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한궤도의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를 들으며
나는 앞으로도 쉽고 편하고 가볍게 음악을 듣게 될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어렵고 불편하고 무겁게 음악 앞에 서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 누군가, 락의 시대는 진작 끝났는데,라고 말해도 그의 곁에 서서 긍정도 부정도 아닌 표정으로 그 시간을 공유할 것이다. 마왕은 부디 그곳에 잘 있을 것이다.
음악을 듣는 일은 점점 쉬워지고 있다. 편리해지고, 가까워졌지만 그만큼 가볍고 대수롭지 않게 되어버린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가사를 곱씹거나 곡의 태생적 의미를 되묻게 되는 음악은 급격히 줄고 있는 것 같다. 그와는 반대로 나의 기분은 음악 안에 잠시 머물고 싶거나 되돌아가고 싶은 날이 많아졌다. 간혹 마음에 드는 악기나 멜로디에 발걸음을 주저하고 가만히 음악과 함께 서 있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나의 기대와는 달리 음악의 본질은 배경이나 분위기에 그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저마다 최선을 다해 그 순간을 즐기고 있다면 그보다 좋을 건 없다는 생각도 든다.
돌이켜보면 음악이 내 삶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진지하던 순간도 있었다. 열 살의 나와 일곱 살의 여동생은 라디오 앞에 앉아 가요를 녹음하고 늘어질 때까지 듣기도 하고, 따라 부르기도 하며 하루를, 주말을, 한 달 전체를 쓰기도 했다. 그때의 음악이 지금보다 더 매혹적이었냐 하면 아마 아닐 것이다. 나는 그저 음악을 통해 내 마음이 작동하는 방식과 그 묘한 느낌에 놀라 아직 무뎌지지 않은 살아있는 마음의 형태에 귀를 기울인 건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마음을 움직일 정말 많은 것들이 존재함에도 이 마음이라는 건 점차 무뎌지고야 만다. 어른은 단단하게 굳어가는 마음의 무게에 더 이상 슬퍼하지 않는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다 어느 날에는 무심코 찾은 오래된 LP상점 안에서 벽을 짚고 선 채로 가상의 턴테이블 위에 판을 올려두고 말없이, 오래된 음악들을 엿듣기도 하는 것이다. 당장에는 어떤 표정도 짓지 않으려 애쓰면서.
나보다 한참은 어린 신해철의 사진을 발견했을 때, 그랬다. 간혹 들러 삼사십 분 정독하듯 판의 제목을 훑고선 기어코 한 장을 조심스럽게 구입하는 나를 알아본 사장님은 담배 한 대를 입에 물며 이렇게 말했다.
“락의 시대는 진작 끝났는데.”
가게 안에 있던 다른 손님에게 한 말이었는지, 나에게 한 말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자신에게 한 말인지도 몰랐다. 해가 저무는 토요일 오후, 담배연기가 흐르는 LP상점 안에서 나는 암호 같은 LP판의 제목들을 살피고 있었고, 그러다 ‘무한궤도’의 처음이자 마지막 앨범을 꺼내 들게 되었고, 나의 영웅이었던 신해철의 앳된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신해철, 김재홍, 조현문, 정석원, 조형곤, 조현찬 이 여섯 멤버는 저울이 탑처럼 쌓인 조형물 앞에서 각자의 포즈를 취한 채 서 있었다. 강렬한 표지의 기호들보다 뒤표지의 흑백 사진에 눈길이 간 까닭은 그들의 표정이, 어쩌면 내가 잃은 것인지도 모를 그 표정이 거기에, 저울의 탑 앞에, 흑백의 형태로, 나란히, LP판의 뒤표지 위에, 이를 듣고 커왔던 소년인 하지만 지금은 더없이 자라 버린 게다가 어떤 표정을 제때 지어야 좋은지 잘 알지 못하는 한 어른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두 손을 머리 뒤로 두거나 이를 보이며 활짝 웃거나 땅을 바라보거나 하는 포즈와 오래된 표정들. 누가 사진을 찍은 것이며 어떤 요구와 주문과 이야기가 오간 건지 알 수 없지만 1989년 6월 출시될 앨범을 위해 그들은 각자의 마음과 표정을 내보인 채, 바늘이 시계처럼 3시 6시 9시 0시를 지시하는 저울의 탑 앞에서 사진을 찍은 것이다.
하얀 담배연기 속에 젊은 날들의 꿈들을 거닐면서 얼마 남지 않은 그러나 한없이 길기만 한 세월의 끝자락을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끝을 향하여’, 신해철의 내레이션 중에서)
무한궤도의 ‘끝을 향하여’는 3막의 구성으로 이뤄진 혁명적인 곡이다. 피아노로 시작되어 신해철의 내레이션과 김태원(부활)의 기타까지, 진정 끝을 향하여 모든 것을 쏟아내는 이 곡 속에는 웅장함과 비장함 게다가 돌이킬 수 없는 그들의 표정이 담겨 턴테이블 위를 천천히 돌아가고 있다. 나는 진중한 음악의 메시지와 사진 속 그들의 표정과 저울의 무게 너머로 한 천재 아티스트의 죽음을 엿본다. 이미 30년이 지난 표정들에는 그만큼의 더께가 쌓여 이제 누구도 그들의 얼굴과 언어와 음표와 멜로디를 잘 찾아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대단히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내가 사는 세상의 이치라는 걸 나도 이제 짐작하고 있지만 오늘은 이들을 따뜻한 방으로 초대해 근사한 저녁을 대접하고 싶다.
나는 앞으로도 쉽고 편하고 가볍게 음악을 듣게 될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어렵고 불편하고 무겁게 음악 앞에 서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 누군가, 락의 시대는 진작 끝났는데,라고 말해도 그의 곁에 서서 긍정도 부정도 아닌 표정으로 그 시간을 공유할 것이다. 마왕은 부디 그곳에 잘 있을 것이다.