗어나 무대 위를 유령처럼 날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떨리는 몸짓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다른 악기들을 살핀다. 언제 들어가고 언제 나와야 하는지를 직감적으로 느낀다. 결코 자신의 목소리만 도드라지길 원하지 않는다. 후렴에 이르면 그는 악기들 사이로 스캣(의미가 없는 음절로 노래하는 즉흥 창법)을 한다. 빠르게 또는 느리게 그의 입술이 움직인다. 음표를 기울여놓았다가 세우고, 오선 줄을 꼬았다가 풀어놓는다. 그는 다음에 나올 음표를, 박자를 알고 있을까. 그는 자신의 입이 내뱉을 스캣의 방향을 알까. 그 즉흥이 사람을 춤추게 한다는 사실을 알까.


  어느 순간 그의 목소리는 다른 악기들 사이에 숨어버린다. 사람들은 박수를 친다. 악기 하나가 연주를 마쳤기 때문이다. 재즈란 악기들의 연주가 아닌 조화다. 위대한 보컬리스트는 궁륭 아래 어둠 속에서 조용히 다른 악기들의 조화를 즐기고 있다. 여린 촛불이 그를 비추고 그림자는 내벽 위를 춤춘다. 초가 꺼지면 어둠이 찾아오겠지. 하지만 그는 어둠이 내리기 직전의 목소리. 초는 아직 제 몸을 불태우고 있고, 다시 알 재로가 입술을 슬며시 펼쳐낸다.



이전 04화 떨림의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